자보탄 연구소 ( 자두를 보고도 감탄하는 방법을 연구합니다) - #3
치이이익~
잘 익은 쌀의 향을 품은 증기가 밥솥에서 뿜어져 나온다.
밥솥을 열어 후후 불며 주걱으로 겉 층을 뒤적여 준다. 찹쌀과 멥쌀의 딱 중간 정도 찰기.
윤기가 반지르르 하고 쌀눈이 생생하게 살아서 수천 개의 시선이 나를 쳐다보는 것만 같다.
언젠가 TV에서 알게 된 “백진주”쌀이다.
깨끗한 유리그릇에는 나와 아내의 밥을 담고 뽀로로가 그려진 플라스틱 밥그릇에는 딸의 밥을 담는다.
그리고 남해안 저염 멸치로 육수를 내고 부산 어머니가 보내주신 집된장과 산지에서 직접 배송시킨 근대를
넣은 근대 된장국을 남색 사발에 담는다.
식탁의 중간에는 백후추와 히말라야 핑크소금을 머금고 있는 호주산 소갈비살이 자리하고, 얼마 전 홈쇼핑에서 주문한 안동 간고등어도 바싹 구워진 자태를 뽐내며 갈비살 옆자리를 차지한다. 오늘의 메인 요리인 셈이다.
그리고 넓은 대나무 사발에 각종 쌈채소와 양파를 썰어 엑스트라 버진 올리브유와 발사믹 식초를 뿌린 내 맘대로 샐러드가 놓인다.
사각형의 네 섹션으로 나뉜 반찬 접시에는 배추김치, 파김치, 낙지젓, 무말랭이가 담기고 마지막으로 딸아이가 좋아하는 유아용 조미김이 놓인다.
가족과 함께 맛있게 음식을 먹는 것도 즐거움이지만, 다 먹고 난 후 설거지를 하는 것도 그 못지않은 큰 즐거움이다.
설거지는 우리네 인생을 많이 닮았다.
밥하기를 끝낸 압력밥솥의 내 솥 설거지는 속전속결로 좋은 결과를 낸 프로젝트와 같다.
미세한 불조절과 뜸들이기를 하지 않아도 빠른 시간 내에 훌륭한 결과를 도출하고 일의 마무리도 단순하다. 세제도 필요 없이 물과 스폰지 수세미만으로도 깔끔하게 끝난다. 뒷끝 없이 상쾌하다.
소갈비살을 구웠던 프라이팬 설거지는 불꽃처럼 사랑했다 헤어진 여인의 기억과 같다.
선홍색으로 빛나던 생생한 사랑의 감정은 달구어진 찰나의 표면 위에서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급격하게 익어간다. 주변으로 튀어나가는 눅진한 감정의 파편들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길이 없다. 모든 것이 끝나고 난 후 아쉬움이나 게으름으로 그 흔적을 방치해 두면 켜켜이 쌓인 묵은 때처럼 벗겨내기가 쉽지 않다.
샐러드용 대나무 사발 설거지는 오래된 벗과 같다.
흐르는 물로만 설렁설렁 씻어내어도 충분하다. 헐거움의 신뢰다.
아이의 플라스틱 밥그릇 설거지는 어머니 마음과 같다.
아무리 해도해도 안심이 안된다.
마지막으로 밑반찬 접시 설거지는 주식과 같다.
언제나 적당함의 계획이 실패하고 반찬이 남는다. 다시 보관하자니 결국은 버려질 것 같고 당장 버리자니 아깝다. 어떤 결정을 내리든 씻어내는 순간에는 또다시 적당을 생각한다.
설거지를 깔끔하게 끝 낸 후, 커피를 내리고 쇼파에 앉아 한 모금씩 홀짝 거린다.
설거지가 끝나자마자 또다시 설거지거리를 만들어 내는 것 또한 인생과 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