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적인 삶은 좋은 건가요?
내 MBTI는 ENTJ이다. 나는 극한의 효율을 중시하고 계획을 사랑한다. 그런 탓에 완벽주의 성향이 강하고 고집이 센 까다로운 성격으로 자주 사람들과 언쟁을 겪는다. 그래도 이 성격의 장점은 있다. 비 효율적인 것을 피하기 위해 항상 계획을 짜고 조직을 체계적으로 이끈다. 그 덕분에 목표를 달성하는 데 있어서 ENTJ만큼 알맞은 성격유형도 없다. 대학 조별과제에서 조장을 맡아 프로젝트를 성공으로 이끌었고 영어 과외를 하면서 학생들의 성적도 많이 올렸다.
계획을 세우는 건 좋다. 나의 현재 상태를 점검하고 앞으로 나아갈 길을 알려준다. 수많은 성공한 사람들도 하나 같이 입을 모아 계획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모두에게 주어진 시간은 똑같기에 남들보다 한 걸음 앞서가려면 계획대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나도 고등학교 때부터 내 삶을 플래너 속에 담았다. 크게 월간, 주간, 일일 계획을 세우고 목표 달성을 위해 노력했다. 특히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 중 한 명인 벤저민 프랭클린의 3-5-7-9 법칙을 따랐다.
3: 독서와 운동 등 자기 계발 시간
5: 식사를 포함한 여가 시간
7: 수면 시간
9: 일하는 시간
규칙적이고 충분한 수면 시간이 최우선이다. 피곤한 상태에서 자기 계발이나 일이 제대로 될 리가 없다. 그리고 멀티태스킹은 최대한 피했다. 우리의 뇌는 멀티태스킹을 하지 못한다. 단지 한 작업에서 다른 작업으로 집중력을 빠르게 옮기는 것이다. 그러니 전국의 수험생들이여, 식사와 공부는 병행할 수 없다. 밥을 먹은 후에 다시 책상에서 공부하는 게 훨씬 효율적이다. 참고로 굳이 3-5-7-9로 맞추지 않고 자신에게 맞는 시간을 자유롭게 정해도 괜찮다. 중요한 건 나와 일 사이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이다. 나는 여가 시간과 자기 계발 시간을 뚜렷하게 나눈 덕분에 대학 입시에도 성공했고 건강한 몸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내가 군 입대 이후 자주 짜증과 우울감에 휩싸였다. 아마도 내 삶을 계획대로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지 않을까. 군 생활은 정해진 규칙이 있다. 그리고 종종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지면 개인 시간이 보장되지 않는다. 완벽하게 세운 계획이 하나둘씩 망가질 때마다 계획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도 함께 무너졌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계획을 이루지 못했을 때는 스스로를 자책했다. 계획을 세우고자 하는 성격과 단체 생활이 부딪혀 생긴 뫼비우스의 띠를 달리고 있었다. 나 자신이 피해자이자 가해자가 된 것이다.
삶의 길을 잃었을 때는 자신이 그 길을 걸어가는 이유를 되물으라는 얘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계획에 집착하는 이유를 생각해 봤다. 계획을 세우면 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할 수 있다. 하지만 그건 계획의 기능일 뿐 이유가 되지 못한다. 이유를 알기 위해서는 내가 무엇을 계획하는지, 그 목표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내 플래너에는 훈련소를 제외한 군생활 1년 7개월 동안 이룰 목표와 해당 기간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그래서 한 번 간단히 목표만 나열해 봤다.
컴퓨터 활용능력 1급, 매일경제 자격증, 한국사 능력 시험, 무역 영어, 텝스, 군 E러닝, 등등...
이들 사이에 공통점이 보였다. 우리가 흔히 준비하는 취업 스펙이다. 그제야 내 군생활 계획은 결국 사회에서 취업을 준비하는 내 또래로부터 뒤떨어지면 안 된다는 강박 속에서 나온 것임을 깨달았다. 강박이 만들어낸 계획이니 그것이 조금이라도 뒤틀렸을 때 화가 나는 건 당연했다. 단지 많은 사람들이 준비한다는 이유로 문학을 좋아하는 내가 영어 단어와 프로그래밍 코드만 개인 시간에 보고 있었다. 계획 그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중요한 건 계획의 방향성이다. 지금 같은 불경기에 취업은 중요하다. 그러나 미래의 3-5-7-9 법칙 속에서 가장 많은 부분을 차지하게 될 시간을 관심 없는 분야에 투자하는 것은 스스로를 뫼비우스의 띠 위로 던져놓는 행위가 아닐까. 무작정 남들이 가는 길을 따라가는 건 정답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다시 플래너를 열고 하고 싶은 일들을 적기 시작했다.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유럽 배낭여행 떠나기, 글쓰기, 멋진 몸만들기, 영화 보거나 소설 읽기, 등등...
이번에는 계획에 집착하지 않고 자유롭게 개인 시간을 보냈다. 글이 쓰고 싶을 때는 몇 시간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영화가 보고 싶을 때는 주말 동안 영화에만 집중했다. 결과는 꽤나 만족스러웠다. 적어도 전처럼 우울하거나 무기력하지 않다. 내 삶은 무계획에 가까워졌지만 내가 가야 할 길은 전보다 뚜렷이 보인다.
생각해 보니 삶은 늘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학창 시절에는 뜬금없이 브라질 유학을 가게 됐고 군대는 카투사와 육군 어학병을 준비했지만 지금은 공군으로 복무하고 있다. 내가 남미에서 살게 될지, 그리고 20대 초반을 전투기와 함께 지내게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 당연히 대비한 적도 없다. 영어조차 서툰 상태로 국제학교에 입학해서 마음고생을 했고 군 생활도 매일이 배움의 연속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계획이 어긋나면 화를 낸다. 계획을 세우는 데 들인 수고를 생각하면 자연스러운 반응일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여행에서 계획했던 맛집을 찾아갔는데 휴무일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면 짜증과 아쉬움이 밀려올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변에 다른 맛집을 방문할 기회를 얻었다고 생각한다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지지 않을까? 어찌 됐든 여행의 진미는 새로움을 찾는 게 아닌가. "오히려 좋아"라는 삶의 태도는 불확실성이 가득한 우리 삶에서 진가를 발휘한다.
계획적으로 사는 건 좋다. 뚜렷한 계획과 그걸 행하는 끈기는 꿈을 현실로 만들어준다. 그러나 계획적인 삶에 집착하지는 말자. 삶은 알 수 없으니까. 누가 알겠는가, 내 예상과 다른 새로운 가능성이 나를 반겨줄지. 삶의 태도를 바로잡고 어느 상황이든 배우고자 하면 가치 있는 무언가를 배울 수 있다. 그렇게 오늘 하루도 다짐한다.
계획과 무계획, 그 사이 어딘가에서 우리의 삶은 물처럼 흐른다. 그러니 흐름을 타고 유연하게 나아가자.
《글을 쓰고 싶은 이유》
https://brunch.co.kr/@koroshst2/1
《미니멀리즘, 버림의 미학》
https://brunch.co.kr/@koroshst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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