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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진동길 Jun 23. 2023

소금단지

성 요한 세례자 탄생 대축일

앙드리아 베로키오(Andrea del Verrochio, 대략1435-1488) ‘세례 받는 그리스도’(The Baptism of Christ )


“섬들아, 내 말을 들어라. 먼 곳에 사는 민족들아, 귀를 기울여라. 주님께서 나를 모태에서부터 부르시고 어머니 배 속에서부터 내 이름을 지어 주셨다. 그러나 ‘나는 쓸데없이 고생만 하였다. 허무하고 허망한 것에 내 힘을 다 써 버렸다. 그러나 내 권리는 나의 주님께 있고 내 보상은 나의 하느님께 있다.’”(이사 49,1.4)


오늘 이사야서는 예언자의 소명과 회한과 희망이 한꺼번에 느껴지는 한 곡의 노래처럼 들립니다. 예언자는 하느님의 사랑을 전하며 그분과 맺은 계약을 자녀들이 다시 기억하게 합니다. 그러나 때때로 돌밭과 가시밭 같은 백성들에게 전달된 하느님의 사랑이 싸늘하게 식은 주검과 같은 꼴로 되돌아올 때는 그 허무함과 허망감은 예언자로 불림받은 자신의 정체성마저 흔들어놓을 때가 있지요. 그러나 하느님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긴 예언자는 다시 일어섭니다. 그 권리는 언제나 주님께 있고 그 보상 또한 하느님께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기복염거(驥服鹽車)


고사성어 중에 ‘백락일고(伯樂一顧)’라는 말이 있습니다. 명마(名馬)도 백락을 만나야 알려진다는 뜻인데요. 천재도 알아주는 자가 있어야 빛을 본다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우선 '백락(伯樂)'이라는 인물에 대해 알아보면 그는 주(周) 나라 때, 당대 최고의 말 감정가였습니다. 그의 본명은 손양(孫陽)인데, 말에 대한 지식이 워낙 탁월해서 사람들은 전설에 나오는 천마(天馬)를 주관하는 별자리인 백락이라는 별명으로 그를 불렀습니다.


그 안목이 얼마나 탁월했는지 그가 고르는 말은 백이면 백 명마였다고 하는데요. 그래서였을까요? 백락이 지나가다가 잠시 말을 쳐다보기만 해도 그 말의 가격이 10배가 되었다고 합니다.



또 다른 일화는 <전국책(戰國策)>에 나오는 천리마의 이야기인데요.


중국의 그랜드캐년으로 알려진 태항산(太行山)을 늙은 말 한 마리가 소금을 잔뜩 실은 수레를 끌면서 오르고 있었습니다. 다리는 자꾸 접혔으며 말굽은 헤어지고, 땀은 흥건하게 몸을 적셨습니다. 하지만 그 말은 이미 늙어서 아무리 힘을 써도 높고 가파른 오르막길을 좀처럼 간단히 오르지 못하고 있었지요.


백락(伯樂)이 그 말을 알아봤지요. 말은 하루에 천리를 내닫는 명마, 즉 驥(기)였습니다. 명마를 알아보는 데 일가견이 있던 백락의 눈에 비친 그 말은 틀림없는 천리마였지요. 마음이 안타깝고 애달펐습니다.


하지만 백락은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그가 그 말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고는 지나가던 자기 수레에서 내려 천리마의 멍에를 잠시 벗겨주는 일밖에는 달리 해 줄 게 없었습니다.


그래도 그것이 고마웠던가. 천리마는 소금 수레의 멍에를 벗겨주자 아주 높은 소리로 울었다고 하지요. 그 소리가 어찌나 컸던지 깊고 험한 태항산 골짜기를 가득 메웠을 뿐만 아니라 하늘 끝에까지 울려 퍼졌고 천리마의 비참한 운명을 목격한 백락도 함께 울었다고 전해집니다.


타고 난 천성은 천리마였으나 그를 알아보지 못한 주인에 의해 소금 수레를 끄는 일로 일생을 보내야 했던 천리마. 얼마나 달리고 싶었을까요?


하루에 천리 길을 가는 천리마도 그 말의 가치와 능력을 모른다면 소금밭에서 소금가마를 끌어야 하는 게 어디 말뿐이겠습니까마는 이를 일컬어 ‘기복염거(驥服鹽車)’라고 합니다.


이렇듯이 천리마나 명마가 세상에 이름을 날리기까지는 타고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지요. 천리마의 그 천성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또 상황과 시대의 부름이 있어야 하는 것 같습니다.



요한 세례자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가 헛되이 소금 수레를 끌고, 유능한 사람이 천한 일에 종사하는 안타까운 상황들은 어제오늘만의 일이 아니지요. 다행히 요한 세례자는 하느님께서 그를 선택하셨고 예수님께서 그를 알아보셨으며, 그 시대의 사람들도 그를 알아봤습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여자에게서 태어난 이들 가운데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인물은 나오지 않았다.”(마태 11,11.)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서 이보다 더 영광스러운 평가는 없겠지요.


세례자 요한은 ‘구약시대 마지막 대예언자’이자 ‘메시아의 선구자’. 또 ‘구약과 신약의 가교(架橋)’이자 ‘진리의 증언자’로 기억됩니다.


그 이름에도 ‘하느님은 은혜로우시다’, ‘하느님은 자비로우시다’, ‘하느님께서 불쌍히 여기신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데요.


이미 아시는 것처럼 처음부터 그의 이름이 요한으로 불리게 된 것은 아니지요. 사실 요한의 운명은 태중에서부터 예사롭지 않았고 역경을 겪었습니다.



거룩한 분노


아버지 즈카르야가 아들을 하느님의 손에 내어 맡기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습니다. 결국 고집 센 아버지 즈카르야도 하느님 뜻과 참 예언자를 원하는 시대의 요청에 무릎을 꿇게 되지요. 진정한 천리마. 참된 예언자는 이렇게 세상에 드러나게 됩니다.


“즈카르야는 글 쓰는 판을 달라고 하여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썼다. 그러자 모두 놀라워하였다. 그때에 즈카르야는 즉시 입이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하느님을 찬미하였다.” (루가 1,57-66.80 )


아버지 즈카르야가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고 쓰자 사람들은 놀라워하였습니다. 그리고 고집불통 즈카르야의 입은 열리고 혀가 풀려 말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마침내 그의 말은 하느님을 찬미하는 말이 되었습니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과 그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삶은 축소되고 생략되었지만, 복음이 전해주는 짧은 말씀 안에서 하느님의 ‘거룩한 분노’를 묵상하게 됩니다.


그의 삶은 세상과 역행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대로 바보 같은 삶이었습니다. 하지만 극도의 청빈 생활 중에도 그 내면의 삶은 예수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내면의 삶은 외면으로 드러나고, 외면의 삶은 그 내면의 삶을 말해줍니다. 광야의 삶에서 세례자 요한이 지닌 것이라고는 겨우 몸을 가릴 정도의 낙타 털옷 한 벌이 전부였고, 그의 음식은 메뚜기와 들꿀 뿐이었습니다.(마태 3,4.) 그는 선구자로서 외롭고 힘든 삶을 살았지요.


세례자 요한의 삶은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하고, 무엇을 위해 살 것인지 말해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을 비춰주는 내면의 거울이 되었지요. 진정한 인간의 삶을 비추는 거울 말입니다.


‘거룩한 분노’의 삶을 지향할 수 있기를. 가난한 사람들과 거리로 내몰린 사람들, 억압받는 이들과 참된 자유를 추구하는 이들의 ‘거룩한 분노’, ‘거룩한 소리’가 될 수 있기를. 그래서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의 은총’이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세상에 외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요한 3,30)는 고백이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의미하는지, 신앙인에게 기복염거(驥服鹽車)의 의미는 무엇인지 함께 묵상할 수 있는 복된 날 되시기를 함께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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