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날ㅡ 나는 F로 다가가 T로 이야기하고 싶다
나는 F로 다가가 T로 이야기하고 싶다
한눈에 그를 알아본다
T보다 F로, 나는
언제나 그들 앞에 선다
도망쳐야 할까
모른 척해도 될까
다가가야만 할까 아니면
마음으로 마주 해야 할까
보이지 않는 완장부터 살핀다
호루라기를 불 때
나는 이미 도망치기로 한다
그의 몸짓과 언어로부터
하지만 꼭 피할 수 없다면
게임을 해야 한다
이미 심장은 전쟁 모드다
나는 T를 앞세우고 싶지만
F가 치고 나선다
말 꼬리 하나하나 되받아 친다
공감과 이해되는 말조차
철저하게 무시한다
지금 내게 논리와 법은 중요하지 않다
내게 F는 전사다
사소한 일에도 생존을 거는 피의 전사다
앉은자리를 박차고 일어선다는 게 말처럼 쉽지는 않다. 더구나 한 여름에 자전거로 먼 거리를 떠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상식적으로 무모하기 이를 데 없다. 특히 경제적으로 이해타산을 해보면 더욱 그렇다. 내 안에서 수 없이 많은 논쟁이 시작된다.
1. "집 밖은 위험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잖아."
2. "가지 말까?"
3. "아니야. 너도 벌써 한 풀 꺾어진 나이야. 지금 아니면 언제 이런 도전을 해보겠어."
4. "허허. 나이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지금 네가 한창때인 줄 알아? 중간에 포기할 거면 애초에 시도하지 않는 게 좋아. 남들이 알면 돌아서서 비웃어."
2. "그렇지. 날씨도 더운데 그냥 어제처럼 살지 뭐."
5. "기도를 해. 너는 신앙인이잖아."
2. "기도를 했는데... 자꾸 창세기 12, 1절 말씀이 떠올라."
3. "그럼. 됐네. 확신을 가지고 떠나. 아브람의 나이가 일흔다섯이었어."
5. "너는 유목민이야? 아니면 정착민이야?"
승용차는 낙동강하굿둑에 주차했다. 접는 자전거를 트렁크에서 꺼내고 곧 인증센터로 간다. 모든 게 처음이라 일단 무인 인증센터로 간다. 수첩에 인증도장을 찍고 휴대폰 앱에도 인증할 차례다. 어떻게 하는지 몰라 인증센터로 가서 담당직원에게 묻자 무인인증부스로 가면 자동으로 휴대폰앱에 인증된다고 한다. 하나 배웠다.
낙동강하굿둑 인증센터에서 양산물문화관 인증센터로 가는 길은 평지다. 강변을 끼고 달리는 마음은 설레고 희망차다. 들떠 있는 몸도 용기와 힘이 넘쳐 난다. 안개비가 몸을 식힌다. 기분은 이미 국토종주를 다 끝마친 것 같다.
양산물문화관까지 대략 5km 정도 남았을까. 자동차를 주차해 둔 낙동강하굿둑으로 다시 되돌아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날씨도 예상할 수 없다. 이슬비가 언제 장대비로 바뀔지도 모르기에 마음은 더 조급해진다. 뒤숭숭한 생각들로 마음이 혼란스럽다. 하필 그때. 등 뒤에서 굵은 목소리의 남자가 김치찌짐에 탁주 한 병을 마신 목소리로 자전거를 멈춰 세운다. “어이. 어이. 이 길로는 못 가. 멈춰.” 돌아봤다. 60대 중반쯤 돼 보이는 얼굴이다. 나는 그의 얼굴과 옷차림과 걸음걸이, 말투 등을 한눈에 스캔한다. 살아온 그의 삶이 무척 힘들었을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자전거가 멈춰 서자 더 큰 목소리로 고함을 친다. "이 길로는 못 가. 안돼!" 다짜고짜 막묵가네다. 뭐가 안 된다는 것일까? '안돼.'라는 그의 언어가 그의 입에 각질처럼 굳어 있다. 나는 그의 생각이 부정적인 언어들로 색칠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앞뒤 설명도 없이 안 된다 한다. 무조건 못 간다 한다. 이 길은 막혔으니까 왔던 길로 되돌아가라 한다.
그의 언어는 짧고 내용 없이 반복되는 소리는 크고 시끄럽기만 하다. 소설 ‘완장’의 주인공 ‘종술’ 닮았다. 왜소하고 작은 나는 몸으로 상대할 수 없는 대상을 만났을 때, 네 가지 방법 중 하나를 택한다. 도망치거나, 모른 척하거나, 억지로 다가가거나 아니면 진심으로 마주 하거나.
지금은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나는 이미 상대를 완장의 주인공 종술로 인지하고 있다. 권위주의적인 완장을 극혐 하는 좀비 같은 오기가 되살아난다. 나는 오기에게 막무가내식 '아무 말 자동장치'를 달아둔다. 내 이성과 심장은 이제 곧 전쟁할 때라는 걸 알고 만반의 준비를 한다. 그리고 종술이 막무가내로 나올 때는 자기의 논리가 부족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된다. 그렇다면 너도 '아무 말'이나 하면 된다.
이어서 나는 완장을 찬 종술과 막말 대잔치를 했다. 쌍방이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내용 없고 똑같은 말만 되풀이하는 막말이었다.
"왜 안 돼요?"
"안 되면 안 되는 것이지. 돌아가세요. 이 길로는 갈 수 없어요."
"저기 저 사람은 가는 데 왜, 나는 안 된다는 거예요?"
"저 사람은 자전거를 안타잖아요. 그리고 인증센터에 가봐야 아무도 없어요. 오늘은 아무도 없어요."
"원래 무인인증센터거든요. 아저씨... 인증센터가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죠?"
"그래도 안 돼요. 돌아가세요."
전쟁은 허무하게 끝났다. 나도 길게 말할 수 상대쯤은 파악할 수 있다. 그와 나는 서로 F다. 서로가 이유 없이 그냥 싫은 것이다. 그렇게 판단한 나는 그를 무시하고 다른 방도를 생각한다. 내 두뇌는 바보 같다. 한 번 안된다고 결정을 내리면 안 되는 이유를 백만 가지(?) 정도 찾아내는 것 같다. 또 무슨 일이든 된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그 가능성을 백만 가지 정도 찾아내기도 하고. 아무튼 나는 그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돌아가지 않았다. 자전거 전용길이 아닌 다른 길을 찾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힘껏 자전거 페달을 밟는다.
길은 수없이 많다. 길이 없으면 길을 만들어서 갈 수도 있다. 국토종주를 망설이던 내 의지를 저 아저씨가 불태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