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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이해 못 하는 엄마를 이해하려

by 캉생각

날 이해 못 하는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한다.

또 엄마를 원망하지 않으려 한다. 정말로.

엄마가 결혼을 강요하는 것도, 나를 풀어놓은 망아지처럼 두지 못하는 것도, 엄마의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안다.그녀는 그녀가 살아온 세상의 언어로 나를 사랑하고 있을 뿐이다.


엄마 세대에게 결혼은 선택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였다. 진정 혼자 사는 것은 불가능한 시대였다.

남자는 돈을 벌어오고, 여자는 집안을 돌보는. 안과 밖, 외조와 내조가 삶의 진리였다.

당연히 여자는 시집을 가야 하고, 남자는 장가를 가야 비로소 '어른'이 되는 시대였다.
결혼하지 않은 사람은 뭔가(아니면 크게) 부족한 사람으로 여겨졌다.


자연스레 부모들에게 자식 결혼시키는 것까지가 부모 역할의 완성이었다. 아무리 아들딸을 장성하게, 건강하게, 제 몫 건사하게 키웠다 하더라도, 시집장가를 보낸 그 이후에야 비로소 “내 할 일은 다 했다”라고 말할 수 있었다.


아직도 나는 그런 어른들의 주변에 살고 있다. 명절 때 친척들이 “아들은 언제 장가가냐?”라고 물으면, 엄마는 대답이 궁해진다. 주변 친구들이 며느리 자랑, 손주 자랑을 할 때 엄마의 꿍함이 느껴진다. 분명 누나가 제때 결혼을 해서 손자를 안겨드렸음에도, 엄마는 왜 아직 그런 아쉬움을 가질까? 엄마는 온전히 아들딸 모두가 각 가정을 이룬 완전체가 되길 바라는 모양이다.


또 엄마 세대가 가진 확고한 신념도 문제가 되는데, “남자는 아내를 잘 만나야 성공한다.”라는 말이다.

성공한 남자들 뒤에는 항상 내조하는 아내가 있었다("원래 성공할 사람이 결혼은 한건 아니고?"라고 혼잣말을 해본다). 뒷바라지를 잘해주는 여자를 만난 남자는 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 그래서 성공했다.(라고 엄마는 생각한다) 엄마는 그런 여자를 만나면 내 인생이 편해질 거라 믿는다.

하지만... 나는 이미 나만의 방식으로 성공했다.


그리고 가끔 나를 위협? 하는 경고도 하시는데,

“아무리 지금 혼자가 편해도, 아플 때는 누가 돌봐주냐.”
“나이 들면 서럽다.”
그 말들은 현실적인 걱정에서 나온다. 평생 남편이 있었던 엄마로서는 반만 겪어본 경험이겠지만.


하지만 지금은 혼자 밥도 골고루 잘 먹고, 크게 성공도 하며, 아프면 10분 안에 119 구조대가 오고, 병원에서는 전문 간병인이 더 세심하게 돌봐주는 것을 엄마도 같은 시대를 살며 보고 있지만, 일부러 못 본 척하는 것 같다.


엄마가 말하는 ‘늙음’의 외롭고 서러움에도 할 말이 많지만, 한창 ‘젊음’인 내게도 외롭고 서러움은 있다.
그건 결혼의 유무, 성공의 유무, 깨달음의 유무를 떠나 인간의 고질병이라 믿는다. 왜냐면 이 고독은 내가 태어나 기억을 하는 모든 순간부터 따라다녔기 때문이다.


또한 어른들의 시절, 해지면 호롱불에 달빛에 의지해 살던 시대는 갔다.

아무것도 할 게 없어, 부부 목소리에 기대고, 손 꼭 잡고 해넘이를 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게 한다면 그냥 선택일 뿐이다. 지금의 밤은 인류에게 극복되었다. 낮보다 더 화려한 불빛에, 볼거리와 할 거리가 넘친다. 혼자서도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는 시대가 되었으며,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이다. (10년 후, 20년 후의 할 거리가 얼마나 풍부해질지 기대되지 않는가?) 이미 내 주변 유부남들은 밤새 술 마시기, 밤새 플레이스테이션하기, 주말에 만화방 가기를 못한다고 아우성이다. 나는 그들의 유부 라이프를 부러워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개인 라이프를 부러워한다. 물론 그들도 그들만의 행복 속에 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만… 나의 불안과 결핍을 만들기 위해, 굳이 그들의 행복을 확대해 볼 필요는 없겠지.


이런 상황에서 엄마가 걱정하고 우려하는 현실적인 걱정은 이미 흘러간 노래다.

이 걱정은 엄마가 가족을 만들고 얼마나 만족했는지 일깨우는 역할로 소임을 다했다. 그것만으로 난 이미 충분히 느꼈고, 감사함을 느낀다.

하지만 나의 앎은 엄마의 깨달음보다 강렬하다. 그저 엄마에게 다시 전하고 싶다.


아들 걱정 말라고.
나는 다른 행복의 모양으로 아주 만족한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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