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다행히도 내게는 두 명의 조카가 있다.
나보다 두 살 많은 친누나의 두 아이. 큰 애가 아들, 작은 애가 딸이다. (사람들은 이 조합을 ‘도금메달 남매’라 부른다. 남매는 금메달감이지만, 여자가 누나여야 더 좋다나?) 여하튼 그들은 지금 초등학생과 유치원생인 꼬마인간들이다. 참 신기한 건, 같은 부모 아래서 태어났는데도 둘의 성격은 완전히 다르다.
아들인 큰 녀석은 늘 나와 닮았다. 얄밉고, 새침하다. 어른을 무서워하지 않고, 끝없이 놀아달라고 한다. 책을 즐겨 보고, 조잘대며, 머리 쓰는 게임을 찾아다닌다. 예를 들면 혼자 “59 곱하기 21은 뭘까?” 하고 고민한다. 분명 기특한 놈이다.
나는 가끔 생각한 적이 있다.
‘내가 애를 낳는다면 똘똘한 아기를 가졌으면 좋겠다.’
그러나 막상 똘똘이 체험판을 겪어보면 꽤 어려운 게임이라는 걸 곧 안다. 원카드, 체스, 암기게임, 단어 맞추기, 끝없는 질문, 멈추지 않는 호기심. 그걸 다 받아줘야 한다.
아빠 체험 끝.
한 시간 놀아주고 나면 탈진한다. 그런데 부모가 된 자들은 이걸 매일 하겠지. 아침부터 밤까지,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존경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나는 못 하겠다’는 확신이 든다. 어린이집, 학교가 반은 해주겠지만 어린 배터리들의 에너지는 엄청나다는 것도 안다.
반면 어린 여자아이는 마치 사랑을 주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세상의 온갖 예쁜 말을 쏟아낸다.
“삼촌 보고 싶었어요.”
“삼촌이 세상에서 제일 좋아요.”
“삼촌 옷 오늘 멋있어요.”
이게 천성일까, 아니면 어른들에게 사랑받기 위해 벌써 깨달은 걸까. 귀엽고 사랑스러운 걸 보면서도 이런 생각이 드는 건 내 잘못이다. 나는 왜 이렇게 꼬였을까. 심지어 나는 예전에 키우던 강아지가 귀여운 척을 한다고 생각한 적 있다. 그 태초에 본디 귀여운 것을.
그녀는 가끔 내가 보고 싶다고 연락을 하고, 나를 위해 학을 접어 보내온다. 본인 집에 놀러라도 가면 본인 방에서 소중한 무언가를 꺼내 내어준다. 키링, 그림, 스노우볼… 그런 걸 받을 때마다 마음이 뭉클하다. 조그만 아이의 조그만 선물. 그러나 이 삼촌은 그게 부담스럽기도 하다.
'이 순수한 사랑에 내가 합당한 사랑을 줄 수 있을까?'
상냥한 삼촌이라면 응당 생일, 어린이날, 크리스마스, 입학과 졸업 선물, 명절 용돈은 기본이 아닐까?
수시로 놀러 가고, 재밌는 곳에 데려가고, 맛있는 것도 사주는 건 부록일 테고.
그러나 나는 그렇지 못하다. 간헐적으로, 내 생색이 마르지 않을 만큼만 준다. 전화로 “삼촌 집에 놀러 가도 돼요?”라는 말이 와도 “응, 당장 와!”라고 말하지 못한다. 그저 엄마와 선약을 잡고 오라는 공식적인 응대를 하고 만다.
결론적으로 고민을 해보면, 나는 아이를 꽤 좋아한다.
가끔 보이는 아기, 내게 생계를 기대하지 않고, 그의 정서와 장래에 내가 깊이 관여하지 않아도 되는 거리에서
맘껏 안아주고 사랑할 수 있는 아이. 일 년에 두세 번 만나서 실컷 놀아주고, 선물도 주고, 안아주고, 그리고 집에 돌아와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그 정도가 나에게는 딱 좋다.
그래서 나는 삼촌이나 하고 있다.
부모는 전부를 준다.
삼촌은 여유분을 준다.
부모는 책임진다.
삼촌은 함께 논다.
부모는 평생이다.
삼촌은 가끔이다.
나는 얼추 좋은 삼촌은 될 수 있겠지만, 좋은 아버지가 될 자신은 없다.
다들 준비가 다 되어서 부모가 되는 게 아니라는데, 나는 그런 게 싫다. 세상 살며 미성숙한 부모들부터 상처받는 자녀들을 너무 많이 보았다.
조카들이 있어서 나는 ‘아이를 싫어해서 결혼 안 한다’는 스스로의 오해에서 자유롭다. 나는 아이를 좋아한다.
그리고 이 적당한 거리에서, 나는 충분히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