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의 선 이후로 나는 더 이상 선을 보지 않았다.
엄마가 아무리 권해도, 이모에 고모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정중히 거절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 집안은 왜 이리 내 결혼에 관심이 많은지...)
"지금은 일이 바빠서요."
"아직은 생각이 없어요."
"좋은 사람이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얼버무리고, 미루고, 피했다. 차마 "선은 다시는 안 볼 거예요"라고 말할 용기는 없었다.
그 경험은 내게 또 확신을 주었다. 나는 감시와 평가 속에선 행복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걸.
딱 한 번의 선이었지만, 내게 그녀(aka 선녀)는 아주 감사한 경험이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그녀는 사실 내 인생에서 지워… 졌어야 했지만 그녀는 또 내 인생의 토막사건으로 등장하게 된다.
평소와 같은 저녁이었다. 일주일에 네댓 번은 전화하는 엄마에게서 또 전화가 왔다.
‘받을까 말까’. 엄마의 너무 잦은 전화를 피하려다가도, 혹시나 엄마가 빈 둥지 증후군일까? 혹시 급한 일이 있을까 또 착한 아들인척 담담히 전화를 받았다.
"아들 ○○ 기억나?"
나는 잠시 생각했다. '○○? 누구더라?' 머릿속을 뒤져봤지만 떠오르지 않았다.
"누구더라?"
엄마가 답했다.
"너랑 선 본 그 여자."
"아."
순간이었지만 어이가 없었다. 짧게 대답했다. 그 선 이후로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다.
"결혼한대"
나는 굳이 크게 대꾸하고 싶지 않았다. 관심도 없었다. 그저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었다.
"잘됐네."
"회계사랑 결혼한대." 엄마는 아쉬운 목소리였다.
"더 잘됐네."
진심으로 한 축하였다. (긍정적으로 추측하건대) 그녀가 잠시나마 본인의 미래로 봤을 시점의 나와는 달리, 지금의 나는 그녀가 좋아하던 직장도 나왔고, 자유를 찾아 잡다한 일을 하는 방랑자일 뿐이었다. 그런데 회계사남편이라니, 나보다는 훨씬 나은 조건이었다.
그러면서도 순간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만약 그때 관계를 이어갔다면, 그녀의 기준과 가족의 안정을 지키기 위해 나는 내가 싫어하던 회사 생활을 더 가열하게 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그 생각이 스쳐가는 와중에 엄마는 그녀 예비 신랑이 얼마나 부자인지, 신혼집이 어디이고, 결혼식장이 어디인지 내게 구구절절 말해줬다. 나보고 진지하게 들으라는 건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그냥 엄마는 이제 지인의 지인의 딸이 되어버린 그녀에 대해 수다를 떨고 싶었을 뿐이었을 것이다. 마치 모두 아는 연예인 가십을 얘기하듯이.
하지만 웬걸, 나에게 그녀는 단순한 '지인의 딸'이 아니었다.
"그걸 나한테 왜 얘기해?"
엄마는 당황했다. 순간 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흘렀다.
"나한테 그분은 그냥 엄마 지인 딸이 아니라 선 봤던 상대잖아. 근데 그분이 누구랑 결혼하고, 그분이 얼마나 잘났는지를 나한테 왜 말해?"
목소리가 떨렸다. 화가 났다. 곱씹을수록 그랬다.
엄마는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나 나는 한마디 더 나갔다.
"아무리 부모자식 간이라도 성인 대 성인으로서 예의를 지켜주면 좋겠어." 그리고 평생 하지 않는 전화 먼저 끊기를 해버렸다.
그 모진 전화를 끊고 나서 후회가 밀려왔다. 너무 심했나?
결혼도 안 하는 데다가 엄마의 말도 상냥하게 안 들어주는 이런 못된 아들이 있을까?
그와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왜 나는 항상 엄마의 의도를 헤아려야 하고, 이해해야 하고, 참아야 하는가? 엄마 행복이 왜 내 손에 달려있는가?
나는 그날 또 더욱 불효자가 되었고, 가족 간에 선을 긋는 말을 했다.
자꾸 가족에 선을 긋다 보니 정말 가족을 만들기 싫어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있는 가족과도 경계를 세워야 하는데, 새로운 가족을 만들면 또 얼마나 많은 경계를 세워야 할까?
나도 안다. 보통 사람들은 저런 말에 상처받지 않는다는 것을. 그냥 웃으며 "잘됐네요" 하고 넘길 수 있다는 것도.
예민한 내 잘못이다.
근데 이게 나인걸 또 어떡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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