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얘기했다시피, 나는 결혼을 전제로 선을 본 적이 있다.
그 당시는 내가 비혼이 확고한 단계는 아니었다. 그 당시 내가 정신 못 차렸다면 들어오는 소개팅과 심지어 선 자리에 휩쓸려, 결혼을 해버릴 뻔했다. 지금 생각하면 아찔하다.
그녀는 이모의 지인의 딸이었다. 부잣집, 고소득, 일명 '좋은 집안' 여성이었다. 어른들이 보기에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을 것이다. 이모는 전화로 몇 번이고 강조했다.
"정말 좋은 집안이야. 부모님도 좋으시고, 애도 똑똑하고."
나중에 들어보니 아빠회사 거래처 임원이시랬는데, 이 상황이면 아빠가 을인지, 갑인지. 아무튼 엄마도 잘되면 좋겠다고 신신당부를 했다. 그 말속에 '나'와 잘 맞겠다는 언급도 없었다. 오직 '집안'과 '조건'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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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와 나는 강남 어딘가의 카페에서 만났다. (그냥 남들처럼 번듯한 양식집에서 소화 안 되는 식사를 피하고 싶었다. 커피에 케이크 얼마나 속 편한 메뉴인가?) 저녁 7시, 퇴근 후 사람들로 붐비는 시간대였다.
은은한 조명 아래 창가 자리에 앉았다. 늦지 않게 도착한 그녀. 그녀는 당당했고, 대화는 생각보다 잘 풀렸다. 그녀는 똑 부러지고 말도 잘했다. 취미도 비슷했고, 영화 취향도 통했다. 나는 '아, 이 정도면 괜찮은데?'라고 생각했다. 선도 소개팅이랑 다를 게 없구나 싶었다.
그런데 의외의 반전이 있었는데, 그녀가 커피를 먼저 계산한 것이다.
나는 이때 이 선이 종 쳤다고 생각했다.
'먼저 계산한다는 건 관심 없다는 뜻 아닌가? 남자한테 빚지기 싫다는 거 아닐까?'
분명히 대화는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하지만 내 예상은 빗나갔던 걸로 판명됐다. 그렇게 터덜터덜 카페를 나서는데 그녀가 함께 산책을 하고 싶다고 했다. 근처 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눴다. 이번또한 분위기가 나쁘지 않았다.
그리고 산책이 끝나갈 때쯤 그녀가 말했다.
"맥주 한 잔 하면서 더 얘기할까요?" 순간 당황했다. 이미 10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계속 이어가면 밤늦게까지 갈 것 같았고,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게 맞나? 첫 만남에서 밤늦게까지?'
결국 나는 핑계를 댔다.
"내일 제가 일찍 출근이라서요. 다음에 꼭 한 번 더 만나요."
다음 약속을 기약하며 그녀를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었다. 헤어지면서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오늘 즐거웠어요. 연락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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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헤어짐”
나는 이 소식을 기도하듯 기다렸을 엄마에게 통보했다.
당연히 엄마는 그 순간 밤에 연락이 왔다.
"어땠어? 어떤 애더라?"
나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괜찮았어요. 다음에 한 번 더 보기로 했어요."
엄마는 기뻐하셨다.
목소리에서 안도감이 묻어났다.
'드디어 내 아들도 정신을 차렸구나' 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 다음 날 퇴근시간, 나는 카톡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카톡을 확인하는데 엄마에게서 메시지들이 줄줄이 와 있었다. 내용을 읽는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엄마는 고스란히 내가 어제 그녀와 했던 얘기를 하고 있었다. 내가 요즘 무슨 일을 하는지, 주말에 뭘 하는지, 어떤 취미가 있는지, 앞으로 어떤 꿈을 꾸는지, 심지어 내가 좋아하는 영화 장르까지.
그리고 말미에 이렇게 적혀 있었다.
"그 애가 네가 참 괜찮다고 하더라. 안정적이고 성실해 보인다고."
다 좋은데... 이걸 엄마가 어떻게 다 알고 있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설마 했던 일이 현실이 된 것이다. 알고 보니 그녀는 나와의 모든 이야기를 본인의 어머니에게 얘기했고,
그것이 이모를 거쳐 우리 엄마에게 전달된 것이었다. 나는 정신이 파딱 들었다.
'이건 데이트가 아니라 면접이었구나.'
그래도 어찌 됐든 나는 그 주 주말 그녀를 다시 만났다. 이미 정이란 정은 다 떨어졌지만, 약속을 지키는 것이 예의니까. 물론 그녀의 기대에 대해 엄마의 기대, 이모의 관심, 그녀 어머니의 평가... 모든 것도 감안했다.
이번에는 저녁 식사를 함께했다. 잠실의 어느 레스토랑. 그녀가 추천한 곳이었다. 분위기 좋은 곳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나는 최대한 밝게 물었다.
"지난번에 부모님께 제 얘기 많이 하셨다면서요? 어머님은 요즘 어떠세요?"
그녀는 웃으며 대답했다. 당황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너무 좋아하세요. 좋은 분 같다고."
그 순간 확신했다. 이 만남은 완전히 투명하다. 모든 것이 보고되고, 평가되고, 공유된다. 그럼에도 좋은 평가를 받았으니 나는 어른들이 인정한 모범생이다. 하지만 대화를 하면 할수록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내 직장을 아주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마치 공부라도 한 것처럼.(그녀는 내가 일하는 분야와 전혀 다른 분야였기 때문에 의아하면서도 감동을 받았다) 그리고 또한 내 경제적 수준에 대해서 매우 낙관적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는데, 이 점 또한 더욱 내게 부담을 주었다.
얘기를 하는 매분 매초마다 내 생각이나 감정보다 내 직장과 안정성에 집중하는 느낌. 그리고 그 모든 대화가 또 어머니께 보고될 것이라는 생각. 나는 지난번보다 더 공적이고 예의 바르게 그녀를 대했다. 농담도 조심스럽게, 이야기도 신중하게. 마치 그녀라는 CCTV에 찍히는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이번엔 그녀를 지하철 역 앞까지 바래다주었다. 물론 지난 번같은 즉각적인 애프터 신청도 하지 않았다. 집에 가는 길에 나는 생각했다.
'선이라는 참 재밌네. 근데... 이런 걸로 어른들은 결혼을 했단말이지?'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내 인생은 이런 식으로 진행되는 것만은 막고 싶었다. 그리고 그날 헤어진 이후 난 그녀에게 잘 자라는 말만 하고, 얼른 잠이 들었다. 단답으로, 더 할 말이 없다는 식으로.
그렇지만 공교롭게도 그녀는 이후에도 내내 연락이 왔다.
"오늘 아침에 크루아상이랑 카페라테 먹었어요."
"동료가 점심때 웃긴 농담 했는데 생각나서 ㅋㅋㅋ"
내가 답장이 없는 순간에도 하루를 며칠같이 일상을 공유했다. 머쓱함을 느낀 나는 몇 번 재미없게 답장을 했다. "맛있겠네요." "ㅋㅋㅋ 재밌었겠어요."
"이번 주말에 뭐 해요? 날씨 좋던데~"
나는 모든 그녀의 말에 대답했지만, 주말 일정에 대해서는 차마 답을 하지 못했다. 그리고 답을 고민하느라 벌써 몇 년을 답장을 못 했다.
그렇다. 그렇게, 그 선은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