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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지개벽

by 꽃피네

집을 나섰다.

아침 11시경, 반찬통에 흰밥을 퍼넣고, 배추김치 조금, 반숙한 계란프라이를 밥 위에 얹었다. 언제나처럼 나의 발이 되어준 하얀 펄톤의 그래블바이크 안장 뒤에 도시락을 매달았다.

물도 챙겼다. 찬물이 담긴 보온물통을 바이크 몸체에 설치된 물통케이지에 척 끼워 넣고 선, 신이 나서 흥얼거리며 길을 나섰다.

그 옛날 50 - 60년 전, 가끔 어머니가 말씀하셨던 임오년 대흉년- 임오군란이 일어난 1882년의- 흉년에 똥을 산채에 싸 먹으며 살아남았다던 조상님들의 제사 때면, 남송리 고모할머니께서 넘어오셨고, 배웅하러 내 어머니가 넘나드셨던 말매봉 산 고갯길, 지금은 말끔하게 포장되어 오솔길조차 흔적도 없이 사라진 가파른 산고개 아스팔트 길을 넘었다.

고갯길 왼쪽은 말매봉, 오른쪽은 서당이 있었다 하여 서당산이라는, 외국의 조그만 언덕보다도 못한 나지막한 두 산이 지나가는 나를 희롱하였다.

'워메 이것도 산이라고 숨이 차구나' 헐떡이며 산길을 넘었다. 십몇 프로의 경사도 고갯길이 심장을 불러내었다.

몸 밖으로 끌려나간 심장은 어느 미친년의 풀어헤친 산발머리처럼 마구 이리저리로 뛰어다녔다. 그렇게 심장은 터질 듯 헐떡헐떡 출렁대었다.

밖으로 나간 심장 녀석이 허파를 불러 같이 춤을 추잖다. '너희들이 춤을 추든 말든 그래도 넘는 거다. 나는 넘어가는 거야'

정상이 보였다. 그래 고통은 늘 순간인 법이다. 아지랑이가 춤추자는 듯이 내 몸을 껴안고 빙글빙글 피어올랐다.

말매봉 길을 넘으니 이번에는 돌고개길, 이런 고개들을 넘어서, 삼산면 걸래길을 달렸다.

삼산면 사거리에서 왼쪽으로 굽어진 길로 들어서 완만한 산도로를 달리니 해남에서 크다고 소문난 양촌저수지에 닿았다.

수년 전 옥천면 현민이가 거기서 큰 놈을 잡았다며 사달래서, 낙식이형하고 촌닭 한 마리를 같이 넣어 솥 찜한 큰 자라가 놀았던 양촌저수지도 쉽게 넘었다.

힘껏 페달을 밟으니, 계속된 오르막길 끝자락에 물맛이 절대로 변하거나 썩지 않는 천년의 약수터가 나타나고, 그렇게 오소재 정상에 다다랐다.

나이가 드니 드롭바 핸들의 바이크를 타는 것도 참으로 버거웠다.

그러나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도 있는 법, 이제부터 북평면 남창까지는 주로 내리막길이었다.

오소재 정상 뒤편에는 두륜산 속에 숨어있는 천년고찰 무해지대 해남 대흥사가 있고, 앞으로는 북평면 해안선 넘어 완도군의 섬들이 옹기종기 떠있었다.

원래 해남 대흥사 경내는 자전거 출입을 철저히 통제하는 금단의 땅이다. 어느 해인가 자전거포에서 13만 원을 주고 산 삼천리 레스포 고물자전거를 타고 대흥사 산속길을 달렸었다.

그때 대웅전 경내에서 들었던 스님의 반야심경 독경과, 목탁 치는 소리를 몸털끝이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대흥사 경내 자전거 출입불가를 몰랐던 무지한 나는 그냥 싸구려 생활자전거로 경내를 돌아다녔는데 그 어느 누구도 나를 제지하지 않았다.

나의 고물자전거에 아무도 관심의 시선을 주지 않았으며, 나는 그런 세상살이 마술로 삼식이로 변했던 적이 있었다.

당시 나의 고물자전거는 곧잘 요술을 부리곤 했는데, 마산면 된재를 넘어 황산면 한자리며 고천암 주위를 헤집고 다녔었다.

때로는 화산면 송평해변으로, 송지해수욕장을 넘어 남창으로, 다시 해남읍으로 빨빨거리며 돌아다녔다.

나는 그때마다 삼식이로 변신하여 그 누구의 따가운 주목도 받지 않았기에 참으로 편하고 자유스러웠다.

그런 고물자전거의 수명이 다하여 2024년 12월, 이번에는 좀 근사한 풀카본 드롭바 그래블바이크로 바꾸었는데 12단 기어에 무게 또한 7.8킬로 상당으로 가볍고 아주 날렵하였다.

새 자전거는 빨랐지만 요술을 부리는 경지에 도달하기까지는 부족하여도 한참 부족하였다.

그날, 육체가 처참히 부서진 날, 나는 북평면 남창리에 다다라, 완도나 땅끝쪽으로 향하지 않고 현산북평로 한가한 구도로로 진입하였다.

현산면 월송리 고갯길에서 나는 보았다. 큰 소리를 들었다. 뒤돌아보니 그르릉 요란한 굉음을 내며 주황색 덤프차량이 고갯길을 따라 올라오고 있었다.

'고놈 참 씩씩대는구나' 하며 도로 가장자리로 비껴주려고 하는 순간, 하늘이 서늘하게 바뀌었다.

이 고개만 넘으면 도시락을 까먹어야지 하며 힘든 고갯길도 즐겁지 않았던가. 아니 도시락을 까먹지 말고, 현산이 아니라 화산을 지나 아예 집까지 밟아버려? 이런 상상을 하지 않았던가.

현산북평로 이정표를 보았다. 그 순간 내 육체는 부서졌다. 몸이 깨지고, 찢기고 부서져 내렸다.

그때 내가 고개를 돌려 마지막으로 본 것은 주황색 덤프차인데 어이하여 뜬금없는 흰색의 카니발이 자전거를 들이받아 내 육신을 능욕하였단 말인가!

영혼이 어머니가 주신 육체를 잠시 떠나는 순간이었다. 육체가 부서졌을 때 영혼도 그 육체를 떠나는 법이다.

아주 큰 교통사고 참극이 벌어진 끔찍한 현장, 거기에 내 육신이 널브러졌다. 2025년 3월 23일 한적한 시골길에 부서진 내 육체가 피범벅이 되어 뒹굴었다.

그러나 그 순간, 항상 육체적 욕망에 눌려 찍소리 못하고 내면 깊이 잠들어 있던 내 영혼이 비로소 육체에서 일어나 천지개벽의 순간을 본 것이다.

만사가 정지하였다. 오로지 잠에서 깨어난 내 영혼만이 그 참혹한 현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육체가 부서질 때, 영혼은 껍데기를 깨고 기지개를 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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