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려요? 눈 좀 떠봐요"
누군가, 영혼이 육신을 잠시 떠난 내 몸뚱어리를 흔들어 깨웠다. 그러나 나는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영혼과 육신이 잠시 분리되어 있을 때, 경찰이며 구급차 대원들이 사고현장에 도착하여 집 나간 영혼을 안으로 불러들이려고 말을 건 것이다.
나의 영혼은 육체를 벗어나, 산이면 송천리 논들 가운데 둠벙가에서 고동을 잡고 있는 무명치마 저고리의 10여 세 가량의 어린 소녀들을 보고 있었다.
1935년 어느 봄날,
어린 소녀들은 조그만 둠벙가에서 고동을 잡고 놀다가 발을 헛디뎌 그만 한 소녀가 물에 빠졌다.
둑에 있던 소녀가 물에 빠진 소녀를 구하려고 박으로 만든 고동 바가지를 내밀었는데 닿지가 않았다.
그래서 한 걸음씩 웅덩이 속으로 들어가다가 그녀도 물에 빠져 버렸다. 먼저 물에 빠진 소녀는 나중에 빠진 소녀의 팔을 꽉 잡고 놔주지 않았고, 나중의 소녀는 어떻게든 나가려고 발버둥을 쳤다.
결국엔 나중에 빠진 소녀가 둠벙 바닥을 기어서 먼저 빠진 소녀를 끌고 밖으로 나왔다. 나중에 빠진 소녀가 내 어머니였다.
송천리와 목포시 용당을 왔다 갔다 하는 나룻배가 다니는 송천리 나루터 절벽 위에 선 큰 소나무도 보였다.
무슨 한이 맺혀 사람들이 그 나무에 목을 매 죽었는지, 썰물 때에도 물이 깊은 파란 나루 물길에 몸을 던졌는지 춥고 배고팠던 옛날 그 사연들을 저 소나무는 익히 알고 있으리라.
물이 빠진 뻘밭에서 조개를 줍고 꼬막을 캐고, 낙지 잡는 사람들이 보였다. 송천리는 바닷가여서 바닷물이 빠지면 사람들은 세발낙지나 꼬막 같은 조개를 캐러 뻘밭을 헤집고 다녔다.
바닷물이 들어올 때는 사방에서 무섭게 물이 달려들었다. 썰물 때, 낙지 욕심에 해변으로부터 멀리 나간 사람들을 물이 휘감고 돌아 물속으로 끄집고 들어갔다.
그렇게 허우적대다가 무심한 대바구니만 둥둥 떠있고 사람은 가라앉아 바다에 빠져 죽었다. 죽은 후, 한참이 지나서야 시체가 다시 떠오르거나 물살을 따라 목포나 멀리 다른 동네에서 발견되기도 하였다.
그래서 둠벙에도, 바닷물에도 귀신이 있어 사람들을 물속으로 끌어들인다는 물귀신 소문을 사람들은 믿었다.
10여 살 아이들이 둠벙에 빠져서도 살아 나온 것이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었던지 외할머니는 특별한 날에만 먹는 흰쌀밥을 지어 딸에게 고봉으로 먹였다 한다.
어머니 19세 때 중매쟁이에게 속아 아버지에게 시집을 왔다. 친정집에서 첫날밤을 치른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해남읍 안동리로 시집을 왔다.
시집가서 보니 중매쟁이 말과는 전혀 다르게 그야말로 궁핍하기 짝이 없는, 늑대가 돌아다니는 산속에 흙으로 대충 지어진 한 칸 움막이었다. 그 흙집에서 시집살이를 해야 했다.
궁핍한 생활은 아이들이 7명이 태어날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넷째가 태어났을 당시, 도저히 먹을 식량을 구할 수 없어 어머니는 아이들을 데리고 친정집으로 가서 3년간 친정 신세를 졌다.
"임자, 이러다가는 다 죽게 생겼오. 빚은 늘어만 가지 이 보릿고개를 어떻게 넘긴단 말이오"
"아이들을 데리고 형편이 풀릴 때까지 친정에 가 있을게요. 아니면 같이 가던지요"
"빚쟁이들이 우릴 떠나게 놔둘 것 같지 않은데 큰일이오. 이러다간 아이들을 다 굶겨 죽일 듯싶오. 내가 아이들을 둘러업고 임자를 친정까지 데려다줄 테니 오늘 밤 새벽에 떠납시다"
"그렇게 해요. 우리야 굶어 죽어도 싸지만 새끼들을 죽일 수 없으니 친정에 데려다주세요.
시아버님과 시어머님은 어머님이 남의 밭일이나 허드렛일이라도 하신다면 여기 마을엔 6촌 당숙들도 계시고, 큰집도 있으니 두 분은 어떻게든 살 수 있을 거예요"
그리하여 작은 방죽 둑의 높다란 버드나무 고목 구멍에 둥지를 튼 솔부엉이 울음소리에 깜짝깜짝 놀라면서 네 아이를 데리고 송천으로 빚쟁이를 피해 야반도주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보였다.
새벽에 신작로 자갈길에 돌을 밟고 지나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세 아이는 걷게 하고 넷째는 포대기로 업고 그렇게 걸어 친정집으로 갔다.
거기서 눌러앉아 내외가 3년 동안 온갖 일을 하여 빚을 갚아 나갔고 외가 동네에서 다섯째가 태어났다.
어느 정도 형편이 펴자, 다시 해남읍에 돌아와서 나를 낳았고 여동생을 낳았다.
큰 방죽 위 움막집 밭에 뽕나무가 있었다. 꼬맹이와 어머니가 뽕잎을 따고 있는데 큰 개가 산 위에서 내려와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어머니가 "떼끼 저리 가!"라고 소리치며 베이지색 늑대를 몰아내려고 하였다.
"저건 개가 아니다. 늑대란다. 너 같은 아이들을 물고 가니까 넌 엄마 옆에 꼭 붙어있어야 한다. 알았지?"
"예 엄마"
그래서 난 어머니의 치맛자락을 쥐고 늘 곁에 있었다.
뽕나무 위, 양 옆은 민둥산으로 황토가 드러나 풀이라곤 없었다. 군데군데 작은 소나무들이 있었지만 낙엽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람들이 갈퀴로 긁어가기 때문에 산은 붉은 맨살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나무를 해와야 굼불도 때고 가마솥에 밥도 할 수 있었기에 형들은 늘 나무를 하러 다녔다.
아름드리 동백나무도 보였다. 대밭에 앉은 까마귀 떼며, 지금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볼 수 없지만, 봄이 되면 아지랑이 피는 보리밭 위로 높이 뜬 종다리가 지지배배 울며 떠 다니고 있었다.
마늘이며 시금치, 상추가 심긴 윗집 뒤꼍에서 두 꼬마아이들이 황토굴을 파 소꿉장난을 하고 있었다. 나와 여동생이었다.
어머니가 장에서 사 온 쇠로 된 수저로 서로에게 황토밥을 떠먹이며 소꿉장난을 하는 모습도 보였다.
산속 움막집에서, 윗집으로 이사를 하고 1960년대 중하순 현재의 기와집으로 이사를 했다.
어머니는 포대기로 아기인 나를 등에 업고, 눈 내리는 뒷방죽 길을 지나, 걸어서 친정에 가셨다.
그 길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1964년 9월, 한국정부가 월남전 파병을 결정하자 아버지는 월남에 가 군부대 주방에서 일을 해 돈을 보내왔다.
할머니는 그 돈으로 논밭을 사들이고 마구간이 있는 사랑채와 본채인 큰 기와집을 마련해 이사를 했다.
이른 봄이면 샘장굴에서 얼음물로 방망이질을 해서 이불 빨래를 했고, 밤이면 베틀로 베를 짜고, 뽕잎을 따다가 누에를 키우고 텃밭과 저 먼 여녀굴, 송장굴의 작은 밭을 일구셨던 어머니는 7남매를 낳아 하나도 잃지 않고 잘 키웠다.
그런데 기차 건널목 사고로 큰아들 철용이를 잃고, 택시 운전을 하던 넷째를 잃고, 동네 앞에서 남편이 교통사고를 당해 떠나고, 이제는 막둥이마저도 또 교통사고라니 어머니는 치미는 분노와 슬픔을 하늘에서도 감당하지 못하였으리라.
어머니는 울고 계셨다. "아가! 넌 여기 올 때가 아니다. 어서 돌아가거라 어서!"
"눈 좀 떠보란 말이오! 눈! 눈 떠봐요!"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가 들렸다.
잠시 떠났던 영혼이 혼절한 몸뚱이로 들어가자, 영혼과 육신은 하나가 되어 소생하려고 발버둥을 쳤다.
들리냐고 눈 좀 떠보라며 흔드는 긴박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름이 뭐예요?"
"박삼식"
"박삼식 씨, 움직일 수 있어요? 움직일 수 없으면 눈만 깜박여 봐요"
때로는 아무리 정신없는 상태라도 자기 이름만큼은 무의식적으로 반응할 수가 있다. 움직일 수는 없어도 본능적으로 이름을 말할 수가 있는 법이다.
이름을 말하자, 누군가 스트레처를 가져오라는 말이 들렸고 누군가는 내 고개를 편하게 해 주었다.
그때 처음으로 회색의 무엇인가를 보았다. 시멘트로 포장된 갓길이었다. 갓길로 빼꼼히 고개를 내민 이름 모를 벼과식물인 산 풀 잡초도 보았다.
군데군데 풀과 어우러져 파랗게 물든 시멘트 갓길은 오래 쓴 주방의 스펀지처럼 묘하게 흐리고 창백하였다.
"아저씨 이 폰 열어봐요 보호자 누구요?" 누군가 현장에서 수거한 내 폰을 가져와 휴대폰 잠금을 풀라고 종용하였다.
내 휴대폰의 잠금장치는 그저 폰을 바라보면 풀린다. 내가 30초 후 화면을 바라보지 아니하면 폰은 또 잠기게 된다.
"보호자는 없고 형제간은 있어요" 하고 겨우 말을 떼었다. 그러자 잔뜩 기대감에 고조된 목소리가 누구냐고 재촉했다.
그 순간에도 나는 서열 순으로 대답해 주었다. 둘째 형수님과, 바로 위 친형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기억력 말이다. 육체가 그렇게 처참히 망가졌음에도, 나는 어이해 편린처럼 그들에 대한 기억을 붙잡고 있었을까.
축 늘어진 몸뚱이를 몇 사람이, 아마도 '하나 둘 셋!'이었겠지만 어떤 구령에 맞추어 나를 번쩍 들어 구급차의 이동식 침대의자인 앰뷸런스 거니에 바로 태웠다.
몸이 망신창이가 되도록 찢기고, 부러졌지만 이상하게도 하나도 아프지 않았다. 그때까지도 현실감을 상실한 허구의 세계에서 혼미한 정신이 완전히 빠져나오지 못하였을 것이다.
나는 그때까지도 교통사고가 났다는 것 자체도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하였다.
2025년 3월 23일 12시 30분, 가해 차량의 보닛의 철판이 구겨지고 차 유리창이 뽕 하고 구멍 날 정도 문제의 카니발은 과속하여 나를 치었다.
현장엔 가해운전자의 자비라고는 없었다. 이 무자비로 인하여 믿기 힘든 사고가 발생하였다.
왕복 2차선, 편도 1차선, 쭉 뻗은 직선도로, 그것도 오르막길, 게다가 왕래하는 차들도 뜸하기 짝이 없는, 교통사고가 일어날 수 없는 한적한 시골길에서 이런 대형사고가 일어난 것이다.
구급대원들이 앰뷸런스 거니의 바퀴를 굴려 구급차까지 가서, 구급의자를 침상으로 만든 뒤, 뒷문을 열고 안으로 밀어 넣으니 신기하게도 나를 태운 거니는 "철커덕" 경쾌한 소리를 내며 구급차에 장착되었다.
짙은 감색 유니폼을 입은 젊은 대원 3명이 들어와 응급주사를 놓고서 옷을 갈아입혔다.
누군가가 가위로 내 속옷을 자르자고 하였다. 그들은 내 속옷을 가위로 잘라 버리고 옆구리 터진 환자복으로 갈아입혔다.
그런 다음 한 사람은 내려서 앞 운전대 석으로 가서 구급차를 움직였고, 둘은 내 옆에 앉아 이것저것 물어보기 시작하였다. 신속하였다.
감색의 깔끔한 그들의 제복을 보고, 나는 싱싱한 미역, 다시마, 파래 같은 해조류가 흐물대는 풍성한 우리 지역의 남도 바다를 떠올렸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하는 생각이 미치는 순간, 갑자기 머릿속이 부산스러워지며 감각세포들이 바삐 요동치기 시작했다.
능동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눈은 감색 유니폼의 남녀 구급대원을 보며, 귀는 질문하는 젊은 여자대원의 목소리를 들으며, 손이며 목덜미는 구급차 침상의 약간 딱딱한 촉감을 느꼈다.
젊은 여자대원의 질문 내용은 존재하지 않은 내 보호자를 대신할 형제간들에 대한 신상파악이 주였다. 그 신원 파악이 끝나자, 조선대학병원에 전화를 하여 심하게 다친 교통사고 응급환자를 싣고 간다는 그런 통화를 하였다.
몸이 쓰윽 앞으로 갔다 뒤로 갔다 하며 밀리는 구급차 거니 위에서, 나는 줄곧, 때론 꿈속에, 때로는 현실 세계에 있었다.
"삐뽀 삐뽀"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나에게 묘한 안정감을 주었고, 그 리듬이 마치 북새통 시장길에 막힌 답답한 엿장수의 딸랑이 같기도 하다가도, 어떤 때는 경쾌하게 내지르는 기적과도 같았다.
이를 몇 차례 반복하자, 나를 실은 구급차는 언덕길을 올라 조선대학교 병원 응급실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