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방안에 유령의 계단이 있었다. 구급차로 조선대학병원 응급실에 도착한 나는 곧 중환자실로 인계되었다. 그 중환자실 내 병상 뒤로 유령의 계단이 있었다.
병실 침상 왼쪽으로는 옆자리의 환자를 안 보이게 가려주는 칸막이 커튼이 있었고, 그 커튼 뒤로는 밑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다.
그 계단은 영혼의 지하 세상 플루토로 갈 수 있는 단 하나의 암흑 속에 숨겨진 통로였으며, 그 입구를 뱃사공 카론이 지키고 있었다.
운명의 플루토, 내 영혼을 그 지하세상에 데려다주는 카론의 거부로, 나는 스틱스강을 건너지 못하게 되었다.
이 세상과 플루토의 지하세상을 이어주는 그 스틱스강이 바로 중환자실에 있는 유령의 계단이었다.
유령의 계단 반대편에는 중환자실을 통제하는 간호사실 데스크로 가는 문이 있었다. 그 문은 중환자들이 진짜 세상으로 나갈 수 있는 현실의 출구였다.
스스로의 힘으로 밖으로 나갈 수 없는 내 육체는 중환자실의 병상에서 초점 흐린 눈을 하고선 멍하니 누워 있었다.
그 틈에 내 영혼은 자신만의 기괴한 세계를 창조하고서, 부상에서 회복하면 정신 활동을 간섭할 것이 뻔한 육체를 피해 그곳에 깊이 숨어버렸다.
이런 괴상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 곳은 바로 ICU, 조선대학병원 정형외과 71 병동 중환자실이었다.
나는 현실과 전혀 다른 이상한 세상을 만들었다. 나에게 있어 중환자실은 현실과 허구가 공존하는 세계였다.
교통사고 당일인 일요일 오후 2-3시쯤, 구급차 대원들은 나를 조선대학병원 응급실에 인계하고 다시 오던 길로 떠났다.
그때 대학병원 응급실의 간호사들이 어떠한 질문들을 했는지, 당직 의사들이 어떤 응급처치를 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저승세계 플루토의 뱃사공 카론이 '이 녀석을 데려갈까 그냥 둘까 망설이고 있을 무렵, 내 영혼은 스틱스강을 건너지 못하고, 저 편 저승을 바라보며 이 세상의 경계면을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나는 오도 가도 못하고, 이승을 둥둥 떠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마치 요강 속에 동동 뜬 똥덩어리 마냥, 세상의 모든 며느리들에게 환영받지 못하는 시엄씨의 지저분하고 꼬릿한 똥덩이처럼 이리저리로 떠다니고 있었다.
카론이 물었다.
"노잣돈 서 푼 있느냐? 뱃삯이 원래 닷 푼이나 네놈 몰골이 가관이어서 내 서 푼만 받겠노라"
"돈을 바이크 안장 도시락 속에 두었는데 아마 현산북평로 월송 고개 어딘가에 있을 거요"
"에누리는 가능하나 외상은 아니 되니 썩 꺼지거라"
'여기나 저기나 완장질이네. 게다가 인상도 엿같은 자식이 사람 괄시한다니까' 투덜거리며 정신이 들었다.
눈을 떠보니, 당직의사며 간호사들이 필요한 응급처치를 하고 있었고, 그들이 물어보면 나는 반사적으로 답변하였다.
'혈압이나 당뇨 있어요? 드시는 약 있어요?' 아마도 이런 질문들을 했을 터지만 무엇하나 기억나지 않는다.
응급실에 도착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둘째 형님 내외, 조카와 조카사위가 왔다. 분명 조카들 둘도 왔을 텐데 같이들 왔는지 따로 왔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한참 후에 백운동에 사는 바로 위, 형 내외가 왔다.
너무 많이 다치면 감각도 상실하는가 보다. 무슨 주사를 맞고 있는지 딱히 부러진 곳도 안보였고, 통증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다만 형제간이 한꺼번에 여러 명이서 우르르 밀어닥치자 고맙기도 하고, '일요일인데 쉬어야 내일 일을 할 텐데' 하는 생각이 들어 미안하기도 하였다.
사람들은 내가 자전거를 타다가 차에 치이는 큰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하지만 몸 어디가, 얼마나 큰 부상을 당했는지 몰랐고, 그저 뒤따라오는 차에 받혀 작은 부상만 입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오메메 세상에 이것이 먼일이요?"
형수님들의 첫마디였다. 형님들은 이렇다 저렇다 별 말들이 없었다. 아마도 다들 마른하늘에 날벼락 치는 것을 본 심경이었을게다. 집안에 교통사고가 많아 별일도 다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몇 년 전 세상을 뜨신 어머니는 몇 차례에 걸친 큰 교통사고로 첫째와 넷째 자식들을 잃고 지아비인 선친마저 그런 사고로 여의셨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어이 견디셨는지 어머니를 추억하면 가슴 한편이 아려오고, 원통하고 짠하기 짝이 없다.
아마도 어머니에게 있어 하늘은 그저 무너지기 쉬운 원망스러운 존재였을 터지만, 자식들 앞에서는 신음소리조차도 내지 않으셨다. 이런 잦은 교통사고로, 어머니의 하늘은 몇 번이고 무너져 내렸으리라.
그 첫 비극은 43년 전, 1982년 12월 9일, 목포 일로동 기차 건널목에서 여수발 목포행 철마에 치여 큰형 철용이가 세상을 떠났다.
그때 내 나이 스물한 살, 겨울방학이라서 해남 고향집에 있던 때였는데, 누군가의 연락을 받고서 급히 도착한 목포 일로동 언덕배기 철로변에는 가마니에 덮인 큰형의 시신이 있었다.
나는 그 근처에서 큰형의 눈알을 주었고, 싸늘한 철길에 덕지덕지 묻은 형의 살점들을 주웠다.
'으아아아' 나는 형의 눈을 집어 들고 벙어리처럼 절규했다. 눈물이 끊임없이 내 두 뺨을 흘러, 형의 살점으로 채색된 철로 위에 그저 후드득 떨어졌다.
손에 쥔 큰형의 눈은 내게 마지막으로 무엇을 말하고자 했을까? 불쌍한 큰형은 그렇게 떠났다. 이제 누구 차례인가?
다들 이러한 아픔을 숨기고 살아왔기에, 내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고 하는 구급차 대원이며, 응급실 담당자의 전화를 받고들 소스라치게 놀라 한걸음에 달려왔을 것이다.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나는 간병인의 보살핌이 필요했고, 이에 중국 길림성 연변의 조선족 여자가 간병인이라고 왔다.
그러나 처음에는 둘째 형수님도, 나도 그녀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였다.
형수님이 어디서 오셨냐고 물어보니 중국인이랍신다. 한국인이면 더 좋지 않을까 이런 생각에서 형수님은 이것저것 물으셨다. 듣고 있던 나는 불현듯 '염병할 중국 놈들 세상 다 되었구나. 이제는 하다 못해 간병인마저도 중국 사람들인가' 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남자 간병인을 원했더니 남자 간병인이 갑자기 서울 가서 없다고 여자 간병인이 대신 왔다고 하였다.
간병인이 없는 것보다 낫지 않겠는가 하는 마음에 형수님께서도 그녀에게 잘 부탁한다고 인사치레를 하고 떠나셨다.
그날 저녁, 문병 온 이들이 다들 돌아가고 나는 정형외과 ICU, 중환자실로 옮겨졌다. 연변 간병인이 그 뒤를 따랐다. 아마도 중환자실에 빈자리가 있어 응급실에서 서둘러 보낸 듯하였다.
" 자자 환자 머리 누가 들어봐요. 시트 잡고 하나 둘 셋! 해서 이 쪽 침대로 옮기는 거예요"
응급실에서 초진을 마친 내 몸은 이런 방식으로 시트 위에서 다른 이동용 침상 스트레처 위로 옮겨지고, 다시 스트레처에서 71 병동 중환자실 침상으로 옮겨졌을 것이다.
그때 나는 머릿속이 어떻게 된 듯, 현상과 허상이 뒤죽박죽 되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중환자실은 입실할 때, 반드시 간병인이 딸려야 하는 4인 병실이었으며, 나는 4번째 칸 침상의 중환자였다.
중환자실에서는 절대 정숙이 요구되었기에, 만실이라면 중환자 4인, 간병인 4인 해서 8인이나 실내에 있었을 터지만, 방 안은 늘 숨 막히는 적막감에 쌓여 있었다.
그 적막감 속에서, 산소호흡기의 도움을 받으며 내가 무의식 속에서 만들어 낸 조선대학병원 정형외과 중환자실은 숙박시설을 겸한 2층짜리 유스호스텔 건물이었다.
리셉션데스크는 외진 어느 유스호스텔처럼 한가로웠고 두세 명의 간호사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간호사들은 여기 중환자들이 적절한 수술과 처치를 받아 완치되면, 세상 속으로 나가게 도와주는 고마운 선생님들이었다.
반면에, 아픈데도 불구하고 나가려고 발광을 해대는 일부 모난 환자들이 탈출을 못하도록 지키는 임무도 부여된 절대적인 통제자들이기도 하였다.
중환자실의 내 침상 오른쪽엔 연변 간병인의 간이침대가 있고, 벽면에는 혈압, 맥박, 산소포화도, 심전도 등 환자의 생체신호를 모니터링하는 환자감시장치 바이탈 싸인 모니터가 걸려 있었다.
바이탈 싸인 모니터는 비익조처럼 간호사 데스크에도 설치되어 중환자실과 쌍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때문에 만약, 환자의 호흡이나 맥박 등 생체신호가 급격히 나빠져서 삑삑 대는 알람 소리가 나면 간호사가 달려와 해당 환자의 상태를 체크하곤 하였다.
밤이 깊자, 나는 2층 유스호스텔 중환자실에서 잠을 청했다. 교통사고로 육신이 온전하지 못하니 영혼도 덩달아 부상을 당했는지, 비몽사몽 어딘가 활기차지 못하고 기력이 부족했다.
그때, 통기타 백을 멘 젊은 서양 커플들이 청바지에 붉은 티셔츠를 입고 호스텔에 체크인을 했다.
치료비 및 조식 포함 1박 숙박비가 5만 원, 그러니까 40달러가 채 못되었다. 저렴하니까 그야말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아픈 사람들이 세계 도처에서 조선대학병원을 찾아오다니 이 병원에 입원한 나는 참 운수가 좋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방에 동그란 아지랑이가 흐물흐물 피어 올라가고, 꽃들이 만개하여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나는 빙글빙글 도는 아지랑이에 맞춰 춤을 추었다.
아지랑이는 빈센트 반 고흐의 '귀를 붕대로 감은 자화상'처럼 끊임없이 두텁게 피어나 비틀거리며 하늘로, 하늘로 올라갔다.
나는 무엇이 실제이고 무엇이 허구인지 구별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