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인간을 읽으며(우리는 왜 읽는가)
속지에 써놓는 대신
오에 겐자부로의 <읽는 인간> 8장의 제목은 "우리는 왜 읽는가"이다. 이 장의 소제목으로 "배우기, 외우기, 깨닫기"가 있다. 이 가운데 "외우기"는 쉽지 않다. 관심과 집중의 힘을 동원하지 않는다면, 속된 말로 우리는 읽은 책의 대부분을 까먹는다.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에세이 <문학의 건망증>에 이런 일화가 담겨있다. 어느 날 작가는 새로운 이야기에 감탄하며 독서를 하고 있었다. 책장을 넘기다 익숙한 필체의 메모를 읽는다. 자신의 견해와 같은 메모다. 잠시 생각해 보니, 이 메모의 작성자는 본인이다!
"독서는 서서히 스며드는 활동일 수도 있다. 의식 깊이 빨려 들긴 하지만 눈에 띄지 않게 서서히 용해되기 때문에 과정을 몸으로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문학의 건망증으로 고생하는 독자는 독서를 통해 변화하면서도, 독서하는 동안 자신이 변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줄 수 있는 두뇌의 비판 중추가 함께 변하기 때문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에세이 끝에서 파트리크 쥐스킨트는 이런 느낌을 잘 설명한 책을 소개하려 하지만 그 역시 문학의 건망증으로 세세하게 기억을 옮기지 못한다. 어쨌든 좋은 책이었다며 마무리한다.
<읽는 인간> 8장으로 돌아간다. 이 장의 끝자락에서 오에 겐자부로는 말한다. "그럼에도 '나의 영혼'은 기억한다"와 같은 한 줄이 그렇습니다. 하지만 제가 정말로 그 시를 제 방식대로 이해했다고 느끼고, 그 뒤로 쭉 제가 이해한 대로 그 시를 생생하게 상기하는 건, (중략) 자기 인생의 경험을 통해 이해한 경우입니다."
최근 읽은 단편 소설 중 한강 작가의 <작별>이 떠오르는 대목이다. 어느 늦겨울 눈사람이 돼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다. 올해 중학교를 졸업한 남자아이를 10년째 홀로 키우고 있고, 남자 친구도 있다. 눈사람을 집안으로 들일 수 없다. 밖에는 봄이 오고 있다. 눈사람이 존재하기에 마땅한 곳은 없다. 소멸로 향해갈 뿐이다.
나는 할머니가 사시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노환으로 돌아가신 할머니의 말년을 지켜보았다. 다행히 우리 할머니는 같은 마을 어르신처럼 중증의 알츠하이머 증상은 없으셨다. 우리 동네 H할아버지는 배회를 하시어 H네를 고생시켰고, S할머니는 식사하신 것을 잊고 돌아서면 밥을 또 찾으시며 S네를 괴롭게 했다. 그리고 영화와 뉴스에서 빠른 속도로 우리를 찾아온 정신과 육체의 노쇠를 소개한다. <작별>을 읽으며 늦겨울 갑자기 눈사람이 되어 (관계의) 안과 밖(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주인공과 내가 또는 내 가족이 관계에서,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는 과정(순간)을 겹쳐 상상하는 경험을 했다.
다음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후 노벨상 측과 한강 작가의 전화인터뷰를 소개한 기사 - 조선일보 이가영 기자가 쓴 - 의 일부다.
한강은 감각에 중점을 많이 두는 소설가다. "시각적 이미지를 포함해 청각, 촉각 같은 생생한 감각을 전달하고 싶다"며 "이러한 감각을 전류처럼 문장에 주입하면 이상하게도 독자가 그 전류를 감지한다. 그 연결의 경험은 매번 저에게 경이롭다"라고 했다.
"문학의 건망증"과 "나의 영혼은 기억한다" 그리고 한강 작가의 저 인터뷰가 골고루 녹아있는 김초엽 작가의 <공생가설>을 추천하다. 하여튼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