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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 Jun 25. 2020

도시의 시간, 시골의 시간

수면장애와 이별하기

시골에 온 나와 엄마는 처음 일주일을 그저 흘려보냈다. 생활의 원칙은 단 한 가지였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는다는 것이다. 원칙에 충실하기 위해 시골집에 있던 디지털시계 전원도 모두 뽑았다. 꽤 오래 집이 비어있던 탓에 아날로그시계는 저절로 멈췄다.


시간에 모든 제약을 풀어버린 뒤로는 그동안 못 잔 잠을 몰아서 잤다. 꼬박 12시간을 자고 다시 낮잠을 잔다거나, 해만 졌다 하면 꾸벅 졸고 있는 모습이 신기할 정도다. 별 다른 일을 하지 않으니 배가 고파 깨는 일도 거의 없다. 우리는 자고, 또 잤다. 낯선 일이다.


도시에서의 나는 매일 밤잠을 설치는 사람이었다. 꼬박 밤을 새우는 날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날은 알람이라도 맞춰 놓은 듯 매일 새벽 같은 시간에 잠이 깼다. 겨우 선잠에 들더라도 누군가에게 시달리는 꿈을 꾸고 다시 깨버리기 일쑤였다. 이런 나를 딱하게 생각한 반려가 수면클리닉 상담을 권유했지만, 실제 어떤 조치까지 이어지지는 못했다.


스스로를 돌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타인의 문제에 매달리는 데만도 매일 주어진 시간이 빠듯했다. 글자 하나하나 달린 책임감에 숨을 헐떡였지만 그를 감당할 충분한 시간은 주어지지 않았다. 짧은 시간 내에 결과물을 도출해야 하는 구조에서 혹시나 간과했을 무언가에 대해 끊임없이 초조해했다.


그 불안감을 내려놓을 시간조차 쫓겨야했던 날들은 더 가혹했다. 매일 아침 9시 정돈된 모습으로 일과를 시작하려면 잠이 오든, 오지 않든 빨리 잠들어야 한다는 강박이 컸다. 혹시 늦잠을 잘까, 내일 피곤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은 더 생각하기를 원하는 스스로를 재촉하기 일쑤였다. 도시의 나는 매 순간 시간에 매여 살았다.



적어도 시골은 그렇지 않았다. 빠듯한 시간이 아닌 시기를 따랐다.


5월 중순 충청도 농촌에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폈을 때, 농부들은 모내기를 할 때라고 했다. 또는 뻐꾸기가 많이 울기 시작하면 모를 심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뻐꾸기는 날짜와 시간을 정해놓고 울지 않는다. 아카시아꽃 역시 오늘 당장 피어야 한다며 촉박하게 굴지 않는다. 그저 시기를 탈뿐이다.


1년 농사를 시작하는 기준이라 하기엔 너무 허술한 이 법칙은 삶의 여유를 준다. 마을 논이 거의 새파란 모로 채워졌을 때 가장 마지막으로 모내기를 준비하는 농부는 느긋했다. 가장 먼저 모내기를 한 곳과는 벌써 2주 가까이 차이가 벌어졌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는다. 시기만 맞춘다면 먼저 심은 것과 늦게 심은 것은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며칠이고 서두르는 것이 수확량을 결정짓지 않는다고 농부들은 입을 모았다. 도시에서는 성패의 잣대가 되는 한두 시간은 시골에선 별 의미가 없다고 했다. 농사에 있어 지금 이 시간 당장 해야 하는 일은 그리 많지 않다. 잠시 숨을 고를 틈 정도는 누구에게나 있었다. 오늘 못해도 된다. 시기만 판단하고 그중 스스로에게 가장 좋은 날 하면 그만이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은 그런 여백이 아니었을까 싶다. 쪼개진 시간에 연연하지 않고 내 보폭대로 흘러갈 수 있는 여유 말이다. '9 to 6'의 틀에서 그 틈을 찾기가 쉽진 않겠지만 나만의 시기를 믿을 수 있다면 적어도 시간에 끌려가는 일은 줄어줄 테다. 이제 여백 속에서 천천히 가고 싶다. 오늘을 돌아보기도 하고 내일을 기대할 수 있는 틈이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이곳에처럼 그저 잘 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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