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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May 15. 2024

반항이야말로 내겐 최대 사치였다.

시어머니, 한국과 캐나다의 여성, 남녀수요공급곡선


소연아, 나는 딸이 없으니까 너는 내 딸이다.

누가 들어도 아무 영혼 없는 헛소리...


굳이 속 뻔히 보이는 이중메시지로 사람을 헷갈리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결혼한 첫날부터 나는 겉으로도 창백하고, 속으로도 시어머니의 예비 며느리를 향한 사탕발림에 눈하나 깜짝안하는 스물 네살 어리지만 당돌한 그러나 내심 허술한 큰며느리 였습니다.


그녀가 살아온 시대적 분위기로 보나, 그녀가 속했던 한국 사회적 분위기로 보나, 개인사로 보나 우리 시어머니는 자신의 감정과 생각에 애초에 솔직할 수 없었음은 물론, 스스로의 것을 그녀 스스로가 인지하는 것도 어려운 환경이셨을테니...그런 에게 자신과 심리적으로 분리도 안된 서른 넘은 맏아들을 통해  가족이 된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그분께 진정으로 수용될 수도 있다는 어림조차 품지 않았으니까요.



  자신을 인식할 수 있고, 상대와 구분할 수 있어야, 또 다른 상대를 만날 때 '내가' '그를' 수용을 하든 거부를 한다 '선택권'이 있다 생각합니다.


내가 아닌 누군가가 이 자리에 들어왔더라도, 자기자신을 혐오하는 것과 비례하게, 상대와 상황 안에서 또다시 비난거리를 찾아다닐 수 밖에 없는 분 임을 인지하는데는 그리 긴 시간이 걸리지는 않았었던것 같습니다.


나 자신의 생각과 욕구, 느낌을 스스로도 인지하지 못하는 사람은 간접적으로 상대에게 나쁜 사람이 될 수 있음을 그 분을 통해 배웁니다. 먼저, 타인의 눈에 그녀는 상당히 꼬일대로 꼬인 사람으로 인식됩니다. 자신의 기분이 좋으면 좋다 나쁘면 나쁘다 인정하고 사는 것이 뭐가 그리 눈치볼 일인지...그 부분에 있어서 어린시절부터 자신을 묵살하는 것이 습관화된 환경을 겪어내야만 했던 사람은, 어째 스스로의 감정을 자기자신보다도 남이 더 잘 알 수 밖에 없습니다. 얼굴 표정에서는 싫은 기색이 훤한데도, 좋은 기색이 훤한데도 무조건 대답은 '아니'이며, 자신의 직접적이고 직관적인 감정 대신, 자신 맞은편의 사람 얼굴을 보고, 자신의 감정을 역설적으로 유추하며 살아오신 분입니다.


상대가 기뻐하면 '억울해'하고, 상대가 슬퍼하면 '그것 참 꼬숩다' 라며 자신의 감정을 상대라는 거울을 통해 비로소 알아챘다 여기는 방식이 고착된 것은 물론이며, 여러 차례 내 눈에 상대를  자체의 목적이 아닌, 자신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자 도구로 인지하고 사용하는 패턴이 목격된 분.


분과의 만남으로 인한 파생효과에 의해 이후 대인관계에서 가까이해야할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할 수 있는 눈을 갖게 되었으니 기뻐해야할까요.


십여년 전만해도 육십 이라는 짧지 않은 시간을 그렇게 살아오신분이기에, 뵌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때부터 애초에 이분과는 동행이 불가능하다는 직감이 스쳤던 기억이있습니다.


어린시절부터 스스로를 존재 자체로서 수용받고 인정받지 못한 시어머니와 반항할 새 없이 섣부르게 성인이 되어야만 했던 나, 이 둘의 교합은 어떤 형태로 나타날까요?


마치 거인들의 세계에서 살아남아야하는 작은존재처럼 늘 긴장상태이며, 타인과의 진정한 유대감 형성, 경계세우기,건강한 분리, 선과 악의 문제를 해결하는 삶의 최종과제를 채 인식하기도 전의 나는, 어린시절의 욕구가 충족되지 못한 시어머니가 독립된 한 인간으로서 불쌍하고 가엽다는 생각보다는, 옆에두면 마냥 나를 괴롭힐 수 밖에 없는 존재로 인식되었었습니다.


굳이 며느리인 나 말고도 모든 사람을 그렇게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인식하기 위한 잣대, 금전적 보상등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도구로 생각하시는데, 어느 누가 공감없이, 남이 기쁠때 속이 천불이 나 때굴때굴 구르고, 남이 슬플때 기뻐하는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을까요. 나 이외에도 원래 사람들과 원만한 대인관계가 잘 안되는 분이십니다. 평생 처음 본 타입의 사람이었고, 남편이라는 중간 다리가 없었더라면 굳이 겹칠 일도 없었던 사람이라 한국에서도 최대한 그런 사람과 나 자신의 감정을 의식적으로 분리시키자, 영향받지 말자 생각만으로 살았던 것 같습니다.


그분과의 거리를 유지하고 싶다는  였습니다.

그러나, 타인을 거울삼고 방패삼는 시어머니는 타인과의 경계선이라는 개념이 없어, 인권침해하는 상대에게도 악 소리 한번 못내고 꾹 참고 견디는, 무조건 수용체인 나와 자신을 분리할라야 분리할 수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마치 우린, 독 안에 든 쥐와 독 밖에서 호시탐탐 기회만 옅보고 으스대며  쥐가 든 독 속에 재미사마 날카로운 손톱을 넣었다 뺏다하며 거들먹거리다 낮잠자다를 반복하는 고양이 같았습니다. 그녀는 내가 없는동안 내 일기장을 뒤져서라도 나의 일거수일투족을 알아채고, 그곳에 존재하는 하나 하나의  꼬투리에 매달려야만 직성이 풀렸고, 따로 살았지만 거의 매일 보는 통에 사생활이라는 것이 없었던, 본인도 모르게 자꾸만 나를 잡아먹으려 안달인 시어머니때문에 정신 탈탈 털리는 한국에서의 신혼 2년이었네요.


가장 억울했던 점은, 본인이 평생 가난하다며 무시했던 시어머니에 대한 태도를 내 입장에 씌운다는 것이에요. 평생동안 자신이 결혼할 때 가난때문에  한푼 보태준적없는 자신의 시어머니를 마음속으로 폄하하고 겉으로 무시했던 오만한 '자기자신의' 태도에 대해 '혹시 쟤도 그럴수 있겠지?'가 아니라, '인간 마음 다 같으니, 너도 나를 무시하고 있지'라고 자신의 마음을 나에게 맘대로 투사(projection)해석하는거, 그렇게 나를 통해 본인의 마음 감옥을 만드는 것은 물론,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믿지 않으니, 나는 억울했고, 둘 간의 기본적 소통이 불가능하게된다는 점이 가장 꽉 막혀 힘들었던 부분입니다. 얼마나 제 속으로 힘들었는지, 자처해서 편집증적 인격장애라든지, 자기애성 성격장애, 스케이프고트, 간접 공격, 이중언어사용, 반동형성과 투사의 방어기제, 애착, 과잉일반화등 학교외 심리학 공부를 하게 한 것도 이 분이었어요. 비난이 아닌 이해하기 위해서. 가슴으로 답답한 현실을 머리로라도 소화해보기 위해서. 남편스스로 20대 중반부터 왜 이민을 마음먹게 되었는지, 이런 엄마 밑에서 어릴때부터 성장했다면 얼마나 힘들었을까... 남편의 입장이 이해가 가기도 했습니다. 나야 전혀 다른 셋팅값에서 성장해 문제를 파악하겠다만, 이 것을 디폴트값으로 서른넘게 성장한 남편은 참 마음이 많이 힘들었겠네.


사람마다 정신건강의 정도가 다르니까, 모든 고부관계를 저의 케이스로 일반화할수는 없습니다. 한국에 살고 있는, 이제는 결혼한 친구들과 이야기를 해 보면, 다들 좋은 시어머니, 좋은 시댁에서 잘들 살고 있다고 하지만, 정작 단톡방에 올라오는 넋두리를 들어보면 상당수의 사람들은 그 관계에 대한 적당한 거짓말로 자신들의 체면을 유지하며 그렇게 살아가나 봅니다. 그러니, 정도차이가 있지만, 여성으로서의 삶은 진정 결혼 후에 시작되는 것이 맞더라구요.

제가 느낀 여성으로서 인권에 대해 이야기 하기에는 저의 신혼생활 이야기를 서론으로 쓰지 않을 수가 없겠습니다.




86년생 서울에서 태어난 우리들은, 옛날처럼 식구가 노동력으로 대표되던 오륙십년대의 사람들도 아니고, 남아 선호사상의 세대도 아니고, 산아제한으로 무조건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세대도 아니고, 낙태가 합법화되던 시기에 진심으로 선택받아 태어나기 시작했던 사람들입니다. , 부모님의 연령과 사고방식에 영향을 받기도 하겠지만, 시대적으로 볼 때, 82년생 김지영으로 대표되는 80년대 초반 출생자와도 상당한 차이가 존재합니다. 


저는 우리세대를 남성과 여성의 가치에 대한 민간수준의 인식이 가장 획기적으로 이전 세대와 구분되는 시점이라 단언합니다. 지금부터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남아 선호의 사상의 전 세대의 영향을 받아서인지, 이제는 엄마가 된 자신이 어릴 때 차별받는 여자아이였어서, 또는 여자 라는 성별 대한 상처를 가진 사람들이, 아들을 낳기 원하는 사람들이 태아의 성별을 자유롭게 알아보며, 공개 또는 비공개적으로 낙태를 하던 시기라 초등학교에 들어가 반 구성원을 보면, 남자아이 23명에 여자아이 14명에 그쳤고, 여자짝꿍을 찾지 못하는 남자아이들 9명은 저들끼리 짝을 지어 학교생활을 한, 그런 첫 세대의 사람들입니다.


경제부분 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문제의 상당부분은 수요와 공급곡선으로 설명 가능하다 생각합니다. 위의 이유 때문인지, 내 세대의 여자들은 가정 안에서도 전 세대와 다르게 성차별에 대한 경험이 전무한 채로 성인이 됩니다. 결과적으로, 86년 생에게 남성 우월주의는 완벽하게 전시대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상태입니다.


이런 내가 거의 10살 가까이 많은 남자와 결혼을 하니, 우리 시대에 경험해보지 못한 것을 경험하게 됩니다. 40년대생 아버지와 50년생 여자에게서 79년생 맏아들로 태어난 남자는, 1910년대생 외할머니에게 양육되게 되었고, 86년생 여자를 만나 결혼생활을 하게 되니, 적응이 여간 힘든 모양인가봅니다. 자신이 경험한 첫 여자인 할머니에게서 익숙한 남성우월주의와 현재 자신의 삶이 되어버린 여자인, 나세대차이가 자그마치 근 80년인데, 그 동안 강산이 8번, 그 사이 일제해방, 한국전쟁, 한국의 산업혁명, 경제발전따위들로 가속도가 붙어 출산과 육아휴직 따위들을 아무리 썼다한들  제 스스로 10번은 바뀌었을텐데요.  스스로 획기적으로 개방적이며 깨였음을 자처하는 남편임에도 불구하고, 저와의 삶 속에서 스스로의 삶에 부딪힌 시련에 대해 괴로울 법도 합니다. 남편을 식구로서 존중하고, 요리를 즐기는 아내를 두고 있지만, 하루에 10번씩은 기본사상부터 작살난 탓에 이제 거의 결혼 전, 과거 사고방식의 존립자체가 불분명한 지경에 놓인 것이 자칭 우울증을 앓고 있는 현재 제 남편의 현실입니다.


남자 학우 23명에 여자 학우 14명의 환경에서 성장한 86년생 여자는, 버젓히 누나로서 존재하는 딸년(우리 부모님은 쓰지도 않는 말입니다.) 다섯이 한 집에 있지만 결국 독자라 칭해지는 아들 하나 뿐인 세대와는 다른 사고방식을 갖고 있습니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성별갈등이 일어나는 것도 사실보면 수요와 공급곡선의 이상적인 범위를 넘어서기에 일어나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이 전 글에서 언급했던 바, 모든 권력이나 혜택에는 언제나 책임이 따릅니다. 애초에 여성 차별이 없었다면, 낙태가 성행하던 시기에 여성낙태도 없었을 것이고, 성비갈등이 심각해 현재 사회가 당면한 남초현상 문제또한 없을테니까요.


불행인지 다행인지, 현재는 한국 상황이 역전되었다고 합니다. 성비 불균형의 반작용때문인지 요즘 한국에서는 여아 선호사상이 대단하다고 합니다. 제 아이가 태어난 시기인 2011년에만 해도 성별을 선택할 수만 있다면 아들보다는 딸을 선호한다고 대답하는 부모님들이 많이 계셨고, 그로 인해 여자아이들이 많아졌기에, 지금부터 적어도 20년안에는 1986년생 남자아이들의 고단한 삶과는 정반대의, 다른 세대가 펼쳐질수도 있을거라 예견하는 바 입니다.


네 잘못이 아니야





절대쌍이어야 가능한 결혼과 출산을 목표로 한다면, 양성 중, 숫자가 적은 쪽이 유리합니다.

캐나다에서는 어떨까요?




서구사회는 남녀평등을 주장하고, 우여곡절을 겪은지가 한국보다 꽤 오래되었습니다.

여자가 밖에 나와 일하는 것도 낙태가 시행된 것도, 그 안에서 페미니즘이라든지 양성 갈등이 유행하던 것도 정확히 한국에 비해 20년 앞섭니다.


위에서 설명한 바, 한국에서의 20년 후처럼 이제 유럽으로 대표되는 서구사회 또는 그들이 대다수인 캐나다에서는 여성과 남성의 성비가 바뀌어 남성이 귀한 상황입니다.

특히 한국 남성들의 속칭 백마들의 경우, 각종 전쟁과 남성병력투입등으로 인해 여성의 공급이 남성의 2배이상에 달하리만큼 상당수가 잔류중에 있습니다.

단순히 성비 불균형 때문에 초등학교 때부터 여자짝꿍이 없었던 9명의 한국 남성이 굳이 한국여자만을 원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 곳에 와서 BTS, 꽃보다 남자, 풀하우스등의 한류인기 파도를 함께 타며 외국여성을 사귀시면 되지 않을까요?


수요, 공급 곡선에 맞추어 대세를 거스를 수 있는 기한은 제가 생각할 때 지금부터 약 20년 후입니다. 수요와 공급의 이상적인 기준 자체가 깨져버리면, 보다 유리한 쪽은 월권을 휘두르게 되는 비이성적이고 동물적이고 탐욕적인 사람들이 다수 중 꼭 존재하게 되는데, 꼭 된장녀, 맘충이나 한녀라서라기 보다 이성보다는 본능이 앞서는 인간의 성질때문입니다. 예전 아빠세대 할아버지 세대의 남자들이 그러했듯 지금 현재 한국은 여자들의 월권시대라고 한국을 봐도 과언이 아닐거라 예상합니다. 솔직히 나의 엄마를 기준으로 요즘 여자들을 보면 남자들 기준에서는 그렇게도 보일 수 있다는 거죠.


과거 여자가 넘치던 시대의 한국 여성들이 그러하듯, 80년대 중후반 또는 그 이후의 건강하고 성실하지만 평가 절하된 한국의 9명 싱글 남성들이 너무 많습니다. 물론 예외는 존재합니다. 원래 이성에 별 관심이 없다거나, 결혼이 사랑의 완성이라 생각 안하시는 분, 남초 현상안에서도 저보다 훨씬 더 인격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성숙하시고, 사회적 능력도 갖추고 있으며, 결혼을 거부하는 한국 남성과 여성도 반드시 다수 존재하며, 어찌 사람사이의 사랑이라는 화학적 반응을 경제 수요 곡선에 비하는 것에 오류가 없겠습니까. 그러나 제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 솔직히 말해 아주 조금은 결혼을 염두하고 계신 분들이 계시다면,  늦기 전에 부모님세대안에서의 사고방식에 머물며 한국여성을 찾으시기 보다는, 국제적으로 깨인 시각으로 외국여성과의 만남을 추구해보시는 것 VS. 20년 후의 한국여성을 기다리는 것의 선택지가 있음을,  단순 수치상의 개념으로 재미삼아 타자좀 두들겨봅니다.


미혼여성이 기혼여성보다 상태가 떨어진다는 주장이라며 제 글을 왜곡하시는 분은 없으리라 믿습니다.



이곳 캐나다에서는 남녀간의 차이가 거의 존재하지 않음을 느낍니다.

여자라서 배려해주고 뭐 그런거 없습니다. 동등한 임금체계에 동등하게 살아가고, 경우에 따라서는 남자가 유리하다며 유리천장을 주장하기도 하고, 역차별적으로 유색인종의 여성이 때로는 유리하다고 주장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최소한 캐나다는 정의가 살아있는 곳이기에, 약자를 배려합니다. 저는 배려받기 싫습니다.




도망친 곳에는 천국이 없습니다.

복종의 굴레를 벗어나는 건강한 사춘기, 청소년기 시절이 삭제된 채 성장한 나는 이 곳에 와서도 '거인들 세상의 난쟁이' 같았습니다.

위에서 밝힌 바, 항상 긴장하고, 남들보다 우위에 있어야 마음이 편하기에 매사에 완벽에 가까우려 노력했고, 주변사람들보다 항상 월등히 잘해야했기에 선택에 있어서 항상 한 단계 낮추기를 자원했었습니다.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지나친 수치심과 죄책감이 몸을 감쌌고, 설사 인정을 받더라도 만족감이 오래가지 못했던것 같습니다.  그러는동안 정작 진정 나 자신을 무시하며 살았던 경험은 시어머니를 인생에서 제외시킨 후에도 계속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대인관계에서는 어떻구요? 항상 나 자신을 주변사람보다 한단계 낮추어 인식하고, 늘 상대를 일방적으로 배려해주는 것이 당연했습니다. 항상 상대에게 흡수되어 강한 공감을 보이다가 정작 나의 주관, 느낌 그리고 에너지를 잃고 있다는 중요한 현실을 깨닫지 못했었습니다. 상대의 반응이 어떠하든 적어도 난 그렇게 해야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모두가 자존감 자존감 떠들기에, 나도 자존감이 낮아서 내가 이 모양으로 살아가는 줄로 알았습니다. 진짜 문제는 '삭제된 청소년기'에 있더라구요. 어린시절부터 부모속을 썩일 여유없이, 아픈 동생과 무너진 부모님의 관계를 역전시키고자 항성 주어진 상황안에서 월등해야만 했기에, 남들이 다 갖는 반항의 시기를 겪지 못하고, 서둘러 어른이 되어야했기에, 상대와 싸움도 없었고, 갈등도 피했고, 편협한 사고안에서 선과 악 또는 성공과 실패의 철저한 구분안에 여유없는 생활을 반복했습니다.


일단 학생의 본분을 잘 수행하고, 사회 안에 유능한 인재가 되어 잘 먹고 잘 살기 위해서는, 기존체제를 냅따 수용하고 최대한의 성과를 보여주느라 충분히 바쁜 사람에게, '반항'은 최고의 사치입니다.



부모가 워낙 엉망이라 일생을 반항속에서만 사셨다구요?

그럼 그런분들은 사춘기가 아니라 그보다 10년도 더 전, 어린시절 애착과 수용에서부터 맘속에 막힌 문제를 풀어가셔야할지도 모릅니다.

맘속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 현재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쓸데없는 뻘짓같아도, 내가 문제를 인식하기 전까지 쳇바퀴돌듯 나 자신만 인식하지 못한채로 문제적 삶의 패턴이 반복되니까요.

현재와 미래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가슴속 막힌데를 반드시 뻥 뚫어야합니다. 알아요. 지금당장은 힘드시다는거, 대충 덮어두고 지내는거 밖에는 방법없는 상황을...주먹구구식으로 최대한 놀고, 여행가고, 우울증약을 먹으며 버텨가고 계신다는것, 하지만 생활이 조금 안정되고 살만해지면, 해결되지 않은 마음속 과제들이 스물스물 올라와요. 그 때가 문제해결의 적기이며, 사람마다 시기가 다르니 제가 당신보다 먼저 그 시기를 경험했다면, 그냥 읽으며 따라와주시면 되겠습니다.



다들 작게 또는 크게 사정이 다르지만, 나 뿐만이 아니라, 한국에서 청소년기를 보낸 거의 모든사람들은 공부에 시달리느라 정상적인 반항의 시기를 보낼 여유가 허락되지 않은 십대 시기를 보냅니다. 물론, 캐나다에도 한국아이들과 같은 아이들이 약 10%정도 존재합니다. 자신의 아이를 특정 집단에 속하도록 끌어주고자 하는 부모는 지구 어디에도 존재하니까요. 하지만, 그 포션이 한국처럼 국내동향을 차지하지는 않습니다.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공부만 하느라 전인적 인간으로서 성장할 기회를 박탈당하는 것은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입니다. 부모가 주는 안정적인 사랑과 쌓은 애착안에서 순종을 배우고 (+), 켜켜히 쌓은 순종을 바탕으로 십 여년 후에는 복종의 굴레를 벗어나 진정으로 어른이 되는 과정인 반항적 사춘기를 겪고(-), 다원적 시각을 끌어안을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해야하는데, 당장 의사나 로스쿨 변호사되어야하기에 복중의 굴레를 벗어난 반항을 하고, 반항과 순종사이에 균형을 잡고 어른이 되는 모든 과정이 삭제된 채 난쟁이 어른이 되어, 후에 만나게 되는 사회적 관계도 직업 만족도도 개인의 행복도도 모두 다 싹쓸이 되는 모습을 아주 흔하게 만날 수 있습니다. 후에 이민을 온 다 해도, 문제는 나 스스로에 있기에, 삶의 터전이 바뀌어도 같은 문제와 함께 어려운 생활이 계속됩니다.


답을 낼 수 없는, 도무지 선과 악으로 명명할 수 없는 미지의 영역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내려놓는데에서 역설적이게도 모든 세계관을 어우르는 자기수용과 타인수용이 일어날 수 있는데 말입니다.


맘대로 부모가 하지 말라는 나쁜짓을 하며 스릴을  즐겨도보고, 학교도 결석해보고, 친구랑도 맘대로 싸워보고, 선생님에게도 반항해보며 다각도로 열심히 살며 사회적 긴장을 누구러뜨릴 기회를 청소년기때 충분히 가졌어야하는데... 더욱 끔찍한 사실은 아직도 순종의 굴욕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 아이같은 사우스코리안의 모습을 이미 먼 발취에서 오래 전부터 누누히 지켜보고 있던 현지인들이 존재한다는 겁니다. 한인 이민선배들 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타문화권에서 성장한 타인종들 입니다. 우리자신보다 더 우리의 약점을 더 잘 아는 사람이 집단안에 한명만 존재해도, 그것으로 인한 집단안에서의 도미노효과는 말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모범생 엄친딸은 이민후에도 지옥에서 살았었었었습니다. 위의 사실을 스스로 깨닫기 전까지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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