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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May 07. 2024

언어차별은 또 다른 이름의 민족 차별

영어 프리토킹이 당혹스런 이유가 영어실력에 있는 것이 아니죠.

설마 아이엘츠시험이나 토플 토익시험 듀오링고 시험등으로 자신의 영어실력을 가늠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최소 내 글을 읽고 있는 독자들 중에는 없을거라 생각합니다.


물론 비영어권 국가 출신의 우리로서는 한국에서 살 때 뿐만 아니라 당장 이민 심사시, 대학 입학시, 어떤식으로든 이 곳 영어사회의 관문 하나하나를 통과할 때, 영어점수가 필요해 점수를 얻기위한 영어부터 절대시 되지만, 사실 실생활에 있어서의 영어를 비롯한 모든 언어실력은 점수로서 의미있는 것이 아니고, 문화적 적응의 정도를 나타내는, 일종의 표식이라 생각됩니다.


만약 지금 당신이 Fluency 또는 Accuracy를 영어실력의 변수로 삼아 이 주제의 글을 읽고자 한다면, 아직 한참 멀었으니 최소한 이 두 가지를 먼저 갈고 닦으신 후, 제 글에 재방문하시길 부탁드립니다. 열공을 통해서 이 두 가지는 문화적 맥락을 삭제하고서 충분히 혼자서라도 획득가능하니까요.




우리는 이민 1세대 또는 이민 1세대의 자녀입니다. 그 사회에 대한 몸에 익은 정보를 알려줄 그 누군가도 없는 상태에서 문화가 녹아들어간 언어를 매사 능수능란하게 구사해야한다고 생각하면 우리의 일상은 당혹스러움의 연속일 것입니다.


 하지만 명심해 주십시오, 이것이 현실입니다. 이것이 이민자가 자유로운 자기표현을 할 수 없도록 만드는 커다란 심리적, 사회적 요인 입니다. 혼자서 또는 여러가지 방법을 동원해 영어단어와 문법을 어느정도 마스터하고 호기롭게 줄줄줄 언어를 원어민들 앞에 내 뱉습니다. 내가 말을 뱉으면 뱉을수록 시간이 지나면 지날 수록 나라는 사람의 인격과 성격 그리고 내 말의 의도는 듣는이의 사고방식에 의해 변질되어 있고, 사람들은 발화자인 나의 문화적 컨텍스트가 아닌 자신들의 사회 문화적 컨텍스트안에서 나를 바라봅니다. "듣는이의 언어인 영어로 말하니까요".


캐나다에 한국인은 물론 여러민족출신의 사람들과 대화하고 어울려보며 느낀 바, 문화상 경제적 지리적 측면에서 자주 강대국의 지배를 받아 자신의 감정과 생각을 인식할 새 없이 살기 위해 달려야 했던, 지금 이 순간에도 한 나라안의 사람들끼리 서로를 심각하게 견제하고 모두가 한 줄 서기를 해 나와 상대의 관계를 한 나라 사람 안에서 해석하는 우리 한국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달리, 유럽이나 중국 그리고 아랍출신 사람들은 우선 나와 너의 개념부터 상당히 다름을 알 수 있습니다. 각자의 나라에서는 어떤지 모르지만, 외국에 나온만큼 '상대'라는 개념에 대해 자국 출신보다는 타국 출신의 사람들을 쉽게 자신의 삶 안에 '상대'라는 개념에 대입하더군요. 지배와 피지배 개념안에서 자신의 국가 또는 국가안의 사람들과 타국 사람들을 내가 정복해야하는 상대이자 적으로 쉽게 가져오는 것이 소위 강대국, 식민지를 가졌던 혹은 현재도 갖고 있는 역사를 가진 나라들의 특징이었습니다. 동양의 몇 국가를 지배하는 나라 출신의 사람들은 한국사람인 우리들을 볼 때에도, 자신들의 식민지 개념안에서 즉, 자신들이 인식한 '상대'의 개념에서 한국인을 해석하더라구요. 한마디로, 쉽게 말하면, 자신들이 정복했던 나라인 본토 베트남 사람들이나  거의 비슷하게 생긴 동양에서 온 나나 비슷한 개념안에서 해석해 자신들이 가르쳐야하고 무언가를 일깨워줘야하는 열등한 존재로서의 꽉 막힌 생각으로 아직도 한국인을 대하는 프랑스출신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예로서 설명할 수 있겠네요. 자신들과 내가 같은 문화적 컨택스트를 공유하고 있다는 일종의 표식을 보여주지 않아서 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들도 일부러 하는 행위같다는 생각보다는 반사적이고 순간적인 태세인것으로 보아 이미 맘이든 머리든 뿌리깊게 박혀있는 무의식적 대응방식으로 느껴집니다.



사람사는 곳의 문화라는게 한국이나 영어권이나 비슷할 것 같지만, 어쩌면 정반대라 생각이 될 만큼, 한 지구상에서 왜 이렇게나 다르지?라 생각될만큼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도 많이 있어서, 이십 몇년의 시간동안 내 몸을 적셔온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문화는 정말이지 캐나다문화에 섞일 수 없을만큼 이질적인 것이라고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오해에 오해가 거듭될 수록, 오해 만들고 푸느라 고생고생하느니 아 나는 말하지 않는게 낫겠다. 라는 생각을 이따금씩 갖게 될 수 있습니다. 사회적 상호작용에서  무의식적으로 스스로를 제거시켜 편하게 살려고 하는 본능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단순히 문법을 몰라서 단어를 몰라서 문장을 어떻게 만들어야하는지를 몰라서가 아니라는 거죠. 어떠한 한국인 영어 일타 강사와도,  한국에서 영어를 전공한 자도 현지에 완벽하게 젖어들었던 인생경험이 없다면 이 부분만큼은 해결 불가능합니다.


이 나라에서는, 언어차별은 있는데 인종차별은 없다라는 말을 정당한 듯 열심히 하며, 자신들과 다른 인간에 대한 차별적 행위를 역설적이게도 정당화 하는 모습을 업무현장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인종을 변수로 하는 차별이 인간의 생물학적 특성에 대한 도전이라 금지한다면, 언어차별이라는 일종의 문화차별을 허용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언어는 문화이니까, 나랑 사회문화적 컨택스트 안에서 소통 가능한 사람만 인간 취급한다는 말이 설득력 있는 말 처럼 순간 들리기도 하겠지만, 사실 이민자 최초 3대를 멸하리라라는 말과 무엇이 다른가요? 나와 내 부모가 해당 국가나 문화의 문화를 모르고 시작하는 사회생활에서 내가 문화를 모르기 때문에 해당 언어를 완벽히 소화할 수 없는 상태인 것이며, 그런 나를 차별해도 정당하다는 주장에는 과연 논리적으로 타당한 말 일까요? 차별과 소외가 반복될 수록 문화에 흡수될 수 없고, 세대를 거듭해도 변종으로서의 문화유산을 나눠줄수 없게 되는것을 의도하는 건 아닌가요? 저에게는 영국혹은 캐나다산 자문화 중심주의 그 이상으로도 그 이하로도 해석되지 않습니다.


엄연한 차별이며, '인종'이라는 말을 뺏다고 해도, 인간대 인간으로서 해서는 안될 불합리이며, 모순입니다.




우리에게 선진국으로 알려져 있는 덴마크는 원래 이민자를 받지 않는 나라였습니다. 이 나라가 최근 몇년 전부터 이민자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하물며, 캐나다 써리나 토론토, 캘거리 등 각 도시 다운타운 등에서도 이민자 또는 난민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갱단의 활동이 무시못할 만큼 존재하는데, 이민자의 나라가 아닌 덴마크에서는 어떨까요? 갱단의 세력이 통제불가능 할 정도로 날이 갈수록 어마어마 해 진다고  합니다. 내가 속한 사회가 나를 보호해주고 어느정도 이상의 가치를 존중해줄 때야 그 사회의 규칙을 준수하고 착하게 행동하는 것이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사람들은 나를 소외시키고, 차별로 나의 노력을 무력화 한다면, 사회가 이민자이고 난민인 나를 소외시키고도 아무렇지 않게 잘 굴러간다면 열심히 살아도 남는 것은 좌절뿐이라면 스스로를 조율하고 주변에 피해를 주지 않으려 했자기규율을 지킬 필요가 있나 하는 회의가 들 수 있게 됩니다. 특별한 반항심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도 말이죠. 어느 누구라도 예외는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결국 누가 피해를 보게 될까요?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도 절대 사회는 소외되는 자, 낙오되는 자, 그림자 속에 갇혀지내야만 하는 자를 만들어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가뜩이나 내가 살던 나라가 누군가의 침략을 통해 순식간에 전쟁통이 되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눈 앞에서 죽고, 타의에 의해 이 나라 저 나라에 난민신분으로 보내졌는데, 열심히 사회 적응하려 발버둥쳐봤자 언어차별이네 문화차별이네라는 말 또는 생김새로 사람을 좌절시키는 것을 정당화해버리면,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마음에 앙심을 품고, 어떻게 삐뚤어질지, 그것이 혈기왕성한 10대-30대 일 경우에는 어떠한 사회적 파장을 초래할지에 대해서 미리 생각해보아야하는 건, 덴마크만의 일이 아닌, 캐나다와 한국을 비롯한 모든 사회 공통의 머지않은 이슈라 생각합니다.


후루츠캔디와 같은 사람들은 앞 화에서 묘사한 바처럼, 화가 자신의 내면으로 스며들어 우울감이나 좌절감으로서 표출되지만, 그렇지 않은 타입의 사람들은 사회적 반항의 형태로 화가 타인에 대한 공격성이 되어 표출되기도 합니다.



이제는 새로운 진입자를 대하는 방식을 새로운 시각에서 검토할 때라 생각합니다. 나누기 싫어하는 자세, 옆 사람과 비교를 통해 행복과 불행을 결정하는 근시안적이고 자기중심적 태도는 내가 속하지 않은 집단에 대한 차별을 만들어내고, 물과 기름이 되어, 나만 잘 살겠다는 예상과는 반대로 내가 파멸하는 현상을 만들어내게 될테니까요.



이민자로서 새로운 사회에서 적당히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하는 것은 물론, 사회에서도 이민자 또는 난민이라 쓰고 언어차별이라 정당화하는 일종의 자기합리화적 관념을 없애려 노력하는 것이 나와 내 가족이 살기 안전하고 건강한 사회를 만드는데 훨씬 나은 처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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