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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Apr 30. 2024

아무리 캐나다라지만 한국사람인걸요

외적 인스타가 피로감을 주듯, 내적 인스타도 못지않게 부담스러우니까요.

사람이 사는 방법과 방향은 그들 수만큼 각각입니다.


한국에서의 삶뿐만 아니라, 외국에서의 삶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리고 저는 각각의 삶을 존중합니다.


나는 이민 후에 불안을 느껴 노력과 정성으로 감정을 극복하려 했지만, 애초에 불안하지 않은 마음으로 이민을 오는 사람들도 많이 있고, 또 같은 불안을 느꼈다고 해도 각자 처리방식이 다르니까요.

내가 이민 초기 10년간 스스로 노력해서 영어를 연습하고, 대학부설 어린이 센터의 슈퍼바이저로 취직해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을 관리하는 중간관리 역할까지 맡게 되었다는 것, 내 아이 둘을 킨더가든에 보내기 약 6개월 전에만 어린이집에 보내었고, 그 전까지는 스스로 집안에서 두 아들들 모두  스스로 육아 했다는 사실, 그러면서 아이들과 불어와 영어로 대화하며 아이들과 나 자신에게 특정 언어를 익숙하게 만들었다는 사실. 30살이 넘었고 아이들을 키우는 엄마이지만 현재 캐나다 대학을 다니고 있다는 사실, 이 쉴새 없는 고군분투 과정제 옆에서함께 아이를 키우는 옆집 언니에게 털어놓게 됩니다. 


저를 가장 경계하는 사람이 바로  옆집 언니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로 말이죠. 저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이민을 왔고, 아이를 키우고 있으며, 캐나다에서 크게는 비슷한 입장을 가진 또래 한국인 이민자라 당연히 친구가 될 거라 믿었던 그녀. 우연한 기회에  나의 이민 후 노력의 양, 극복방식, 앞으로의 방향을 털어놓게 되면, 위의 입장에(40살 전후, 아이가 있는, 한국출신 이민자) 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타깝게도 그때부터 서서히 직간접적으로 나를 멀리하기 시작합니다. 그냥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서로에게 피해가 갈 수 있는 방법을 동원하니 참 씁쓸합니다.


공부도 결혼도 때가 있다는 말처럼, 내 나라가 아닌 해외에서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무한대의 에너지가 필요합니다. 흐트러지고자 하는 본능을 저항하는 것 + 더 앞으로 나아가려면 한국과 달리 감시감독하는 사람 하나 없는 외국에서 자유인으로서 존재하고자 하는 본능까지 더욱 재기를 발현하게 되기 때문이죠. 사실 한국에서 열심히 살던 동력을 갖고 온 사람이 습관적으로 캐나다에서도 열심히 산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일부러 힘을 내는 것은 불가능한 사회가 이민 사회이자, 복지 좋은 캐나다입니다.


사실 이민의 이유가 뭘까요? 어떤면에서는 열공모드, 열일모드의 엄친아 엄친딸 출신들, 즉 나에게 스트레스 주는 주변 사람들로부터 해방되어, 그 사람들이 주는 상대적 압박과 부담으로부터 좀 더 여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온 탈출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열심히 사는 나와 같은 사람은 주변 척결대상 1순위가 될 수 있다는 그 사람(들)의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닙니다. 


외적 인스타가 피곤하듯 내적 인스타도 못지않게 부담스러우니까요.



참 오묘합니다. 한국에서는 생각지도 않았던 허들이 존재한다는 것 말입니다. 한국에서 태어나고 교육받은, 누구나 자연스레 익히고 쓰게 되는 한국말과 달리, 개인 삶의 중간  캐나다로 이민 온 이상, 공용어조차 자동탑재가 아닌 스스로 의지를 갖고 노력해야 획득가능하다는 것. 하다못해 슈퍼에 캐셔일을 얻을 때에도, 남의 나라에서 돈을 벌 수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한국에서의 그것과는 투입되는 에너지의 양에 있어서 차원이 다릅니다. 정확한 계산 능력, 영어도 알아야 하지만, 코워커나 손님과의 관계능력도 어느 정도이상 원만하게 할 줄 알아야 하고, 사회적 눈치코치도 빨라야 하고, 다양한 문화에 대한 상호존중을 뒷받침할 수 있는 인성과 끈기도 바탕되어야 하고요. 한국에서 일하시는 분들이 쉽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자연스럽게 부모로부터 태어나는 동시에 국공립 초, 중, 고등학교에 자동으로 등록되어 다니며 여타 유별난 노력 없이도 내 나라에서 획득한 사회문화적 기술의 무게와 가치에 대해 쉽게 간과하고 있는 것 같아 드리는 말씀입니다. 내 나라에서 외국으로 편입된 우리들은 초등, 중등, 고등학교 심지어 어린이집을 이곳에서 나오지 않았기에 단체나 조직이 밀고 가는 커다랗고 효율적 힘 없이 스스로 모든 사회문화적 지식과 스킬들을 스스로 처음부터 경험적으로 익혀 한 땀 한 땀 엮어가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시간과 노력을 들여 경험을 해 봐야만 알 수 있습니다.


내가 굳이 주변사람들 모두를 친구로 만드려 할 필요는 없지만, 우연한 기회에 나와 행동반경 또는 지역이 겹치는 사람과 불편한 관계를 만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항상 주변 사람들을 응원하고 격려하는 입장이고 싶고, 유쾌하고 부드럽게 단편적인 관계나마 흘려가는 인연으로 남고 싶은데, 이 또한 내 입장일 뿐일 때가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이미 한국에서 신체적으로 심리적으로 지친 상태로 캐나다에 온 사람들이라고 하며, 굳이 이곳에서까지 열심히 사는 나를 친구로 두며 지낼 필요는 없다고 하니, 이제 나는 나이와 사는 곳, 성별, 아이들의 나이, 키와 몸무게가 비슷한 누구에게나 친구일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서로 코드가 맞아야죠.


, 당신은 당신이고, 나는 나입니다.


철저하게 자신과 타인을 구분 가능하상호 존중하는 평행한 관계가 이루어지기도 하겠지만, 상대의 사정에 대한 감정이입, 공감능력이 높은 한국인의 특성상 나와 네가 머릿속에서 맘대로 뽕짝 되어 도무지 구분이 가능하지 않아, 관계를 지속하면 할수록 스스로들 괴로운 모양인가 봅니다. 극심한 비교를 뜻합니다. 


 중, 가장 대면하기 힘든 사람들은 과거 한국에서의 인간에 대한 혐오가 해결되지 않은 사람들입니다. 마음속에서 오랜 기간 묵히고 묵혀 자기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안에서 나의 말과 행위를 해석하고, 자신에게 한국에서 상처 준 사람의 형상을 나에게 투사해 분노하는 사람들을 볼 때입니다.


내가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잘못을 인정하는 부분은, 상대에 대한 파악 없이, 관계 초기에 너무 마음을 열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온전히 받아들이겠다는 마음으로 새로운 사람을 받아들이고, 내가 상대에게 하는 것만큼 상대 또한 우리 또는 각자를 응원할 것이라는 나 혼자만의 전제를 밑바탕에 깔았다는 것입니다.


타국에서 마음을 열어 보이고, 채 해결되지 않았던 나의 상처를 비밀을 털어놓듯 솔직하고 싶어 내 속사정을 말해버렸는데, 그것을 약점 삼아 사람을 정서적 노예로 만들어버리려는 몇몇의 사람들을 보며, 사람이 외국 나와 오랫동안 마음을 단단히 먹고, 외로움을 부정한 채 감정을 닫고, 긴 시간을 앞만 보고 "열심히" 보내다 보면, 그 외로움이라는 감정의 조절버튼이 고장나 누군가에게 마음을 열어야 할지 그러지 말아야 할지 구분 못하고 상대에게 무장해제 되어버리는 나를 깨닫게 됩니다. 사랑에 굶주린 아이들처럼 초기에 타인에게 마음을 여는 병을 없애고, 누군가가 내 감정에 공감해 주기를 그토록 원할 것이 아니라 나부터 나 스스로의 감정과 친해져야겠구나... 생각하며 시작한 것이 감정 터놓기, 이 브런치 글쓰기였던 것 같습니다.  이 익명의 공간 안에 후르츠캔디라는 이름으로 나의 감정들을 털어놓아 버리면, 나는 섬세한 사람들이 그토록 원하는 깊은 공감, 마음의 울림, 나 자신의 감정 인식, 수용, 위로를 얻습니다. 사춘기 때, 단짝친구와 서로를 미러 삼는 경험등으로 인해, 인간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생각했던 것들을 이 글쓰기 공간에서 내 모국어인 한국어로 섬세하게 풀어놓는 것은, 저에겐 해외생활의 관계문제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소법인 셈입니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닙니다. 진짜로 자신의 사정과 관계없이 마음의 여유를 갖고 성격이 맞는 한국인들과는 충분히 지인으로 지내고 있습니다. 각자 자신의 삶이 좋지만, 상대가 갖고 있는 삶의 매력을 칭찬해 주고 격려해 주며 가까운 관계로 지내고 있는 사람들 또한 존재하는 것을 보니, 꼭 서로 비슷하지는 않더라도 서로가 상대를 존중하면 가끔 봐도 서로 좋은 대인관계를 유지할 수 있다는 것 또한 배웁니다.






친구, 생각해 보니 나는 이민 전까지 친구관계가 전부였던 사람입니다.


가정 안에 여러 사정이 있어 그 안에서 숨쉬기 힘들었지만, 그럴수록 친구들에게만큼은 마음을 열고, 속 후련한 소통을 하며 살아갈 힘을 내었던 나의 유년기, 청소년기 시절 그리고 한국에서의 20대 초반까지의 내 나라 한국에서의  나,

여중, 여고 때처럼 비밀을 털어놓으며 친구관계를 할 수 없는 건 어쩌면 당연한지도 모르겠습니다. 대학 졸업 후에도 교수님과 관계가 좋은 학생으로서 간 직장도 대학교부속유치원이었기 때문에 모든 동료나 선배들이 모두 우리 대학교 출신이었고, 동질감과 연대감 속에서 마음을 털어놓고 언니동생으로서 지냈었습니다. 후배가 부족한 점은 내 동생이니까 선배님들이 덮어주셨고, 끌어주셨고, 대신 후배는 선배님의 말과 뜻을 순수하게 믿고 따르고. 그런 환경에서 자란 나의 관계 에너지를 학교 밖 인간관계 안에 무심코 대입해 생각했으니 상처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어찌 보면 적당히 내 나라에서 성질 누르고 살 법도 한데, 자신의 의지로 나라까지 바꾼 성격 강한 사람들이 모인 곳인 이 이민사회에서 솜털 보송 속살 야들 어린 시절 단짝 친구 맛이 나는 친구관계를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지도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회는 동네, 학교, 직업, 취미생활 등으로 나와 비슷한 사람들 사이에 속해 자연스럽게 지냈지만, 이민자사회는 한국인이라는 커다란 범주 안에서  살던 동네나 학교 직업, 취미생활이라는 분류가 무색하게 각기 다른 생각과 가치관 사고방식, 성격 등이 다른 사람들이 짬뽕되며, 그 수가 한국에서의 한국인 또래 집단에 비해 훨씬 적습니다. 이건 비단 위니펙만의 일이라 보기 어려우며, 토론토나 밴쿠버 한인 사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한국인이라고 해서 마음을 열였는데, 조금 대화해 보니 나와 많이 다르네?라고 느끼는 건 그러고 보니 당연한 일 같습니다. 여기는 내 나라가 아니고 이민자의 나라라는 한계를 충분히 인식한다 해도, 어딘지 모르게 아쉬운 인간관계 되겠습니다.


물론 이 도시 저 도시로 떠도는 동안, 내가 노력하는 동안 주변사람들에게 마음 주고 주파수를 맞추려는 노력을 하지 못한 내 부족함도 있을 것입니다. 비슷하게 공부하는 입장이라해서 어렵사리 시간을 잡고 만났는데, "칫, 니가 하는 것쯤은 나도 할 수 있어",라든지  "너의 생각과 느낌이 꼭 맞는건 아니던데?" 하며 자신의 시각안에서 스스로와 후루츠캔디를 몰래 내적 경쟁이라도 붙이고 있는 모습, 별로 독특할 것 없는 나를  그저 이민을 좀 더 빨리 왔다는 이유로, 현지 대학교에 먼저 들어갔다는 이유로, 정복해야할 대상으로 인식하는 모습이 친절한 가면뒤에 드러날때에도 피곤합니다.  


맞아요, 그럼요. 저는 주관적인 제 세상에 살고 있는걸요. 내 생각과 느낌을 함부로 옳다 그르다로 판결하는 대신 당신만의 주관적 삶을 살아주세요. 저의 방향은 누군가를 이기고 1등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내 주관적 삶의 주인이 되는 것이거든요 :)


나를 자신들과의 비교대상이나, 자신들이 필요한 정보를 티 안 나게 수집해야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아닌, 타산지석 삼겠다는 사람들이 아닌, 평행하고 동등한 선상에서 상호 인격적으로 존중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더욱 간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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