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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Apr 24. 2024

불안을 정성이라는 에너지로 활활 불 태우기

캐나다이민과 캐나다적응을 위한 재료는 노력, 에너지는 불안

새로운 나라로 이민을 와 막연한 건 나 뿐만의 일이 아니었습니다.


출중한 학벌, 내로라하는 직업과 경력, 누구라도 사위로 삼고 싶어하는 듬직한 외모를 가진 한국에서의 30대 초중반 내 남편은 한국을 떠나온 이상 이제 내 옆에 없었습니다.


대신 옆엔 영주권을 받았으나, 직업을 잡는 것은 고사하고, 30여년간 내 나라 한국에서 쓰던 언어가 아닌 새 언어를 배워야하는, 나와 같은 캐나다 사회적 영유아기 1년차 남편이 있었습니다.  연애할 때에는 나에게 자신이 대학생 때, 미국에서 얼마간 있었고, 미국과 캐나다를 제 집 드나드는 양 말하던 통에 남편을 믿고 착수한 이민계획이었는데,  말들을 밑천으로 추정하고 결혼하고 이민한 내가 맘속에 그린 남편이라는 대상과 여기 캐나다에서의 실생활 남편의 실제가 완벽하게 다름을 깨닫고, 내 두 발로 땅에 딛는 과정에는 상당한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간 그 과정을 이번 화에서 조금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나 변호사가 될래

나 치과 의사가 될래


나와 함께 아침밥을 먹던 남편이 대뜸 발설한 캐나다에서의 자신의 장래희망 입니다.

옆 사람은 쉽지 않은 현실을 파악해버렸는데, 당사자인 남편은 아직도 꿈에 부푼 청소년처럼 자신의 꿈을 이야기 합니다. 아무래도 사람들은 스스로를 파악하고 사회속에서 인정하는데 시간이 좀 걸리나봅니다.


만일 남편이 뜻이 있고, 오랜 기간의 시행착오와 깊은 생각 끝에 내리는 비장한 결론이라면 저는 완벽히 남편의 현재 상태가 어떻듯 배우자로서 상대를 믿고 지지하겠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남편의 목표설정 기준이,10살 가까이 어린 부인인 저 그리고 아이들과삶을 전제하기 보다는, 다들 앞다투어 자신의 캐나다 유학 성공담을 이야기하는 온라인 게시판 이 유일하다는 것입니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몇몇 사이트에 상주하는 키보드 워리어들이 사실 한국 서울에서 중위권 혹은 중하위권 레벨에 있는 대학 출신들인데 이곳 캐나다 와서는 치과 의사가 되고, 문과출신은 다들 변호사되려고 미국이든 캐나다 로스쿨을 준비한다더라.. 와 같은 자신의 영웅담을 이야기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사실을 증명할 수도 없이, 실체라 할 것도 없이, 글로서만 만날 수 있는 사람들과 어깨를 견준다 한 들 꿀릴것 없다 생각이  만도 한 것이, 내 남편은 한국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일류 대학 출신이며, 말싸움에서 한번도 누군가에게 진 적이 없고, 정치, 경제, 외교 분야에 대해 거짓 정보를 뿌리고 다니는 온라인 유저들을 혼내주는 논리적인 댓글 또는 대댓글들로 "좋아요" 버튼을 휩쓰는 사람들 중 한 명 입니다, 여러분. 그러니 자신보다 아는 것도 없고 어린 잼민이들도 성공하는 캐나다 바닥에서 한국에서조차 쳐다도 안하던 단순업무라든지 기술직에 종사 하는 것으로 삶을 시작하거나 유지하는 것은 가당치 않으며, 이 곳 캐나다에서는 원대한 꿈을 꾸지 않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던 제 남편입니다.


남편이 큰 일을 하려면 비판하지 않고 존중해주며 묵묵히 지지해주는 아내가 필요하다고 하던데, 불펜인지 캐나다 게시판인지에 자뻑에 겨워 허황된 게시글을 올리는 남들이 원망스러웠습니다. 그 놈들 때문에 내 남편이 허파에 바람들어가, 정작 자신은 이 곳에서 언어조차 서툰 이민 1년차 신생아라 영어교육 받으며 살면서도 뭐든 할 수 있다는 꿈을 꾼다는 것이...실제 캐나다에서의 나와 남편이 놓여진 현실, 우리의 사회적 자아와 남편이 인터넷 속 감정이입하는 타인들 사이의 갭이 큰 만큼 우리가족의 희생과 고생길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았으니까요. 누구는 남편이 매일 말아먹는 새 사업 아이디어를 자꾸만 갖고 집에 들어와 고생이라는데, K 장남 내 남편은 자꾸 그에 못지 않은 공부계획을 갖고 들어오니, 배우자로서 속에서 천불이 납니다

여러분은 저와 남편 중 누구의 말이 더 현실적이라 생각하시나요?

문제는, 그 당시엔   자신조차도 남편의 포부와 자신에 대한 끝없는 믿음이 맞는지, 내가 경험하지 않은 사실에 대해서는 믿지 않는 태도가 맞는지 도무지 도무지 검증이 불가능하다는 무시무시한 상황 때문에 남편의 끝없는 자만추에(자기 만족 추구)에 대한 변론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 이었습니다.


이렇게 의견이 갈리면, 남편은 엄마에 대한 상처때문에 나의 의도에 대한 왜곡이 시작되므로, 한 두 번이상 이견을 내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입니다. 스스로 경험을 통해 깨지며 배우도록 두는 것이 가슴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최선이었습니다.


세상에, 아무리 생각해도 변호사 공부는 치과의사가 되기위한 공부는 한국사람이 한국어로 해도 될까말까 어려운 공부이며, 삶에 필요한 모든 에너지를 전..적으로 쏟아부어야 가능한 공부입니다. 하물며 내 나라사람도 충분히 소화하기 어려운 공부인데, 이민 1년차이지만 Intermediate에 걸쳐진 아이엘츠 6-8사이 있어 조금만 노력하면 변호사로서 원어민처럼 영어 할 수 있을거라 막연히 생각하는, 찐퉁영어사회에 대한 감이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 대학 편입이나 전과 생각하듯, 문화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캐나다라는 새 나라에서 세상에 말이 되는 소리입니까?2000년을 전후로 특별전형이나 편입없이 오직 수능으로만 한국에서 대학입시를 경험했던 짬빠가 있다면 노력의 값어치와 현실성을 알기에 감히 쉽게 할 수 없는 말이라 생각합니다. 애초에 생각했던 것 보다도 남편이 현실적 시각을 갖지 못하는 것 때문 만이라도 이 사람과 함께하는 이민이 암담하게 느껴지던 때 입니다.


10여년이 지난 지금은 누구의 말이 정답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그 이야기는 후에 나눠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미경 강사님은 말씀하십니다. 대한민국 30대의 아내들까지는 내가 믿고 결혼한 남편인 그 이의 능력을 믿는다고, 뭐든 해낼 것이라 생각한다고.


난 결혼한지 이제 갓 3-4년 지난 초보주부이자 초보이민자이자 20대 후반일뿐인 어린여자애인데 아무리 남편이지만  이런식으로 생각하고 의사결정하는 사람을, 새 나라에서 어찌 풀릴지 모르는 타인에게 나와 내 아이들의 인생이 의존하도록 내버려두는건 허무맹랑한 소설같은 일이라는 걸 깨닫고 아차 싶었습니다. 이건 콩깍지가 벗겨져도 너무 이른거 아닌가. 밖으로 내색은 안했지만 철저히 단념하자. 마음먹었습니다. 그렇다고 남편을 무시한다거나 이 사람과의 미래를 암울하게 본다는 뜻이 아니라, 그 사람과는 단독적으로 내가 스스로 바로 서야함을 깨달았다는 뜻입니다. 어릴 때부터 아빠가 제게 해 주시던 말씀을 실감했습니다. 남자만이 아니라 여자도 자기 밥벌이는 할 수 있을 능력을 갖춰야한다, 스스로를 부지런히 갈고 닦는 노력에 성심을 다해라.


아이들을 키우고 살림만 하는 여성상을 배우자로 이상화하는 제 남편보다 20살 이상 많지만 아빠는 시대를 초월하는 지혜를 갖고 계신분이라 믿기에, 어릴적 들었던 아빠의 말씀은 제 마음의 주춧돌입니다. 누가 알았겠습니까. 한국 기준에서 한국 배경에서 먹고살 걱정은 커녕 유능하고, 술 담배는 커녕 성실한 내 남편과의 결혼이 캐나다에 오니 전혀 다른 변수를 만들어낼 줄을. 능력없는 남자랑 결혼해서 여자가 고생하는 것이 아니고, 그냥 원래 사람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이 제 발로 설 줄 알아야 한다는 겁니다. 능력있는 남자랑 결혼했으니 아기를 키우는 동안은 조금 편안하게 살아볼까쪽으로 살짝 몸이 기울었던 내 자신이 조금 부끄러워졌던 순간입니다.


그 때부터는 하루 24시간이 아깝고 모자랐습니다.

자는시간 6시간을 빼고, 아이에게 젖을 물리는 시간, 이유식을 먹이고, 유아식을 만들고, 나와 남편이 먹는 식사를 만들고 먹고, 화장실가는 시간에도 내 입과 머리는 부지런히 움직였습니다.

아이들이 세 네살이 되기 전까지  아이와의 질 높은 상호작용이 온전히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아이에게 놀이를 해주는 동안에도 책을 읽어주는 동안에도 나는 아이에게 영어샤워를 퍼부어주며 실력을 갈고 닦았습니다. 그동안 아이와도 많이 친해진 시간이었어요. 아이에게 하나라도 가르쳐주고 싶은 엄마의 절실한 마음과 내가 이 곳 캐나다에서 살아야겠다는 절실한 마음의 만남이었습니다.

아이들이 조금 크고, 프리스쿨에 가고 킨더에 가면, 나도 하루 2시간씩 영어를 배우러다니기도 했지만, 그 때 2시간은 그저 거들 뿐, 그 주 3회 2시간 이외에도 하루 15시간 이상을 영어공부에만 썼습니다. 말하고, 듣고, 독해하고, 쓰고. 모든 영역을 철저히 공부했습니다. 첫 10년간 거의 한국 티비도 영화도 안 보았습니다. 고등학교와 대학교때 공부했던 문법도 다시 브러싱하고, 기존에 알던 영어단어 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많이 쓰는 영어단어나 문구를 닥치는 대로 외우고, 그것들을 써서 문장을 만들고, 대화를 만들고, 내가 말하는 것을 녹음해보고, 맘대로 흔들어보고, 녹음한 것을 들어보기도 하고, 같은 주제로 100번이상 말해보기도하고, 자주 말할수록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지고 유창해진 나를 발견합니다. 잠꼬대도 영어로 합니다. 한국사람을 만나지도 않고, 한글도 쓰지 않으니, 말도 글도 발음도 내 모국어임에도 어눌해진다는 것이 이런것이구나 라는 것을 체험했었습니다. 그 후엔 한 과목 두 과목씩 캐나다 고등학교 교육과정들을 이수하고, 취직도 하고, 봉사활동도 하며 나의 캐나다에서의 영역을 차근히 넓혀갔습니다. 면접을 보았을 때 (약 10년 전) 처음 제시받았던 시급 24불에서 교섭을 통해 그 이상의 돈을 끌어내기도했고, 일을 통해 내가 일터에서 힘들어하는 점이나 좋아하는 점이 무엇인지, 부족한 점이 무엇인지, 이 사회에서는 내가 어떻게 인식되고 있으며, 이 사회는 어떤 인간성을 원하는지, 한국사회와는 어떤점이 다른지, 어떤 점이 같은지, 나의 특유의 민감한 감각을 통해 인식하고 시간을 들여 해결해나가는 과정을 겪었습니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음을 자부합니다. 내 발로 내가 서는 것이 목표였기에 누구에게 증명하고 자랑하고 말고도 없습니다. 미지의 세계에서의 모호함을 노력으로 태워 없애버리자 마음먹었습니다. 적어도 한국에서 나의 부모님이 나를 키워주신 것, 그 덕에 내가 한국에서 미약하지만 사회에서 자리매김했던 것, 최소한 그 이상은 해야겠습니다. 그것이 기준이었습니다. 그 만큼 가면 내 마음이 편안할 수 있을 것 같았기에, 한국에서의 나를 목표로 최대한 나 자신을 밀어 붙였습니다.


나와 함께 책을 보고 밥을 잘 먹어주고, 밖에 나가 뛰어놀고, 엄마를 사랑해주는, 내가 지켜야 할 내 아이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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