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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Apr 23. 2024

막연하게 막연하리만치 막연한 출발

캐나다 이민, 영주권을 취직 한 후, 그 막연한 감정

 캐나다 주정부에서 제공하는 영어교육을 받으러 가겠다는 남편을 위해 도시락 싸서 보내 놓고, 나는 그당시 우리가 속했던 도시 다운타운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던 어느 화창한 여름날이었습니다.


큰 아이와 작은 아이는 2인용 유모차 앞 뒤에 나란히 앉아 나의 운행을 기다리고 있지만, 나는 벤치에 앉아 높은 빌딩 숲 속에서 어디로 향하는 게 나와 내 아기들을 위해 가장 안전하고 유쾌할 지 망설이고 있었습니다.


서울 광화문, 내가 캐나다에 오기 전 근무하며 오갔던 다운타운과 지금 내가 아이들과 함께 머물고 있는 곳은 닮았습니다.

그 때 나는 만날 사람이 있었고, 목적지가 있었고,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모든것에서 자유롭습니다.

굳이 만나야 하는 사람도 없고, 해야하는 업무도 없고, 내 입에 맞는 사람은 만나면 되고, 사람은 만나지 않으면 그만 입니다.


물론 캐나다에서 낳은지 얼마 되지 않은 작은아이와 아직 어린 세살배기 큰 아이가 있어 나의 몸덩이가 공중에서 투명물풍선안에 세 명을 집단으로 묶어놔 혼자였던 과거에 비해 3배 이상 중력이 가해진 듯해 이 곳으로도 저 곳으로도 움직이는 것이 가볍지는 않지만 아이들이 지금 크는 속도라면 학교에 입학하는 것 또한 단지 시간문제일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세포분열하며 크는 그 동안 한국에서 캐나다로 막 이민 와 영주권을 받은 나는 무얼해야할까요?



아이들을 키우는 일은 몸의 잔근육을 밤낮으로 사용하고 쉴 새 없이 아이의 발달과 그에 필요한 요구사항을 끊임없이 맞춰주는 일. 민감하고 섬세한 나의 성격은 육아에 유리한 것이 사실입니다.  아이의 신경줄기 하나하나가 나에게 요구되는 모든 일을 포근하게 수용해주고, 아이의 손발이 되어 따뜻하게 감싸주는 행위 하나하나는 존귀하며, 나는 그 모든 것을 생각해보면 누가 명령한 적도 없는데 잘 해냈던 것 같습니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읽고, 공감하고, 보듬어주는 것은 내 체질에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일이라 느꼈던 시간들입니다.  내가 아이들을 돌보고 있다지만, 사실 나의 경우에는 내 아이들이 세상에서 오는 여러가지 자극들을 적당히 막아주는 나의 지렛대이자, 보호막, 쿠션이기도 했거든요. 아이들을 매개로 사람들과 소통하고, 나의 신경 와이어가 대부분 내 아이들에게로 꽂혀 있있기때문에 늘 진통제가 몸을 돌고 있는 것 처럼 세상 자극에 대한 반응에 대한 민감성이 어느 정도 차단된 느낌입니다.


더불어, 내  아이들은 나이차이상당히 많아 어딘지모르게 조금은 불편한 남편과 나 사이를 편안하게 해 주는 완충지대이기도 합니다. 내게 안겨있는 아이와의 가까운 거리와 높은 밀도가 나 자신에게 안정감을 주기도 해 외롭고 차가운 느낌이 스며드는 것도 막을 수 있고요.


아이들의 통통한 볼대기와 살냄새 속에서 마냥 포근하고 귀여웠던 날들입니다.


나름의 학교공부를 마치고 지금 벤치에 앉아 있는 내 옆으로 온 남편은 말합니다.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엄마로 집에 남아 살림만 잘 하고 아이들만 잘 키워줘도 그것만으로도 엄마역할은 훌륭히 다 하는 거라고. 내가 아이들을 돌보는 모습을 보며 자신의 어린시절 주로 느꼈던 외로움의 감정을 대신 위로받는 느낌이라고 말합니다. 물론 압니다. 나는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육아가 누구나 할 수 있는 쉬운 일도 아니고, 한 인간의 성격을 형성하고, 인격을 형성하는 생 후 약 10년 간의 아동기간이 한명도 빠짐없이 모든 사람들에게는 사랑받을 권리와 이기적일 의무가 있는 너무 나도 치명적인 기간이라는 것을. 그리고 아이를 키우며 나와 내 남편이 어린시절 놓쳐 아쉬운 우리의 어린시절 발달과업을 다시금 충족시킬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갖고 있음에 감사합니다.


우리 가족의 경우, 내 아이들의 인생 최고 압축 성장기 10년과 가족 이민 초기 10년이 거의 완벽하게 일치했던 것입니다. 이 점이 나의 이민생활 고난의 밀도를 높이기도 했으며, 대신 그 기간을 단축하기도 했던 것 같습니다.


10년, 10년의 길이가 과연 어떤 것일까요? 스물 몇살, 아직 성인이 된 후에 10년을 살아보지도 못한 때여서, 성인으로서의 10년의 길이가 막연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10년 후라...아이 나이를 계산해보면 작은 아이를 기준으로 초등학교 저학년에 속할 것이고, 우리의 생활패턴대로라면 그 안에 셋째가 생길지도 모르겠습니다.


내가 이 곳 캐나다에서 이제 막 영주권을 받았는데, 지금부터 10년 후면 나는 어떤 모습일까요. 당장 이십대 중반의 뭐든해도 젊은 나 이지만, 10년후라면 삼십대 중반이 될텐데 만약 준비된 것이 없이 이제 자신들 웃음 뒤에 엄마를 숨겨줄 아이들이 모두 학교에 가 저 할일을 스스로 할 수 있게 되어 내가 세상에 덜렁 내쫓겨지면 나는 이 캐나다 다운타운에서 어떤 모습으로서 존재하게 될까요?


이 곳은 내가 태어나고 자라고 교육받은 한국이 아니라, 생전 처음 맡아본 냄새가 나는 사람들이 즐비한, 눈동자색조차 모두 다른 사람들로 가득한 캐나다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다양성만큼이나 내 몸속으로 들어오는 자극또한 강렬하고 다양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내가 익숙하고 친숙해져야만 할 일이라 생각하니 여간 부담스러운 것이 아닙니다.


10년 후 자신감있고, 유쾌하고, 행복한 내 모습을 만들기 위해서는 지금처럼 시간이 마냥 뛰어가는가는 것을  애들  뒤에 타고 앉아 바라만 보며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이 때 느꼈던 막연함이라는 감정은 태어난지 몇일 되지 않은 아기의 새말간 얼굴과 닮았습니다.


얼굴을 보면서 누구든 미소짓지만, 그 아이를 키워야하는 책임을 가진 부모는 한 순간도 책임이라는 단어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불행과 아이의 얼굴을 연관짓기 극구 거부하며, 이왕이면 행복과 기쁨, 귀여움과 찬미, 축복안에서 아기가 숨쉬었으면 좋겠는 마음 뿐입니다. 그러나 1초 후 아기에게 무슨일이 벌어질지 모르기에 늘 신경을 곤두세워야하는 것도 맞습니다. 아기의 귀엽고 건강한 몸과 마음은 아기를 키우는 엄마의 사랑공급과 마음조림을 바탕으로 유지되는 것이라는 것을 아이를 키우며 알게됩니다.


물론 어린아기가 귀엽지만, 아이 웃음을 보면 행복하지만, 또 아이의 고운 살결이 막연하기도 한 건 내가 특별히 불안하거나 미숙한 엄마라서 일까요? 엄마인 나 조차도 캐나다라는 세상에서는 생후 1년차 영아기를 지나고 있어서 일까요?


좋은 엄마가 되려하면 할 수록 육아가 버거워지고, 잘살아야지 하면 할 수록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변수들이 허수로 보이지 않습니다. 이민초기, 뭘 해야 효율이 높을까, 어딜가야 기회비용 최소화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행복할 수 있을까... 자고 일어나서 아침부터 또 자기전까지 몇 초도 생각을 놓은 적이 없지만, 생각하면 생각할 수록 모르겠고, 뾰족한 수도 없고, 젊고 어린 우리가족의 첫 이민 정착이라 에너지가 많고 가능성이 무수한 만큼 암담하기 짝이 없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유모차를 끌고 두 시간을 걸어도 세 시간을 걸어도 막연함이라는 감정 만큼은 마음에서 도무지 흩어지지 않는 그런날들 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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