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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Jul 30. 2024

[프롤로그] 사람들이 오마카세에 열광하는 이유

해외 살이 13년차, 주부생활 14년차, 현생살이 37년차 한국여자이다.

외국에 나와 살아보니 K- 광풍에 대해 실로 체험하는 바이다.

처음 내가 캐나다에 온 2010년도에, 사람들은 아직도 한국이 어디에 붙어 있는 나라이며, 중국과 왜 다른나라인지에 대해 설명하라는 수준의 한국인식능력을 보였었다.

그때, 내가 믿는 신께 기도했던 주제는 오직 한가지,


내가 영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한국어를 사람들에게 가르칠 수 있는, 그런 기적같은 날이 과연 올까요?


원하는 어느때건 내가 한국사람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주객이 맘껏 전도될 수 있도록,

모든 사람들이 내 나라를 알고, 과장을 좀 보태 영국보듯 한국을 우러러보게 해주세요.
나에게는 당연한 나라, 그렇지만 나를 뺀 모든 상대들이 한인에 대해 동양의 알지못하는 나라출신이라는 말로 당황시키지 않는 날이 오길 바래요.

캐나다에 들어오기 전, 20년간의 나의 삶의 행적이 부정당하지 않게 해 주세요.





지금 읽어보면, 뭐 저렇게까지 과대해석을 하나 싶겠지만, 진짜 이 정도였다. 그 때만 해도 일부 주와 시를 빼고는 동양인을 평생 보지도 못했던 사람들이 존재하기도 했던 캐나다였다.

나와 내 가족이 한번 문화센터같은 곳에 등장하면, 그들끼리도 사실 쌩판 남 일지언정, 이 순간 만큼은 한마음 한뜻으로, 동물원 원숭이 보듯 일제히 한 방향으로 몸을 틀고 우리의 눈과 코가 어디에 붙어 있었는지, 우리가 옷은 제대로 입고 있는지, 어떻게 걷는지, 어떤 소리를 내며 말하는지, 우리의 감정은 아량곳하지 않고 유심...히, 뚫어져라....지켜보던 시기였다. 이 곳에 존재하던 아시안이라면, 다운타운에나 가면 한 둘 볼 수있던 남아시아계 노동자 극소수가 전부였다. 그때는 인도인들도(알버타제외) 중국사람도(비씨 홍콩인 제외) 지금처럼 캐나다에 포진하기 전이다.



왜 나는 내 언어를 놔두고 마치 이전에 언어사용능력을 순삭해야하는 양, 갓난아이인것 처럼 영어를 새로 배워야하는 걸까,

왜 사람들은 날 모든 면에서 서툰 사람인 것 처럼 취급하고 도와주려 하는 걸까

난 왜 그들의 친절과 아량이 평등하고 동등한 권리를 가진 관계라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님을 직감할까

왜 동양의 작은 나라에서 이민 온 사람이라는 객관적 사실로 인해 내가 위축되어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이 내 나라를 왜 모를까, 한국은 그만하면 잘 사는 나라 아닌가?



캐나다 사람들이 한국에 대해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정보는 고작, 남한과 북한으로 분단되었다는 것과 김정일과 김일성의 존재정도였다.


이민자라고 이야기해도, 나를 남북전쟁의 잔상으로 피난온 난민이라 인식하는 사람이 아직도 많았던 현실이었다. 모두가 나를 안타까운 시선으로 보았고, 도와주려했고, 한국에서 보도 못한 '강자가 약자에게 한없이 베푸는 은혜' 라는 선민의식의 수혜자가 자동으로 되어있었다.


외부 외출이 짜증났고, 한국에 있을 때에는 어떤 집단에서든(집안에서는 아들 없는 집 큰딸, 학교에서는 반장, 가장예쁜아이, 전교권에 있는 공잘예, 직장에서는 아이를 가장 잘 돌보고 부모님들에게나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있고 젤 예쁜 쌤... 다 지난 이야기 하면 뭐하나) 대장감으로 살아서 몰랐던 세상의 벽, 한계, 피해의식 그런것들이 무엇인지를 배우게 되었다. 동시에, 나의 과거 환경이 현재의 나를 이만큼 만들어 준 것이지, 차 떼고 포 뗀, 나라는 인간 자체가 잘나서 그렇게 살았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주체가 어떤 힘을 갖고 있고, 어떤 성향을 지니고 있든, 각기 다른 환경에 놓이면 전혀 다른 성격이 형성될 수 있음도 이 때 배웠던 것 같다. 철저하게 Nature  vs Nurture 중 Nurture의 힘이 강력함을 깨닫는 나를 향한 실험이었다고 생각한다. 




세상은 나를 위해 케이터링 된 곳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자아독립의 시기였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오마카세에 열광하는 이유는,  자신들이 사는 세상이 스스로를  위해 케이터링 되지 않았음을 직감하고 있기 때문일거다. By후루츠캔디




처절했던 시간도 일 이년 지나며, 그 때 부터 한국붐이 일기 시작했다. 나의 기도빨이 먹혔다고 가정해도 될 정도로 기가막히게도 맞아떨어지던 순간이었다.


한국에 독자들의 이해를 가장 직관적으로 돕기위해, 그때는 바로 코비드 한참 전, 한국 서울의 전세값이 천정부지로 오르던 2012년에서 2014년 사이 정도 될 것이다. 이때에는 매매와 전세가 거의 차이가 나지 않을 만큼 모두 전세 대란을 겪고 있을 때였다. 오히려 그 3년전쯤으로 신도시, 수도권의 아파트값이 떨어져 모두 융자받아 산 집들에 대해 한숨만 쉴 무렵이었던것도 기억한다. 싸이의 강남스타일, 각 남녀 아이돌 등이 동남아를 비롯한 타대륙 등에 알려지며, 케이팝이 스물스물 눈 뜰때, 케이 드라마가 아랍국가들 중심으로 퍼질 때, 내 나라 한국은 이제 더이상 분단국가로 유명한 나라가 아니게 되었다.


K- 영화, 드라마, 팝 문화는 누군가에게는 chessy하다 평가받기도 하지만, BTS의 노래가사나 봉준호감독님의 [기생충]이라는 작품은 유럽인들의 높은 콧대를 꺾어주며, 단순한 소비중심의 문화가 아님을 톡톡히 일러주었고, K 문화는 미국문화의 아류라는 졸렬한 평가를 역전시키기도 했다. 나와 같은 외국사는 서울인들의 기를 살려주었고,  어딜가서 누굴 만나든 K 문화 칭찬부터 들어가주는 상대방 덕분에 원하는바를 이야기하기 훨씬 쉬워진 입장이 된 것이 사실인 근 10년여의 변천과정을 응축하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한마디로 한류열풍 이 전과 이 후로 학교 다니는 아이들을 비롯한 외국사는 한국인의 지구촌에서의 인식이 완벽히 달라졌음을 체험한다 뜻이다.


세상에서 유명한 작품들을 비롯해, 상업적 홍보에 노출되지 않은 독립영화 등의 작품들도 유심히 지켜보는 바, 그동안 내게 감명깊었던 한국 작품들에 대한 감상을 써내려가며 한국에 계신 독자분들과 두런두런 수다한마당을 펼칠 계획이다. 외국생활하는 내 삶의 박카스, 쉼표, 동굴, 최장 초기 1-2년의 외국인을 위한 환대의 honeymoon기간이 끝나면, 아시안이라면 마주하는 Microagression이 난무하는 사막같은 외국생활 속의 오아시스속으로 스리슬쩍 들어가보는 시간, [K- 다방 미스캐러멜]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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