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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Aug 20. 2024

[아이들은 즐겁다] 외로움을 배우지 않았더라면

오후 4시부터 아침 8시까지, 나 혼자 지켜야했던 텅빈 집, 이간질.

나는 유소년기 아이들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를 좋아한다.


아동학을 전공하고, 아이들을 탐구하고 또 그들의 배움의 과정에 일조했고, 그 곳에서 많은 아이들을 만나며 보람과 기쁨을 느껴서 이기도 하다. 그러나 진짜이유는 나의 지나간 어린시절을 반추해볼 수 있어서이다.


어린시절의 나는 내 생각에 특출나게 눈에 띄는 아이는 아니었지만, 나름대로 성실하고, 용감하고, 스스로의 역량 안에서만큼은 사교적인 아이였던 것 같다. 특히, 엄마 아빠의 빈자리를 스스로 감당해 내야했던 의무에 있어서 말이다.


https://youtu.be/h1KCxchFUc8?si=b5XJiiGSho13ApXe

출처: Youtube의 한 영화 채널



동생이 백혈병으로 아파 열심히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입원했을 때, 어머니는 당연히 동생 병간호때문에 병원에 일주일 내내 계셔야했고, 아버지는 보험금으로는 부족한 생활비와 치료비를 벌러 투잡 쓰리잡을 뛰려 밤낮, 주말, 평일 없이 동분서주하며 돈을 벌어오셔야할 때,  한국의 1990년대 사정상 나는 사회복지사의 도움없이 혼자 우두커니 집을 지켜야했다. 유희거리라곤 1대 있는 텔레비전과 컴퓨터가 전부였지만, 그것도 한 두시간이지, 학교가 끝난 4시부터 그 다음날 학교가기전 8시까지 너무 긴 시간을 매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저녁시간에 나는 혼자 엎드려 누워 동아전과나 표준전과를 베껴썼고, 그걸 예습이라며 학교에서 선생님이 질문하실 때 줄줄 읊어대고 칭찬을 받았는데, 당시 나의 사정을 아셨는지 모르셨는지 선생님은 내게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물론 그 당시에도 서울 중에서도 특정 동네에서는 사교육이 막 생길 때라 속셈학원이라든지 보습학원에 가는 아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지만, 그런것들은 내가 사정상 부모님께 강요하거나 요구해서는 안되는 것이라는 것쯤은 이미 눈치채고도 남았었다. 동생이 아프기전에 다니던 피아노와 미술학원도 정리를 해야할 판이었으니 말이다.


오후 4시부터 아침 8시 까지 내 스스로 외롭지 않게 하기 위해 꼭 해야했던 건 이 전과 베끼기와 집청소, 그리고 가장 중요한 친구들과의 놀이이다.


다세대 2층에 방도 2개였나 3개였나 있고 3칸짜리 싱크대가 주인인 주방겸 거실이 있었던, 별로 넓고 좋은 집도 아니었는데, 고급스런 현관문만은 어린아이 목에 자신있었던 것 같다.


학교가 끝나면 나는 친구들을 데리고 언제나 내 집으로 향했다.  때 생긴 습관이었을까? 외로움을 처리하기 위한 방법으로 친구를 내 인생으로 데리고 오는 행동. 초등학교 4학년 이었던 나와 아이들은 우리집 거실에 일렬로 앉아 앞사람의 머리를 묶어주기도 했고, 우리집 앞골목에서 고무줄 놀이를 하기도 했으며, 반찬은 없지만 냉장고 안에서 계란등을 꺼내서 간단한 요리도 해 먹었었다. 앞선 글에서 썼던 [핑클놀이]를 했던 시기로 이어지게 된 초석이었다.



친구들로는 가족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꾸기 역부족이었을까, 성인이 된 나는 아직도 [아이들은 즐겁다] 영화를 보며, 주인공 다이가 밤에도 혼자 자고 낮에도 부모의 도움없이 스스로를 챙기는 모습을 보면 나의 그 때 기억으로 가슴 한켠이 시릿시릿하다.


지금은 엄마가 된 나의 아이들이 벌써 8학년이고 5학년이라 이제는 좀 낮 2-3시간쯤은 부모없는 개인시간을 줄 법도 한데, 아이들이 학교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서둘러 부엌에서 몸에 좋은 간식을 준비하고 식탁에 놓고, 반가운 마음으로 아이들을 기다리는 것이 편안한 내 현재 모습은 어린시절 외로움의 흔적이다.




극 중에서도 전교 2등친구가 주인공 다이의 시험성적을 질투했듯이, 내가 받던 선생님과 친구들의 관심과 사랑을 질투했던 친구가 존재했었다. 물론 처음부터는 아니었다.


 그 친구와의 관계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서는, 내 동생이 아프기 전, 그러니까 4학년 1학기 초, 그 친구와의 첫 만남부터 이야기를 시작해야한다.


다름아닌 내 단짝 친구 다금이, 소중하고 예쁜 금을 가득 지닌 아이로 성장하라고 아빠가 지어주신, 부자되는  이름이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던 기억이 난다. 이름대로 성장한달까, 다금이는 그 당시 반에서 키도 가장 크고, 얼굴도 희고, 4학년이 시작된지 두세달뒤에 전학 온 친구이지만, 눈에 확연히 띄어 누구나 친해지고 싶어하던 그런 친구였다. 사춘기 초반의 어린아이들은 남들보다 먼저 여자티, 성인티가 나는 아이를 동경하게 마련이다.


다금이와 친해지고 싶었던 나는, 내 등교길 집앞에서 이사짐차를 보았고, 그 다음날 우리반에 전학온 아이 가족의 집과 짐이었음을 직감해 다금이에게 먼저인사를 했었다.


나는 소연이야
 우리집 앞집이 너네 집이야, 나 오늘부터 너랑 친하게 지내기로 했어!

다금이에게서 들은 소연이(나)의 모습은, 날씬하고 긴 머리에 머릿띠를 햇으며, 흰 얼굴에 계란형 얼굴이 새초롬한 아이였다고 한다. 10여년이 지나도, 20여년이 지난 때에도 다금이는 내 모습이 인상적이었는지 아직도, 아직도 뚜렷이 기억난다며 그 이야기만 나오면 눈빛이 총명해졌다. 나도 내 모습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다금에게서 전해들은 내 어릴적 모습이었다. 성인이 된 지금이야 내가 더 커졌지만, 그 때에는 그 친구보다 내 키가 10cm는 작아 그것이 늘 나를 초조하게 만들었는데, 어쩐지 그 친구에게는 내 키가 하나도 보이지 않는 듯 했다.

그도 그럴것이, 다금이네 엄마는 나에 대한 칭찬으로 항상 일관하셨기 때문이다. 소연이는 허벅지 길이가 기니, 앞으로 키가 많이 클거라고 해 주셨고, 너처럼 예쁜 아이가 우리 다금이에게 먼저 다가와줘서 고맙다고도 하셨고, 내가 다금이 집에 가면 다금이 엄마는 언제나 상냥하게 환영해 주셨기 때문이다. 슬렌더 체형에 단아하고 멋진 아주머니가 나에게 칭찬을 해 주시니 나는 다금이 엄마가 너무 좋았다.

 행복했던 시기도 잠시, 4학년 2학기가 되면서부터 내 동생이 아픔과 곧 진단명이 나왔으며, 내 삶의 위기가 오는 동시에 다금이와 나의 관계에서 슬금슬금 변화가 시작되기 시작했다.


나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 전학온 입장의 다금이는 4학년 뿐만 아니라 1학년 또는 그 이전부터 그 동네에서 살며, 친구들을 쌓아 만들어온 내게 설명할 수 없는, 그 따라잡으려고해도 따라잡지 못하는 어려운 감정이 있었나보다. 내 키가 작아도, 내 다리가 더 짧아도, 인기 투표에서 다금이가 1등을 해도, 소연이와의 관계에서만큼은 항상 자신감이 없었던 다금이. 나에게 본인의 감정을 설명했던 건, 몇 학년이 지나서 전학 온 다른 아이를 통해서였다. 그 아이에게는 나에 대한 진심을 털어놓았나보다.



내 동생의 발병과 함께 친구들이 더욱 많아진 나에게 어려운 마음이 들었나보다. 나는 외로움을 감당하기 위한 전략이었을 뿐인데, 나의 행위를 퍼소널하게 받아들인 그녀는 내가 더 이상 자신과만 단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다른 많은 아이들과 어울리며 여러가지 감정과 행복을 느끼려한다는 것에 대해, 나의 단짝인 자신에 대한 배반감이라는 감정으로 해석했다. 4학년 아이가 다른 아이의 아픔을 공감할리 없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했던 다금이는, 우리집에 놀러오는 아이들에게 나에 대한 헛소문을 퍼뜨리기 시작했고, 심지어는 내 동생의 백혈병이 우리집에 놀러오는 다른 친구들에게 옮겨질 수 있는, 그런 전염병이라 이야기하며, 아이들이 겁에 질려 내 집에 오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애들이 있나 없나 확인사살을 하기 위해 다금이가 우리집에 온날, 나는 다금이 앞에서 눈물을 쏟아 울었다.

 

...백혈병은 전염병 아니야.
나 너무 외로워...
나를 힘들게 하지마




외.로.워...


4학년이었던 내가 그녀 앞에서 밝힌 내 솔직한 감정은 외로움이었다.

그때 내가 얼마나 울었는지...



나의 오열에 놀란 4학년 다금이 그리고, 다금이의 조수로서 함께 우리집 거실에 들어온 아름이라는 친구는 그동안 몰랐던 내 사정을 들은 후, 나에게 진심으로 미안하다고...다금이 말만 듣고 나를 오해해서 정말정말 미안하다고 했다.


아름의 사과, 즉 자신의 작전 안에 없던 일이 벌어짐에 한눈에 보기에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던 다금이는 슬슬 자신의 고집을 누그러뜨리며 내 앞에서 혼란스러워했다. 


바로 즉시는 아니지만, 함께 그 날 시간을 보내며 자연스레 다금이는 내게 미안한 감정이 들었는지 슬쩍 미안하다며 사과했었다. 그녀의 사과가 진심이었는지, 아니면 사람을 구석에 몰려다 정작 본인이 궁지에 몰려 가까스로 그녀에게 몰아 친 감정을 내가 떠안아 버리게 된 것인지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그래도 나는 이것 저것 묻기보다는 엉겁결에 다금이가 내게 준 빨간 사과를 덥썩 받아 물었다.




왜 나는 외로워야할까

왜 나는 나에게 아픔을 준 이들에게 내 연하디 연한 감정을 솔직히 밝혀야 했을까

가장 친한 친구라 여겼고, 먼저 손 내밀어 친구가 되려했던 나의, 가장 아픈곳을 후벼팠던 4학년 다금이에게 나는 왜 울음으로 그 상황을 마주해야만했을까.



그 당시에 내가 원두커피보다 더 진하고, 까맣고, 깊은 외로움을 배우지 않을 수 있었더라면.. 지금 내 삶에는 어떤다른점이 있을까.. 생각이 더욱 발산한다면 [아이들은 즐겁다 2편]을 써내려갈 계획이다.




어른의 시각에서 본다면 대중앞에서 진심으로 외롭다며 오열하는 행동을 했다면, 몇 시간뒤 정신이 돌아오면 이불킥이며 비굴모드 그 자체 였을지 모르지만, 아이이기때문에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랬을까 싶다.

살려고 했던 행동인데, 공감할수 없고 자기중심성으로 관철한 4학년 여자아이였기에 그당시 나의 가장 아픈 구석인 내 동생의 아픔을 들먹이며 내게 상처주었던 거겠지.



다금이는 내 마음이 아플 줄 몰랐으니 그랬던 거겠지?



영화속 주인공 다이를 보며, 비록 연기이지만, 다이의 맑은 눈빛에서는 자신을 괴롭히고 컨닝해서 100점맞은거라 오명씌우던 친구에게 울며 사정하지 않아서, 그 친구가 안갖고 놀거면 패스하라고 말한 그 공을 뻥 차버리고, 몸싸움해버려서 그 장면이 인상깊었다. 다이와 나의 성별차이에서 온 대응이 아니다. 다이는 오명 씌우던 전교2등이 아닌, 자신을 지지해주던 다른 단짝 친구들이 있었고, 나는 단짝이라 굳게 믿던 아이에게서 온 공격이라 대응방식이 달랐던 것 같다.


어른의 시각에서는 나를 괴롭히는 사람에게 눈물을 보이고, 진실한 감정을 내비춘 나의 처세가 비굴함일지 모르겠지만, 초등 4학년이었던 나의, 진심을 다한 울부짖음은 다름 아닌 용기, 진짜 용감함 이었다고 성인의 나는 그 때의 모습을 재조명한다.


1)내 사정을 알지만 본인의 감정때문에 나를 궁지에 몰려던 자기중심적인 아이의 인식방식에 나름대로의 환기구를 마련했으며, 2)아름이라는 또 한 명의 현명한 친구 하나를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3)엇보다도 내 감정과 상황에 대한 솔직함이 어떤 힘을 갖고 있는지에 대해 내 스스로에게 각인시켰으니 말이다.


중학교 고등학교 이후에 다금이네는 부모님의 사정상 지방의 소도시로 이사를 했고,  다금이는 외할머니와 함께 살다 결혼했으며, 그 이후에는 서로 연락이 끊겼다.

물론 내가 캐나다에 이민오기전까지 우리는 옛날일을 모두 덮어두고 가끔 밥도 먹고, 시기시기의 사는 이야기를 하며, 무난한 관계를 유지해나갔던 것 같다. 이 글을 쓰며 다금이를 생각해보고 있는데, 종종 그녀는 내가 관심을 갖지 않고 있다 판단해 호응하지도 않은 이야기를 너무나 길게 1시간-2시간, 시간가는줄 모르고 내뱉었던 특징이 있었다. 물론 성인이 된 이후에도 말이다. 나에게만 그런것이 아니다. 다금이의 일방적인 수다를 듣다 못한 어떤 아이는, 그걸 누가 궁금해해? 하며 맞받아치기도 했지만, 내 맘또한 읽혀버린것 같은 무안함에 내가 더 크게 공간을 웃음소리로 채우려 웃던 기억이 난다.


그녀의 속사포 랩을 듣다 지치다못해 멍해진 얼굴로 그녀를 바라봐도 신나게 자신의 상황을 설명하던 그녀의 모습에 오늘도 귀여운 웃음이 난다.


2013년 초×100인기 네이버웹툰을 원작으로 한 영화, [아이들은 즐겁다], 유난히 나의 어린시절로 회귀시켜준 마음아프지만 아름다운 작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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