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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Sep 03. 2024

[죽여주는여자] 모텔비포함 3만원, 잘해드릴께

삶에 대한 좌절감은 초월의 또 다른 이름이 될 수 있다.

윤여정 배우님은 그녀의 연기 시간이 흐를수록 더더욱 빛을 내고 계신 분이시다. 천연덕스럽고 약간은 뻔뻔할만큼 솔직한 그녀의 연기색깔이 맘에 든다. 너무 과장되어 감정이입이 되지도 않고, 너무 위축되어 초라하게 느껴지지도 않는 다른 배우들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녀의 연기는 늘 담백하며 사실적이라 보는 이들에게 감정의 연결과 감동을 다.




오늘은 그녀가 끌고 가는 영화 [죽여주는여자]에 대해 이야기해볼 생각이다.

단순히 쓸쓸한 노인들의 이야기이겠거니 하던 예상과 달리 이 영화의 탄탄한 구성에 먼저 감동을 받았다. 탑골공원의 노인들, 각종 성매매자로 이뤄진 가족구성원(성소수자,장애인, 그리고 박카스할주머니), 코피노가족, 외국인 노동자, 주한 미군, 주한미군의 애인으로 아이를 낳고 살다 늙어버린 여자 등 사회의 취약계층의 삶을 영화의 전 화면에 속속들이 다룬다.




노동을 강요당하는 것도 아니고,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나름대로 윤택한 편이라며 나의 현재 캐나다에서의 입장을 주,객관화 할 수 있지만, 나라를 바꾸고 여러민족이 어우러져살며, 타국에서 편입된 입장으로서만으로도 충분히 예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사회의 마이너리티의 삶에 대해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마련이다.




먼저, 이 영화는 준비되지 않은 노년기가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해 주었다. 어릴적 주한미군업소에서 일하며 미군과 사귀어 아이를 낳자마자 입양보낸, 예나 지금이나 각종 성병을 갖고 사는 박카스 할머니 소영(So young)은 모두의 친구이다. 주인공 소영의 몸바친 노동의 댓가와 공무원이나 회사에서 일한 사람들의 노동 댓가는 늙으서 다르게 책정되는것이 옳은가? 젊은 기간동안 땀흘려 열심히 일해 연금을 받는 사람들은 노인이 되어 쓸쓸한 몸으로 박카스아줌마 소영을 찾는다. 한편, 경제적으로 넉넉해봤자 병원에 누워 사는 신세가 되니, 부모의 안위는 안중에도 없고 그저 돈달라고 이어폰끼고 폰만 보는 자식과 손주들이 형식적으로 방문하지만 그 사람 끝까지 있는 사람은 진심인지 사심인지 결국 자신의 부탁으로 노인을 죽여주는 박카스 아줌마뿐이다. 돈이 있든 없든 외로운 노년의 단면을 본 셈이다. So young, 얼마나 안타까운 이름인가, 결혼, 출산, 폭력을 이길 수 없던 상태에서 선택한 입양과 이혼의 시점에서 새로 지은 이름이라 하니 애처롭기 짝이 없었다.



총 3명의 의뢰를 해결하고 서슬퍼런 소영을 본다. 크나큰 댓가를 준다고해도 절대 수행할 수 없는 의뢰를 소영은 어떻게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해결해주었을까. 나는 그녀의 삶의 눈빛에서 좌절감과 망연자실함을 보았다. 이 좌절감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그녀가 모든 희망을 잃고도 살아남아야 했던 강요된 초월의 상태였다. 좌절감은 초월의 다른 이름이라 생각한다. 감옥에서의 삶과 성매매노동자로서 아무나 지나다니는 너른 들판에서도 벌려주고, 아무나와 붙잡은 여관방에서도 머리채를 잡혀 나의 의지를 남의 손에 맡긴채 목을 흔들어줘야하는 삶 중 어떤 삶이 나은지 가늠할 수 있을까? 그녀의 삶에 희망이라는 것이 존재하기라도 했다면 그녀는 똑같은 입과 눈빛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었을까...만약 그녀에게 남아있는 희망이 있었다면,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그녀는 그 희망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을까, 아니면 이미 포기한 상태였을까?



필리핀으로 여행을 가 아이를 만들었지만 결국엔 태어난 아이가 자신의 아이임을 부정하며 살던 의사는 병원으로 찾아온 자신의 필리핀 상간여자와 아이를 맞닥들인다.  끝까지 자신의 식구임을 부정하자, 필리핀에서 남자를 찾아 온 여자는 분노를 참지 못해 결국 그 의사의 가슴을 가위로 찌르고, 그 죄로 감옥에 갇혀 자식과도 만날 수 없는 처지가 된다. 누구의 잘못인가? 아이가 태어나 서로가 행복하게 셋이 찍은 사진에는 남자의 얼굴이 뻔히 보이는데, 어떻게 자신이 만든 자식을 부정할 수 있는지. 자신의 욕구 실천 행위에 대한 부정이 생명체의 존엄성에 대한 부정으로 이어질 수 있음을, 이 산부인과 의사는 단 한번이라도 진지하게 생각해 본적이 있나 싶다. 욕구의 탐닉, 충동성에 대한 무제재가 필리핀 여성과 아이라는 약자의 권리에 어떤 치명타를 주는지에 대해, 무심코 던진 조약돌에 개구리는 맞아 죽는다고. 똑같이 중요한 생명체인 피해자에게 붙인 '개구리'라는 속담 속 상징이 마음아프다. 


캐나다에 살며 종종 필리핀 사람들이 주로 사는 동네에 가 보면, 엄마 혼자 극동아시아 혼혈 아이들을 키우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옛날에는 일본, 현재는 한국과 중국 남자와 필리핀 여자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이 대다수이라고. 필리핀은 다들 알다시피 먹고 살기 힘든 나라이다. 더욱이 간통으로 낳은 자식이기에 한중일에는 가서 살 수 없기에 모든 요소를 위한 대안책인 캐나다에서 살게 되지만, 결국 그들의 삶에 대한 분노는 극동아시안 모두에게 혐오의 감정으로 투사되기도 한다. 소수 인간들의 이기적인 행동이 사회적 약자인 여성과 아이에게 덜렁 남긴 극도로 무거운 책임감과 죄책감, 그리고 그로인한 혐오는 우리가 캐나다에 살며 초대받은 아이 친구 생일잔치에 가 황급히 맞닥들여지는 미묘한 긴장감과 당황스러움의 감정으로 표현된다. 


성매매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는 자기자신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고 성장하게 될까. 입양이 되어 건강한 가정에서 성장하게 되면 다행이지만, 여러가지 이유로 인해 아이가 적절히 보호받고 성장하지 못하게 될 경우에 아이가 평생동안 안고 살게 되는 외로움과 그리움, 불안, 자기존재가치에 대한 의심, 세상을 향한 분노, 인간에 대한 적개심을 갖고 산다고 해도 이러한 감정이 그들의 잘못이나 성격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잘못도 없는 사람이 왜 평생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야할까. 태어난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존중받고 사랑받고 보호받아야할 권리가 있는데, 이 기본적인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산다면 인간은 얼마나 괴로워야할까. 아니다. 누구도 괴로워야할 의무는 없다. 어떤 방식으로 태어나 어떤 결핍을 갖고 살아내야 하더라도, 누구도 괴롭거나 외로워야할 의무는 없다. 모두의 사랑으로 미소로 따뜻한 성품으로 감싸 주어야지.



주인공 소영은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고 있는 한 주한미군을 만나게 되는데, 소영의 입양보낸 친아들과 프로필이 일치한다. 한국에서 나는 아프리칸 어메리칸을 실제로 본 경험이 거의 없다. 내가 지금 살고 있는 캐나다에서 보는 아프리칸계 캐내디안들은 나와 마찬가지로 공부하고 양육하고 일하는 유능하고 덩치좋고 운동 잘하는, 다정한 사람들인데 어째 노인들이 보는 아프리칸 출신들의 이미지는 다르다. 아무리 점잖고 배운 사람이라도 캐나다 백인 노인들이나 한국 노인들은 아프리칸을 무슨 범죄의 온상화하는데, 같은 환경안에서 성장하고 양육되고 교육받으면 사실 우리와 별반 다를 것 없는, 본질 자체가 우리만큼 귀하고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생각해주었으면 좋겠다.


한 지붕 세 가족. 소영의 집은 요상 뻑적지근하다. 한 건물에 살고 있는 세대원들 모두 직간접적으로 성매매 노동자이기 때문이다.


성소수자 건물주인 티나, 한쪽 다리가 없는 예술가 도훈, 그리고 주인공 소영.



내가 살고 있는 도시 위니펙은 성소수자들의 도시로 유명하다. 캐나다라 원래 한국보다는 자유로운거 아닌가? 하며 무의식적으로 반응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그 또한 편견이며, 사실이 아니다.


위니펙이 타 주의 타 도시들보다 다양성과 자유를 사랑하는 이유는, 급진개혁파들이 오랫동안 사회의 주류를 이루며 위니펙을 끌고 갔던 점, 그리고 캐나다원주민에 대한 사회적 격리 없이 모든 사람을 자유와 평등 안에서 소통하고 사랑하는 도시라는 이유 때문이다. 우리의 삶과 무관해 보이는 정치이지만, 사실 정치야 말로 실제 우리 개인들의 삶의 형태와 방향과 직결함을 또 다른 사회에 이민 와 배우게 되었다.  


사회적 감금상태, 즉 인디지너스들을 사회와 소통하지 못하도록 특정지역을 정해놓고, 거주하게 하고, 문화, 사회적 인프라들로부터 차단시키며, 아직도 원주민 어린이, 청소년, 여성에 대한 개인과 기관(학교 등 공기관)의 학대가 공공연한 주와 시가 캐나다 중서부에 아직도(2024) 버젓이 존재하는 현실 속, 내가 매니토바 주 위니펙 시를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많은 이유 중 하나 이다.


물론 원주민을 왜 가둬놓지 않고 도시 전반에 같이 살도록 두었는지 한심하다며 이를 치안문제와 연결시켜 탓하는 이민자들도 있는 것이 사실이다. 아이를 키우는 사람으로서 보호해야할 대상을 위해 모든 종류의 선입견을 대입해서라도 최대한 무공해 안전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은 그들의 마음또한 한편으로는 이해하지만, 난 그런 마음가짐으로서는 내 아이를 큰 사람으로 키울 수 없다고 생각하는 입장이다. 선입견을 최대한 배재하고 편견없는 시각으로 세상을 볼 수 있는 열린시각을 갖도록 만드는 것이 곧, 내 아이를 편견과 차별이 난무하는 이 세상으로부터 자기자신 고유의 존엄성을 지키도록 가르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기에 나는 나의 결정과 삶의 자세가 옳다고 확신한다.



내 가족을 향한 차별에는 발끈하면서 정작 자신은 원주민에 대해서 인도나 중국에 대해서 아프리칸에 대해서 불쾌해하고 있다면 모두가 달라 아름다운 캐나다에서 불행할 자격밖에는 없는것 아닐까?


위니펙 아이들은 초등학교 3-4학년만 되면, 게이 또는 레즈비언, 성전환자에 대한 개념을 탑재하게 되는데, 원주민을 비롯한 이 혼란스러운 성개념을 혐오하는 부모들은 크리스찬스쿨을 보내 아이들을 종교적 태두리 안에서 보호하려한다.  또한 개인의 권리이다.


한국이라면 이태원등 특정 지역에서만 볼법한 성소수자들이 이 곳 위니펙에서는 자연스럽게 모두와 어우러져 살고 있다. 외모로도 그들을 구분할 수 없다. 생물학적 성과 자신이 정의하는 심리학적 성이 일치하는가 불일치하는가 부터 시작, 일치하지 않는다면 몇 퍼센트 스스로를 여성과 남성으로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로 성별구분이 보다 체계화 되어있다. 남vs 녀 라는 이분법적 분류와 표기를 사회 각 곳에서 피하는 입장들이다.


이것은 캐나다 원주민의 비식민지적 성에 대한 개념과 뜻을 함께 한다고 한다. 이분법적 사고의 성, 즉 남성과 여성이 존재하지 않으며, 모든 사람은 남성성과 여성성을 모두 갖고 있음을 말한다. 원래 서구적 기준에서 남성과 여성의 분류는 그 원류가 노예제에서 온다. 물론 아직도 이분법적 성분류체계를 믿는 사람이 엄연히 이 곳 위니펙에도 존재하며, 그 분들의 의사또한 존중되어야한다 생각하는 입장이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다른 존재에 대한, 다른 생각에 대한 상호 존중은 사회를 안전하고 숨쉴만한 곳으로 만든다. 이는 사회가 다양성을 포용해야하는 근거로서 설명가능하다.




도훈, 그는 성인피겨를 만드는 예술가이다. 자세히 보면 그는 한 쪽다리에 의족을 찬 채 생활하고 있다. 성적 욕구가 존재하는 보통사람인 그는, 필요할 때마다 윗층에 사는 티나를 찾는다. 누가 누구에게 성을 매매하는지 둘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확히 묘사되어있지 않다. 방세 대신 성행위를 하는 도훈인지, 도움이 필요한 도훈에게 돈을 받고 서포트하는 티나인지. 장애인의 성에 대해 생각해본다. 그들의 욕구를 존중한다면, 그들의 성을 존중하는 사회복지 시스템이 존재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어떠한 종류의 비참함이나 자괴감없이 스스로의 건강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물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육체적 사랑을 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겠지만, 현실적으로 결혼전 그리고 후에 장애를 얻게 되면, 성적 충동이 있는 동시에 행위는 자유롭게 이루어질 수 없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예를 들어, 중추신경에 암을 얻는 등 장애를 얻게 되면 사람이 가히 미쳐버릴 지경이라고 하니, 그들의 고통을 보다 직접적으로 직면하고 단계를 나눠 누구나 누려야하는 성적 즐거움을 탐닉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한다고 생각하는데 어째 캐나다 사회는 이 곳까지 파악할 경제적, 심리적 자원이 부족해보인다.



감옥에서만큼은 주는 밥 먹고 그녀에게 만큼은 평생의 숙제였던 성노동에서 자유로울 수 있던 주인공 영.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감옥에서의 죽음이 그녀의 삶에서 등수를 매기자면 몇번째로 불행했을까, 또 몇번째로 행복에 가까웠을까. 삶은 행복이며 죽음은 슬픔이라는 일반적 도식 또한 절대적이지 않을 수 있음을 소영의 케이스를 통해 생각한다.  감옥은 슬픔 또는 고통이며 자유로운 삶은 자유라는 도식 또한 절대치가 아님을 아는 삶은 얼마나 가엽나...




이 영화 감독의 성함이 이재용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 감독님께서 얼마나 삼성이재용과 자신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며 성장하고, 사셨을지에 대해 잠시 묵상한다. 부모님이 정해주셨을 이 이름이 얼마나 세상에 대해 많은 생각의 거리를 주고, 자신을 탐구하는 큰 감독으로 만들었을까 생각한다. 영화감독 이재용이든 삼성 이재용이든 '이재용'은 큰 인물이 되는 이름임에 틀림없나보다.



정말 탄탄한 구성과 강렬한 등장인물들 모두가 돋보이는, 우리 모두에게 생각할 거리를 준 깊은 영화였다.


P.S. 모든 코피노가 희생자는 아니다. 이곳 캐나다에서는 코리안과 필리피노 사이에서 낳은 아이든, 러시안과 중국인 사이에서 낳은 아이든 모두 캐내디언으로서 법적 사회적으로 사랑과 보호 받으며 건강하게 정상가정안에서 성장중인 경우가 많다. 선입견에 의해서든 어떤 이유에 의해서든 차별이 존재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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