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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Aug 27. 2024

[아이들은 즐겁다2]외로움을 이기는 정성과 사랑의 힘

주변 이웃들의 기품과 정성, 감사, 보호 그리고 용기

오늘은 [아이들은 즐겁다1]에 이어 흝어지는 생각을 한데 모아 후속편으로 엮을 계획이다.

과거에 대한 재조명은 삶의 방향과 자세를 결정하고, 바꿀 수도 있는 기틀이자, 지렛대로서 큰 가치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글을 쓰며, 전에는 아픔이고 어두움으로 해석했던 지난날이, 단지 심리학 이론에만 의거한 결론이었음을.. 꽤 오랜기간동안 그것을 뛰어넘고도 남는 조건들이 미쳐 고려되지 않았음을 인식하게 되었고, 새로운 인식을 통해 과거를 해석하던 부정적 도식에서 벗어나 오히려 의외의 행복, 감사함을 발견하게 되었다.


이 글을 읽고 생각하며, 당신도 당신안의 결핍을 초월하는, 마음속 숨겨진 보석을 찾는 계기를 하루빨리 직면하시길 진심으로 바란다.




앞선 글에서 밝힌 바대로, 어린아이가 느끼는 외로움은 성인이 느끼는 외로움과 다르다.


어린아이가 혼자라 외로움을 느낀다면, 매슬로우의 욕구 단계 중, 소속감이나 사랑이라는 성인의 '외로움'에서 오는 결핍 뿐만 아니라, 그보다 훨씬 이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인 안전에 대한 욕구에 구멍이 나게 마련이다.



후루츠캔디가 그려본 매슬로우의 욕구단계(가)설



 어린이는 아무리 안전하고 튼튼한 집에 살아도, 어른들 세상에서 자기자신을 지키는 것이라고는 역부족임을 스스로 알기 때문에, 어둑해질 녘 그 후 부터는 자신의 안위가 지켜지지 않을 지도 모를 거라는 두려움에 휩싸인다.


내가 느낄 공포, 두려움, 불안감을 인지하고 있던 좋은 이웃들은 어린아이였던 내게


소연아 밤에는 무서우니 우리집에 와서 잘래?
혹시라도 누가 집에 들어와서 무서우면 이모한테 전화해


라고 말하며 도움 주려고 하지만, 그런 어른의 워딩 자체를 듣는 것 만으로도,


아, 내가 처한 현실의 낮과 밤은 정상이 아니구나,
내가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도 있구나,
아무리 주변에 전화를 넣을 이웃이 있지만, 이미 무서운 사람들에게 정복 당한 후에는 어떻하지...


라는 무시무시한 생각이 들기 시작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나름대로 열심히 살고 있는 부모님에게도 다른 아이들을 돌보고 있는 이웃의 어른에게도 나만을 온전히 지켜줄 보호자부재와 그에 따른 추가 인력의 필요성을 알리기에 역부족이라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감지하며' 아, 나는 다른 아이들과 같이 보호받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다'라는 객관적 인식에 더불어, 상황이 반복될 시에는  '나는 내 동생보다 중요한 사람이 아닌가? 다금이를 비롯한 일반아이들보다 덜 중요한가?' 라는 생각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다 역설적으로,


내가 나 자신을 어른들의 세상에서 지키려면 스스로 빨리 강해져야해
무작정 어른이 빨리 되어야만해


라고 생각하게 되며, 자의식을 부풀려 나가게된다. 자의식이라해서 오만함, 타인보다 낫게 여기는 마음 그런 것들이 아니라, 책임감이라든지 타를 추월하는 성실함, 성취등을 말한다. 생각보다 오랜기간동안 그 부푼 자의식을 매꿔가는 삶을 무의식적으로 살아가게 되며, 성취도가 높을지언정 언제나 남 모를 낮은 자존감, 그러니까 아직 스스로를 어린이이며 보호 받아야하는 존재라 여기지만 지나치게 자신과 주변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는 가짜 어른의 마음가짐을 모두 커다란 한 통에 뒤죽박죽 섞어 넣어 등짝과 어깨에 이고 지고 매고 살아가게 된다.


그런 스스로를 눈치채기 바로 직후 까지 말이다.



세상의 질서...



내가 살고 있는 캐나다는 어떤 주든 관련없이 대략 중학교  들어오기 직전까지의 아이들은 부모 또는 케어기버의 도움없이 혼자 또는 복수로 집에 한시간이든 두시간이든, 밤에든 낮에든, 밖에든 집안에든 있을 수 없다. 바쁜 부모님 아래에서 한국에서 자란 70년대생인 내 남편은 물론, 80년대 중반에 서울에서 태어난 나 조차도 캐나다 오자마자 들을때 황당해하기까지했던 사회적 규정이다. 밤낮동안 집에 있을 때는 물론, 놀이터에 나갈 때, 도서관 등 문화체육시설에 갈 때에도 중학교 학생 이상의  혼자 있는 교육을 받기전의 아이들은 모 또는 경제적 여유가 있는 집의 경우, 부모 대신 아이를 돌봐주시기로 고용된 이웃 할머니 또는 Nannies의 도움을 받아야만 한다.


참고로, 캐나다는 내니로 취직하고 몇년동안 재직시  영주권신청을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존재하는데, 가만히 보면 같은 인종이라 부모이겠구나 여기는 아이 옆 어른이 내니일 경우가 종종 있다. 이것도 캐나다에 숨은 빈부격차 중 하나, 그러나 나는 내가 겪은 외로움의 무게때문인지 왠만하면 사람을 고용하기보다는 내 스스로 내 아이들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더욱 좋았다. 내게 독같이 느껴졌던 외로움이 성인이 되어 내 아이들을 키울 때에는 내니고용으로 인한 스트레스, 갈등, 부작용 등에서 내 아이들과 나를 지킨, 되려 아이들과의 유대감을 돈독하게 해준 약이 된 셈이다.



아무튼 이 영주권을 신청에 필요한 복무기간이 5년인가 그렇게 되는데 캐나다의 고용주들은 딱 4년쓰고 이 내니들을 짤라버리기도 한다. 분명 5년의 최소기간이 필요함을 알고 있는 그들이 자신의 필요에 의해 외국인 내니를 4년씩 쓰고 짤라버린다는 캐나다 공무원의 와이프들 이야기를 들으면 여기가 내가 듣던 선진국이냐? 속속들이 알면 알수록 마음아플 일이 이리저리 널려있는, 이 곳 캐나다도 이기심을 바탕으로 하는 현실사람들이 사는 보통의 세상이다...그런 생각이 든다. 의무기간이 5년인가, 차라리 아이가 프리스쿨 가기이전의 기간인 2-3년으로 필수고용기간을 줄이면 제도상 딱 맞지 않겠는가?현실적으로 내니가 필요한 기간은 한 가정당 1-3년인데, 영주권 신청에 들어가는 최소 근무기간을 5년이라 함은,  사람들에게 영주권 줄 마음이 있음을 이야기하는 것일까?


장담하건데, 캐나다가 되었든 제 3국이 되었든, 해외살이를 어딘지 모르게 판타스틱하다 느낀다면, 그것은 아직 모든 사람이 경험하는 사이클의 초기 1-2년간의 허니문기간을 지나고 있기 때문인거다. 사회속에 들어가지도 말고, 너무 깊이 알려고 들지 않고 그냥 외국인처럼 겉핥기로만 산다면 이 허니문기간이 이민 후 모든 기간의 삶을 차지하게 만들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사람이 너무 많이 알지도 말고, 생각을 많이 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도 든다. 


영어를 잘 모르면, 세상을 보고 싶은 것만 인식하면, 실제로 캐나다에서 10년을 살든 20년을 살든, 캐나다는 천국에서 조금 모자란 천 마이너스 일국이라 생각한다며 이민이후의 삶을 주먹구구식으로 그렇게 덮어주고 사는 사람들도 실제로 있다. 캐나다 사회안에 속하며 마이크로 인종차별과 언어차별, 민족간의 갈등, 개인간의 갈등을 섬세하게 경험하며 상처받아가는 보통의 사람들보다 이들은 행복도가 훨씬 높으니 '모르는게 약이다' 라는 말이 통하는 셈이다.





다시 나의 어린시절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내가 초등학교,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 엄마가 동생 병간호로 나와 함께 계시지 않은 환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학교에서 급식이 시작되기 이전에는 섬세한 아버지께서 도시락을 싸 주시고, 늘 신선한 재료로 장을 봐서 냉장고를 채워주셔서 망정이지, 우리집이 앞에서 설명한 상황 즉, 아이가 혼자 있어야하는 상황이어서 안전에 대한 욕구가 위협받는 동시에,  먹을 것도 없고, 수도도, 난방도, 전기도 들어오지 않았다면, 화장실도 갖추지 못했다면, 나는 안전에 대한 욕구 이전의 생존에 대한 욕구또한 위협받았을지도 모르겠다.


예전 한국이 어려웠던 시절에, 아이들을 많이 낳고, 부모님은 늘 Unavailable하며 형제들끼리 끼니를 굶던 시절에 태어나신분들이 느꼈을 생존에 대한 위협. 우리와 같지 않은 환경안에서 나름대로의 생존전략으로서 강인한 마음가짐으로, 부푼 자의식으로 무장했던 분들을, 대뜸 나르시시스트라며 서양의 이론을 대입하고, 그들을 칼질하고, 심판하는 것은 그들의 가정환경과 사회적 분위기, 자원등을 고려하지 않은 그야말로 단무지같은 행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몇해전부터 유행하던 유튜브의 나르시시스트 손절하기 등의 동영상등이 떠오른다. 동영상 제작자도, 심리이론을 무작정 수입해 가져오는 경우에도, 모두 환경이라는 "거시적분석'을 전제로, 그 밑에 속한 '개인'의 성품과 성향, 가치관을 평가하는 것이 옳은 수순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든다.


문제는 심리학이라는 학문이, 어느나라에서나 사회적, 거시적 분석을 전제로 하고 있지 않다는 한계에 있다. 한 인간을 총체적으로 이해하려는 목적보다는 개인의 삶의 문제 패턴을 이해하게 한다던지 그것을 이용한 이익을 남긴다던지 다른곳에 목적이 있음을 암시하기 한다.





어릴적 그리움을 배우며 살았던 내 눈에 한국이든 캐나다이든 현재 사회는 참 매정하다. 이제는 모든 사람들이 보는 Youtube Channel들을 보아도, 관계에 대한 내 마음을 눈치챈 알고리즘들은 '사람 끊어내는법', '어딘지 모르게 묘하게 이상한 사람 단절하기', '손절하기' , '나르시시스트가 두려워하는 처세술' 뭐 그런것들로 가득하다. 사람간의 양보나 배려보다는, 어찌되었건 주변사람과 어울려 살기 보다는 내 자신을 지키라는 말로 온통 도배가 되어있다.


목사님이자 심리치료사인 Henry Cloud가 그의 저서  The Power of Others 에서 밝힌바처럼, 사람에게 받은 상처는 더욱 많은 사람들과의 의미있고 풍요로운 관계속에서 치료되고, 배우고, 성장하게 되는 건데,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상처를 바탕으로, 어쩌면 자신의 치료제가 될 수 있는 사람과의 관계를 거두절미하고 경계하고, 의심하고, 신속히 짤라버리려한다. 심지어는 '호구가 진상만든다' 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한국 사회든 이민자 사회든, 되려 진심으로 상대를 차별없이 믿어주고, 공감해주고,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람만을 골라 미워하는 피해의식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대거 존재한다는 느낌이 들 정도이다.  


진심으로 소통하고, 공감하기 보다는 상대 눈치만 살피는 가짜 세상이 되어가고 있는 것 같아 아쉽다.




참 감사한 것은 내가 겪은 어린시절에 대해 안전에 대한 위협을 느낀거라 결론내는 심리치료사의 객관적인 정의가 무색하게도, 나는 참 다행이고, 행운이고, 부모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주변에서 사랑받는 사람이라 그 시절에도 지금도 느끼며 성장하였다는 것이다.


특별히 좋은 동네에서 남보다 넓은 평수에서 명품차를 타고 살았기 때문이 아니다.


늘 나를 다른 아이들과 똑같이 믿어주고 사랑해주신 학교 선생님들이 계셨고, 깊은 이야기를 두런두런 나눌 수 있는 내 친구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자신의 아이들도 버거우실텐데, 일주일에 한번씩 내 친구 인옥이와 다금이의 어머니는 내게 반찬을 한아름 안고 오셔서 나를 먹이려 노력하셨고, 그분들의 진심은 나에게 충분히 아주 충분히 다가왔다. 어떠한 부담이나 의무감을 느낄 수 없는, 따뜻한 마음에 정갈한 반찬요리에서 느끼는 여자 어른들의 기품, 어른에 대한 존경심, 사람을 소중히 생각하는 마음을 배웠다.


아빠, 아빠가 바쁘기 전에는 항상 이쁜 딸의 편에서 지혜를 주시고, 이야기를 들어주셨는데, 동생이 아픈 후에 나와 보내는 시간이 현저히 적었어도 그래도 아빠는 늘 우리 가족을 위해 성실하신 모습이셨는데 그건 분명 사랑의 다른 표현임을 나는 그 당시에도 지금도 변치않게 느낀다. 아픈 동생을 간호하는 엄마는 얼마나 애타고 힘드셨을까, 그때는 신같았던  엄마도 알고보면 30대 초반의 어린나이였는데... 비록 나와 보낼 시간은 없어 개인적으로 아쉬운 시간이기도했지만, 엄마의 병간호에서 보여준 성실함과 몸을 내던진 간호를 내게도 같이 대입하면, 내가 내 동생처럼 아프면 나또한 그렇게 돌봐주실거라는 믿음을 무의식에 각인해내기도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주일마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내게 학교 선생님이 주실 수 없는 부드러운 리더쉽과 사교, 내가 본받을 수 있는 모범이 되는 생활을 보여주셨다. 그들의 참된 신앙, 열정적 찬양, 마음을 담은 기도,다방면의 지식과 지혜, 나눔,  자신보다는 주변을 사랑하고 진심으로 섬기는 마음은 아동기와 청소년기 나의 영과 육을 성장시켰다고 생각한다. 목사님의 설교도 좋았지만, 친교에서 나는 많은 것을 배우고, 생각하고, 경험할 수 있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랑과 자비는 엄마의 부재를 채우고도 남았으며, 이웃들의 배려와 정성은 내가 보호받고 소중한 아이라는 사실을 배우게 했다. 어떠한 결핍도, 불안도 덮어버리는 오직 위대한힘이다.


아이를 키우며, 내 자신을 재 양육하며 느끼는바, 세상의 질서를 알기전에 하나님의 질서를 먼저 체득하고 성장해 다행이라 생각한다. 세상에서 잘 사는 법을 부지런히 탐독하고, 성공 노하우를 누군가로부터 배우고 카피하는 것에서 영원한 행복, 부, 삶의 모범답안, 풍성한 마음이 오는 것이 아니라, 아이러니하게도 ' 참된 섬김'을 실천하는 방법이야 말로, 나의 마음과 몸의 배를 불려 행복하게 하고, 모든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룸을, 영광을 누림을 체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이때 가장 중요한 전제는, 댓가를 바라지 않고 행하는, 힘이 없는 약자를 향한 진심이어야한다는 것이다.


따뜻한 마음을 배운 그 시간, 그 분들께 감사하며, 나 또한 자동으로 나도모르게 경험을 실천하며, 웃을 수 있는 건, 40살이 되어가는 내가 지금도 넘어지고 깨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이자 원동력이라 확신한다.



사랑, 정성, 꾸준함이 전달하는 그 거룩한 힘의 가치를 나는 체험했기에, 반드시 진실이라 말한다.


엄마, 아빠 두분 모두, 또는 한 분이 항상 함께 할 수 없어도, 아이는 안전을 위협받으며, 자신이 보잘껏없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살아야만하는 것은 아니다. 주변사람들의 사랑과 의미있는 관심으로 아이는 따뜻함을 배울 수 있고, 충분히 몸과 마음이 충만한 아이로 잘 성장할 수 있다.


주변에 조금만 관심을 기울인다면, 가정의 다양한 사정으로 인해 어릴적 외로움을 배워버린 어린이들도 그와 동시에, 주변의 사랑을 한 가슴에 가득 담아 용기와 사랑을 실천하며 사는 그런 따순사람으로 클 수 있음을 내 삶에서 배웠다.


 겪고 넘어가야할 일이 아닌일을 겪었기에 불행한 어린시절이라 정의내리기에는 또 모든 사람들이 당연하게 받는 사랑과 보살핌 그 이상의 것을 받으며 살았기에, 나도 너도 어쩌면 우리모두는 어떤면에선 행운아들인지도 모르겠다.



P.s. 누군가는 사이비목사와 교주를 운운하며 타락한 기독교를 책망한다. 그 또한 옳다. 반드시 참된 하늘의 질서보다는 자신을 하나님으로 여겨, 사람들의 섬김을 중간에서 낚아채  이익에 복종하는 사람이 이 쪽에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아는 장로, 권사의 사회적 얼굴과 실제 얼굴이 다름을 말하며 교회다니는 부모때문에 교회가 꼴배기 싫다고 하기도한다. 선한 하나님을 배우기 이전에 교회와 하나님을 자신의 구미에 맞게 활용하는 부모님을 먼저 만나 태어나고 성장했기 때문일거다.


하지만 내가 이 글을 통해 말하고 싶은건, 신과 그를 믿는 사람은 엄연히 다른 존재라는 점이다.


어떤 종교든 마찬가지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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