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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Oct 25. 2024

여성 혐오 남편과 떠나는 신나는 이민 여행

 피는 반드시 생채기 밖으로 흘러나오게 되어있다. #여혐, #남혐

흔히들 말한다.


남자는 자신의 엄마를 보는 눈으로 세상 여자를 보고,
여자는 자신의 아빠를 보는 눈으로 세상 남자를 본다.


가슴아프다. 그러나 많은 경우 사실이다.

아들에게 첫 이성인 엄마 그리고 딸에게 첫 이성인 아빠에 대한 마음을, 사람을 비롯한 모든 동물들은, 웬만하면 그대로 투사하여 세상의 여성과 남성을 바라본다.


남편은 자신의 엄마를 혐오하던 사람이다.

처음 결혼했을 때에는 그게 싫지 않았다. 먼저 결혼한 언니들은, 어떻게 하면 남편을 시어머니 편이 아닌 자신의 편으로 만들까 골똘히 고민하며 한동안 시간을 보낸다던데, 정치질을 원체 싫어하는 나는 그럴 맘도 능력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에 비해 내가 본 시어머니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누구라도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면 거짓말도 누명씌우기도 양심하나 눈하나 깜짝 안할만큼 노련하신 분이었으니까. 다른 사람들의 남편들처럼 엄마에게 집착하지 않고, 엄마의 편보다는 새 부인인 내 편에서 나의 팔과 다리 그리고 날개가 되어 주는 남편을 마다할 새신부는 없다. 


나는 한국집에 시집간 한국 며느리, 그것도 아들 둘 뿐인 집의 맏며느리라지만, 결혼 후 한국며느리로서 기능이 주어진 시간은 고작 2년이었다. 결혼한지 얼마 되지 않은  바로 캐나다 이민을 왔기 때문이다. 고작 그 2년 중 9개월 반은 큰 아이 임신 중이었는데, 입덧이 아주 심해 임신 직전달 그러니까 9개월동안 물한잔, 냉장고 냄새 한번 맡기도 고역스럽게 그렇게 임신 기간을 보냈다. 임신기간이 제일 편하고 육아기간이 힘들다지만, 나의 경우에는 임신기간이 육아보다 10배는 더 힘들었으니까...


일화를 몇가지 터 놓자면, 임신 3개월 차, 그날도 아침일찍 토하고, 코 끝을 찌르는 역한 치약으로 이를 닦고, 헛구역질을 하며 칫솔질을 한 후, 남편 사촌 결혼식에 참석하겠다고 창백한 얼굴을 이끌고 그곳에 갔는데,  일가 친척이 다 모인 앞에서 특유의 쩌렁한 목소리로 기강을 잡겠다고 나에게 으름장을 놓고 무안하게 만들기 좋아했던 시어머니, 임신 8개월차에 시아버지 첫번째 기일이라시며 본인은 음식할줄 하나도 모르니, 자신의 남편의 기일상임에도 슬픔이라는 감정의 기여나 육신의 기여 없이 결혼한지 채 1년도 안된 만삭의 며느리에게 일가친척들 식사와 제삿상을 나 혼자 차리라 호통을 있는대로 쳐서 남편과 싸우던 시어머니, 신혼집인줄 알면서도 밤 10시만 되면 현관문을 꽝꽝꽝 치며 우리를 시도때도 없이 깨워대시던 분... 생각해보면 시어머니의 잘못된 계산이었다. 뭐든 상황을 보아가며 적당해야지, 그렇게 사람들 앞에서 으름장을 놓고 무안을 주면, 완벽하게 사람을 얼게 만들고, 남편이 뜨악해 새며느리인 나를 철저히 보호하게 만들어버리면 , 안타깝게도 만인들에게 본인 스스로가 거부되어짐이 타당해져버린다. 살살 달래면서 자기 사람 만드는 편보다 못한 결론이 만들어졌으니 말이다. 조절되지 않는 그분의 일방적임은 내 권리나 입장이 상대에게 짓밟혔다는 정의를 넘어서, 그분의 이상함에 타당성을 부여해버리는 안타까운 결론이 만들어져버리니 말이다.


외할머니 손에서 큰남편은 가뜩이나 자신에게 무신경하고 종교활동에만 열을 올리던 엄마, 그러면서도 아들의 성취는 자신의 크레딧으로 주변의 자랑거리로 삼고 살며, 본인의 자존감을 급히 채우려하는, 아빠가 번 돈을 갈취하고, 동거하던 자신의 친정엄마의 가정살림살이와 육아력을 갈취하고, 교회에서도 남의 봉사를 갈취하고 지위와 온갖 상은 자신이 탐하는, 무조건 남이 뼈빠지게 정성들여 차려놓은 밥상위에 숟가락만 올리려는 엄마에 대한 배반감과 분노가 있었는데, 내 친척 오빠와 이모들을 보아도, 내 엄마와 나의 관계를 보아도, 친구들과 그들의 엄마들의 관계를 보아도 한번도 기존에 보지 못한 부자관계 도식이었다.  


연애 때, 남편의 엄마에 대한 서운함을 듣고 있으면서도 나는 생각했다. 사실 그건 진짜 시어머니의 모습이 아니라, 어린시절의 켜켜이 쌓여온, 왜곡되고 자기중심적인 시각에 의한 남편만의 시각이겠거니... 남편의 엄마에 대한 서운한 마음을 반은 신뢰하지만 반은 어머니를 믿어야지 했는데, 2년간 부자관계를 지켜보며 남편의 말에도 일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표현이 좀 그래도,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은 간절하겠지, 마음만은 뜨끈뜨끈 하시겠지 했는데... 사람중에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능력이 있는 사람도 있고, 없는 사람도 있음을 그 분을 보며 알게 되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인격체로서의 존중이 없고, 사랑과 희생의 마음이 탑재되지 않았으며, 모두 자신 위주로 해석하고 자신의 목적을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마음 차고 냉혹한 사람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람이 변할거라는 기대로 내 눈과 귀를 덮고, 지극정성을 다할 필요는 없는거구나, 모두에게나 당연할 거라 전제했던 '약한 자를 사랑하는 마음, 자신의 그리고 세상의 아이들을 사랑하는 마음' 그런 것들이 모든 사람에게 공평하게 주어지는 것은 아님을 직접 목격했다.


물론 시어머니 또한 어린시절 상처로 뒤덮혀서 자신이 낳은 아이를 비롯한 이 세상이, 20세 이상의 한 성인으로서 짊어져야하는 가정을 비롯한 사회 안에서의 '정당한' 의무가 보이지 않는 것일 수도 있고, 그런 것 없이도 특유의 성격이나 본인 특유의 인지적 도식에 기인한 특성일 수 있겠지만, 가타부타 원인을 따질 것도 없이 결론적으로 내 남편은 딸내 가족과 함께 살며 손자를 양육해주신 외할머니가 안 계셨다면 정말로 사랑을 배우지 못한 성인으로 클 수밖에 없었을거 맘대로 칼질하는 바이며, 그렇기에 마음이 아프다. 


예닐곱살때부터 자기 입속 풀칠은 스스로 해야했기에 어린아이로서 보호는 받지 못하고 인권이 유린당한 채, 약하고 힘없는 어린아이로서 성인들 세상에서 일하고 착취당하고 그에 무력했던 스스로를 인정하지 못하고, 육십이 되어서도 칠십이 되어서도 자아통합이 안되고 주변인에게 나르시시스트로서 인장이 찍힌 채, 거리유지만 당하고 있으니 나이를 먹어도 항상 여섯살짜리 그 분 스스로 가장 외로울 것 이다.


자신의 인권이 맘껏 유린당했던 어린시절이 있었으니 어른이 된지 50년도 지난 이제까지도 각종 의무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 달콤한 피해의식을 장착했기 때문에, 그것에서 벗어나려  노력할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달콤한 피해의식.

피해의식으로 젖어있는 사람은 타인과 진심어린 감정소통을 할 수가 없다. 진심을 토로하는 상대의 마음에 피해의식 하나만으로 온갖 의무에서 자유롭게 사는 이기적인 자신의 행태를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정당하게 진심을 토로해도 콧방귀도 뀌지 않고 착취적 태도를 유지하는 이유이다.


그 안에서 살며 남편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소통이 되지 않는 엄마에게 언제나 애정의 목마름을 느끼고 차가움을 느끼고 거절을 경험했다지.



예전엔 혹시 외할머니의 존재가 시어머니와 내 남편의 정서적 애착을 블로킹했나 오해했지만, 그건 시어머니의 일방적인 명목상 이유일 뿐, 사실 같진 않다. 아무리 자신의 친정엄마가 주양육자로서 손자인 내 남편을 전적으로 봐 주셨다 하더라도, 내 자식을 향한 뜨끈한 사랑이 있었다면 자식이 그 점을 모를리 없다. 손자에게 평생 마음의 자산인, 사랑의 맛을 그나마 맛보게 해주신 남편의 외할머니께 이제는 진심으로 감사하다.





엄마에 대한 분노가 채 해소되지 않은 채, 나와 결혼했고, 엄마와 함께 사는 유년기, 청소년기, 그리고 결혼 시점까지 그분의 기대와 바람에 잡아먹힌 스스로를 살리려 이민을 선택했으며, 캐나다라는 나라에 와 아내인 나 그리고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는 남편...


채 치료되지 않은 상처받은 마음은 생채기 바깥으로 삐져나와 나와 내 가족들, 그리고 티비에 나오는 자신과 관련없는 여자들, 지나다니는 행인여자들, 우리 가족과 멀든 가깝든 관련있는 여자들, 아이들 학교 선생님들 그 모두를 인식하는데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되는데,


정작 생각의 주체인 자기자신은 그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고, 자신과 아무 관계없고, 의미 없는 여자에 대한 불만이 그 사람들과의 관련성과 상관없이 모두 제 몸체만한 특대사이즈의 검정 쓰레기봉투로 한다발씩이다. 모두 내 옆에 앉아 내가 듣는 귓가에서 자신의 입밖으로 배출된다.


그런 사람과 같이 사는 나는 쓰레기 봉투에서 나는 썩은내에 오염되어 살아야하며, 그 악취를 맡고 있는 나는, 사실은 그 냄새나는 쓰레기 봉투가 각 여자들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신의 엄마에 대한 분노, 미움, 경멸하는 마음을 부정하고, 각 상대에게 투사한 데서 나오는 가짜마음이라는것을 안다.


해결법은, 스스로 엄마를 혐오하고, 미워하는 마음이 있음을 받아들이면 된다. 엄마에게서 배워버린 달콤한 피해의식적 삶의 태도를 받아들이면 된다. 달콤한 피해의식적 태도의 이득을 포기하게 되는 것이 안타까워 엄마를 미워하기보다 닮아버린 스스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지만, 배우자인 내가 먼저 알아채어버리면 된다. 내가 결정하면 된다. 칼자루는 내게 있다.


남편과 같이 살거라면 엄마를 인식하게 하면 된다.내가 아닌 다른 사람의 속내와  포기했을 때의 이익과 견주었을때의 지속가능성을 스스로 냉엄히 따져 선택하도록 하면 된다.


남편이 나와 살기로 했다면, 몇일간 슬퍼하고, 토하고, 누워있다가 하늘구름 걷히듯 그 분노도 쓰윽 시간순서대로 떠나가도록 기다려주면 될 일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이 전에 없이 바르게 보이며, 왜곡이 잡히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조건 왜곡된 생각들은 맘밖으로, 글이든 입으로든 내뿜어야한다.

그렇게 내 뿜으면, 내 속에 숨어 있던 마음이 나 자신에게 보이고, 인식의 왜곡을 스스로가 인식하게 되며, 죄송스럽게도 엄마 외의 온갖 여자들에게 본의아니게 폐 끼치고 살았던 스스로에 대한, 상대에 대한 참회의 마음이 들며, 그때부터는 스스로의 인생이 좀더 경쾌해진다.


문제는 남편 스스로 그 상처를 '마주하기' 두렵다는 것이다.

아니 사실은 자신의 달콤한 피해의식으로 인한 이득을 쉬이 포기하지 못함에 있다. 그 이기적 태도를 놓아버리는 순간, 그와 반대 급부 즉, 어린아이때 나의 아픔과 스스로가 동일시 되기 때문이다.


마땅히 애정받아야할 엄마에게 겪어야했던 차가운 외면, 외로움, 고독, 비참함, 불통, 내 말을 들어주지 않는 상대에 대한 답답함, 원망.... 등을 겪는대신 가해자가 되기로 하는 그이다.




남자들을 싫어하는 여자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세상 남자들을 싫어하는 마음 한구석에는 사실 자신의 아빠에 대한 혐오가 숨어있다. 진실이다.

그 마음을 인정하면, 자유로워지는데, 마치 자신을 집어 삼킬 것 같은, 아빠를 미워하는 마음, 괴수같은 마음이 스스로에게 들킬까 자꾸만 자꾸만 깊이깊이 감출수록 미움, 경멸, 혐오의 마음이 점점점 확성기를 타고 마음안팎으로 퍼져 나와 내 주변 세상을, 내가 남편을 보는 시각을, 내가 주변 남자들을 보는 시각을 오염시킨다. 별의별 명목을 다 댄다. 사회적 불평등이요, 남녀차별이요, 남자꼰대요, 유교사상이요...


이성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경험이 많거나, 뭐든 하나라도 나보다 알고 있는 동성들이 괜히 싫고 부담스러운 여자들의 본질에는 사실 엄마와의 문제가 있는 경우가 많다. 나이 어린 동성의 여자가 자꾸만 애틋하게 보이며, 도와주고 싶은데에는 자신의 여동생과의 애틋한 감정이 투사되는 경우이다. 반대로 그들이 얄밉다면, 케이장녀로서 본인만 희생하고 자신의 희생을 당연한듯 받아먹기만 하는 동생들에 대한 피해의식이 숨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케이 장남으로서 가족 구성원의 헌신을 받으며 살았던 남자는 결혼해서도 가족들이 자신을 향해 무한대로 희생하며 사는 것이 기본값이라도 되는것처럼 늘 가족에게 불만이 많다. 스스로가 원가족에게 받은 배려는 기억하지 못하고, 부담스러운 기대만 책임감의 무거운 감정만 지속되기 때문이다. 이렇듯 우리의 현재 인간관계 대부분의 중심축에는 과거 초기 관계 도식이 존재한다. 그것들이 내 인생을 내 맘대로 좌지우지 하고 있다. 그것들에게서 내 삶의 주권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내 스스로부터 과거 관계도식의 패턴을 인지해야한다. 그래야 자유로울 수 있다.


감정, 그것의 실체를 꺼내놓고 보면 괴수가 아니라 탁구공만한 마음임을 알게되며, 생각보다 시시하게 감정이 사라짐에 놀라게 될 것이다.  예닐곱살 때 어린이로서 감당하기 힘들었던 감정일 뿐이지, 이제 성인이 된 내가 그 감정 그대로 인식하다보면, 이제는 한손으로도 나를 번쩍 안아올려 나를 무력하게 만든 그 괴수가 아니라, 내가 흔쾌히 들어올려 맘대로 베어물 것 같은 '사과 한 알' 같은 감정임을, 내가 더 이상 어린시절 그 자리에 그 크기에서 벗어났음을 진심으로 인식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그렇게 나 자신의 힘과 주체성을 인식하게 되며, 진짜 어른의 의미를 알게 되고, 진정한 자아독립임을 이루게 된다.


자신이 사춘기 상태 아니 그 전에서 얼마전까지 머물러 있었음을 이제 진짜 성인이 되었음을 말이다.


상처가 꽉 잡고 있던 우리의 마음 나이는 생각보다 아주아주 어릴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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