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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후루츠캔디 Nov 09. 2024

결혼만은 하지 말아해야해

얌전한 고양이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라고 하더라고라고라고라

결혼 전, 삶의 어느순간부터 캔디는 비혼주의자였다.


그것이 초등학교때인지 중학교때인지 고등학교때부터였는지 모르겠지만, 확실히 성인이 된 후 대학 무렵에는 당연히 나에게 '결혼은' 하면 안되는 것이었다. 예뻐야하고, 공부도 잘해야하고, 사회적으로도 어느정도 내 자리가 있어야하고, 사회가 전반적으로 합의한 거의 모든 충분조건에는 동의했지만 결혼만큼은 예외였다.


임신, 육아, 출산 그리고 집안일, 경력단절 때문에 여자가 손해볼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라는, 여성의 인권과 자아실현이라는... 세상 사람들의 일반적인 이유와는 상관 없는 나만의 이유가 존재했다. 누가 들어도 타당할 것 같아 나는 이제 구차한 속사정  말하기도 물린다.


"나 이제 결혼해, 나 임신했어, 나 출산해"


1년안에 이 쓰리콤보를 내게 전해 들었던, 초등학교때부터 절친인 아이에게 전해들은 말 : "캔디 너는 당연히 결혼도 안하고 애도 안낳을 줄 알았는데, 이야 의외인데?"


10대가 되기 전부터 켜켜이 축적된 내 집안 사정을 아는 아이에게 그 말을 들으니 어찌 좀 기분이 묘했다. 먼저 결혼하고, 임신하고, 출산한다는 내게 행복하라는건지 불행하라는건지. 지 뭔데 내가 결혼을 할지 말지 짐작했다는거냐. 내가 너에게 준 어떤 큐가 내 비혼의사를 결정했다는 거냐. 그녀의 반응은 어쩐지 내 어린시절부터의 행적이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정복된 것 같아 기분이 아주 살짝 더러웠다. 기분이 더러워짐은 그녀의 말이 사실임을 반증한다.


친구말은 옆으로 빼놓고도 나는 내 안에서도 비혼주의자였다. 도무지 왜 같이 사나 모를, 그것도 부부라고 맺어져 20년넘게 같이 살고 있던 내 부모를 봐도, 더 자세히, 혼자 힘으로 씩씩하게 자수성가하고 살다 채 10살도 안된 작은 딸의 백혈병과 맞닥들인 아빠의 인생을 봐도, 모든 사실을 부정하려 밖으로만 도는 배우자를 가진 한 남자의 결혼생활을 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래저래 이남자 저남자에게 입 막음 돈을 오백만원, 천만원씩 갖다바치려 남의 호주머니를 채워주며 사는 배우자를 가진 아빠를 봐도, 주 9회 술독에 빠져사는 같은 여자인 엄마를 봐도, 그래서 매번 죽도록 쳐 맞는 엄마를 봐도, 딸 둘 있는 집의 막내딸인, 가장 어리고, 맑고, 천진하고, 친구라곤 하나없니 언니밖에 의존할줄 모르던 귀여웠던 동생이 백혈병에 걸려 시름시름 앓고, 집에서 하는거라곤 의욕없이 티비 앞에만 붙어있는걸 봐도, 싸우지 않으면 다행이지 늘 냉랭한 집안 분위기를 봐도, 그 안에서 스무살이 되면 반드시 이 집단을 탈출하리라 맘먹고 오랫동안 버티고 있는 큰 딸인 불쌍한 나 자신을 봐도 결혼따위는 해서는 안되는 짓이었다.


아무리 맘에 드는 남자가 있어도 결혼은 하지 말아야지.



사람은 하지 말아야지, 하지말아야지 하는 마음이 들수록 동시에 '해야해' 해야해' 라는 마음이 든다더니 사실인가보다. 


결혼 생각도 없다는 것이 전공을 정할 때 아동학을 선택한 이유는 무엇이고, 여대를 졸업했다면 누구나 공감할...매번 선배들의 성화에 못이겨 썩고 병든 마음일지언정 청순한 흰티와 청바지안에 숨기고 미팅을 나가줘야했으며, 가는 곳곳마다 의도치 않게 상대들의 마음이 돌팔매질 당했었는지, 한두번 더 연락을 받아주어야했다.


난 당신들의 마음을 받아줄 자원이 없습니다.



미팅에 나간거야 나갔지만, 애초에 이성친구를 사귀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던 나는 대학 초기 2-3년을 매번 서울에 있는 또래 남자구경만 하는 계기로 삼았던 것 같다. 


겉보이는것과 달리 난, 솔직히 쑥맥이라 남자랑 어떤 대화를 어떻게 나눠야할지도 몰랐다. 여중, 여고, 여대 출신이기도 했고, 집안에도 남자형제 하나 없이 하나뿐인 여동생이 다였다. 겉으로는 어떻게 보일지언정, 그것이 무색하게 실상은 남자 눈 하나도 제대로 못 마주치는 쑥맥이 바로 캔디 나였다.


선배들이 그런것을 헤아려줄 일 없었다. 그래서 아마도 2005년에 대학을 들어간 서울소재 중상위권 이상 대학생이었던 남자 중 대다수는 아마도 내 얼굴을 단 한번 이상 봤을거라 가정해도 무방할 정도로 매주 토요일 점심과 저녁시간, 심할 때에는 일주일에 5번, 대학로와 종로 강남역 민토, 카페, 피잣집 얼굴도장만 찍고 다녔다.


공허했고 시시했다. 또래 남자애들이 모두 다 애기 같았다. 여성을 보고 말못하고 멍해진 눈을 하는 그 애기들에게 일부러 좌절감을 주고, 내 근처에 오지 못하도록 사정거리 밖으로 내 쫓았다.


놀랍게도 나는 그때까지 남자경험이라곤 손도 한번 잡아보지 못한 상태였다. 키스나 섹스도 영화에서나 볼 일이지 내 사정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비' 헌팅관련장소에서 매번 전화번호를 물어보고, 추근덕대고, 귀찮게 하는 사람들 때문에 공부할때에도 왠만하면 도서관이나 카페에 갈 수 없었고, 밖에서 기가 빨리는대신 집에서 공부를 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자꾸만 쳐다보고 번호를 물어보고 예쁘다고 하는 사람들, 그로인한 커플들의 싸움을 보며 기가 빨리기 싫어 항상 우리집앞에 서는 버스노선 하나를 잡아 이어폰과 책을 들고, 그 노선안에서 왠만한 문화생활과 의식주, 학교생활, 아르바이트를 해결했다. 이때의 경험을 두고, 내 측근은 나를 '선택적 자폐'라 말한다.


그러던 내가 대학 3학년 2학기 11월 그러니까 이 글을 쓰고 있는 늦가을 쯤 삼대삼 미팅을 했고, 상대들은 우리보다 7-8살 많은 대학생들이었다. 남자들이 먼저 약속장소에 들어가 앉아 우리들을 기다리고 있었고, 우리 여자 셋은 줄줄이 얼굴을 붉히며 약속장소 안으로 들어갔다. 혜화동 대학로에 있는 이탈리안 핏자 가게였다. 저 멀리 100m 복도에서, 그러니까 그들이 앉아있는 테이블과 전혀 상관 없는 위치, 2층짜리 건물 2층 계단위에 올라가자마자 나는 3명 중 한명의 남자와 눈을 마주했고, 그 남자는 지금까지 미팅에서 본 아이들처럼 내가 풍기는 무언가에 뻑이 가신 모양이라는걸 나는 이미 눈치챘었다. 싫다, 기빨린다 하면서도 또 그런 시선을 유난히도 무의식중에 쫓고 의식했던 나다. 8인용 식탁, 그러니까 사이드에 3명, 그에 마주앉은 3자리는 우리 자리가되었고, 가장의 자리에 앉아 있던 주선자는 우리가 모두 착석하자 자리를 비켜주었던거 같다. 무언가에 홀린듯한 그분 앞에 앉아 그분이 내 접시에 담아주는 스파게티와 피자를 아기같이 받아먹었다.그 분의 손이 덜덜 떨리는 것을 애써 못본척했다.


그분은 마음이 파들파들 떨렸고, 나는 멀쩡했을까? 그럴리가...생전 처음 발라본 파운데이션이 얼굴에 안착될 이 없이 둥둥 떠다녔고, 빨리 자리가 파하기만을 기다렸다.


집에 오는 택시 안에서 아까 내 앞에 앉아있던 남자를 포함한 두 명의 남자에게 에프터신청을 받았고, 나는 그 둘중 좀더 신실해 보이는 사람에게 답장을 보냈다.


몇번의 만남을 했고, 나는 그 남자가 내 미래 배우자가 될지도 모른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 남자와 외국을 떠돌며 양가 부모와 절연하며 우리의 아이들을 낳고 사는 그림이 연이어 머릿속에 환상처럼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미래가 보이는 사람인가? 그 미래에 대한 환상이 생생하다. 벌써 20년이 다 되어가는 이야기인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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