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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중과 상연] 작품은 두 여자가 소녀부터 40대 여성이 될 때 까지의 그녀들 자신과 주변인간의 관계를 다루는 작품이다.
드라마는 은중과 상연을 두 축으로 삼아, 각각 김상학과 천상학이라는 두 인물을 날개처럼 배치하고, 두 엄마를 대칭적으로 배치함으로써 입체적인 구도를 형성한다. 두 인물에게 천상학에 대한 감정이 투사된 인물 김상학은, 천상학의 반사체처럼 보일 수 있으나, 그 존재로 인해 극의 전체 구도가 입체성을 획득한다. 각자 엄마의 모습을 한 쪽은 따뜻하고, 다른 한 쪽은 이성적으로 구사한 것도 드라마라는 프레임안의 인물구성이라는 특징이자 한계로 읽혔다. 예를 들면, 극 중 상연의 엄마가 은중을 따로 음료수를 건네며 위로하는 장면은, 은중에게는 따뜻한 돌봄으로, 시청자에게는 교사의 자기 투사와 이성적 행위로 읽힌다. 자신의 어린시절을 현재 살고 있는 제자 은중을 향한 자기투사이자, 모든아이들을 공평하게 돌봐야하는 교사로서의 이성적 행위였음은, 정작 상연과의 모녀관계에서 딸에게 보여지는 엄마로서의 모습을 유추하게 한다.
여성의 양분화된 페르소나를 다루는 작품을 이전에도 재미있게 본 적이 있다. [이브의 모든 것]이라는 김소연, 채림, 한재석 주연의 드라마 말이다. 다른점이라함은, 전작이 시청률을 겨냥해 비교적 자극적이고 단선적인 대비를 강조했다면, 이 [은중과 상연]은 단 한번의 도파민 자극 없이, 섬세한 감정의 전개만으로도 둘 사이의 미묘한 갈등과 긴장을 담아내었다는 점이다. 이 작품은 '잔잔한 심리극의 세련됨'이라는 새로운 지편을 열며, 시청자로 하여금 긴장과 몰입을 유지하게 한다. 김상학과 류은중의 베드신에서 마저도 성관계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고, 오직 '은중아, 나 너 너무 좋아' 라는 김상학의 대사와 시선은 격정적인 성행위가 전달하는 이상의 상학의 진심을 시청자로 하여금 상상하게 한다.어차피 베드신도 묘사이다. 몸으로 하는 묘사를 말로 하는 묘사로 치환함이 신선했다.
머리카락은 억압된 무의식을 상징한다. 두 주인공의 헤어스타일을 따라가며 10대, 20대, 30대 그리고 40대의 각 주인공을 추적하는 것도 재미있었다. 20대에는 은중, 그리고 30대에는 상연이의 로맨스가 극중에서 표현되는데 그 때마다 각 주인공의 헤어스타일이 긴머리였음은 흥미로웠다. 서로의 헤어스타일이 한 시대에서 다른 시대로 옮겨질 때마다 상대의 헤어스타일로 바뀜은 내가 갖지못한 특징을 가진 서로를 동경했음을 의미하다가 둘이 화해하는 40대에 동일한 헤어스타일을 연출하는건 은근한 상징적 의미를 가졌다.
친구관계란 무얼까, 작품에서 표현하듯 우리가 아직 자기 중심성을 마음의 중심에 둔 열살 무렵에 맺는 친구관계란 내가 갖고 싶은 부분을 상대에게 찾아내며 서로를 가까이 두는 것으로 만족하는 행위일지도 모르겠다. 어린시절 아버지를 사고로 잃었지만, 따뜻한 엄마의 보호와 외가식구들의 지지는 은중의 자기보호적 욕구를 충족시켰으며(외삼촌과 엄마가 함께 운영하는 떡집) 이에 자긍심이라든지, 사회적 효능감 등 더 높은 욕구도전의 기회를 만들어낸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내 생각과 느낌을 존중하는 법을 주변인들로부터 배우며 성장할 수 있게 하는 발판이 마련된다. 가족 외의 관계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자신의 의견과 솔직한 감정을 남에게 공격적이지 않고, 부드럽고 당당하게 표현할 줄 알게 만든다. 자신을 지키는 법을 배운 이는, 다른 사람의 권리가 소중한 줄도 안다.
반면, 어릴때부터 변화무쌍한 가정환경 안에서 감정적소통이 막힌 상연은 그녀의 독창적이고 자유로운 영혼의 밀도만큼의 상처를 받으며 성장한다. 그나마 존재하던 물질적 보호가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차단되는 시기를 맞이하자, 그녀의 신체적 안전을 지키고 있던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터져버리고, 경제적 파탄, 부모의 이혼, 오빠의 죽음은 복합적 트라우마로 작용하여, 10-20대 젊다못해 어린 여성이 자신의 삶에 주체가 되기 힘들만큼, 감당이 어려운 '거대한 불안'을 남긴다. 2002년 월드컵 응원의 시끄러운 함성속에서야 자신의 내적 어려움을 숨겨버린, 그제야 스스로를 잔뜩 얼려 껍데기속에 들어간 모습을 보자. 유일하게 의존할 수 있던 대상인 엄마마저 정신과 육체가 병들며, 어린 딸을 지켜줘야하는 친아버지는 그녀의 집과 회사 안까지 찾아와 그녀가 애써 스스로의 힘으로 쌓아올리기 시작한 물질적, 사회적 울타리마저 위협하니 절박한 심정으로 죽은 오빠의 그림자에나마 의존하고자 오빠의 이름과 같고, 같은 취미를 공유하는 김상학에게 집착하게 된다. 이런 상황에서는 자신을 지키고자 커리어에 과열하게 되는데, 이 강렬함은 결국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을 파국으로 이끌게 된다. 마음속 산란을 잊고자, 사람들과 위험한 관계를 맺게 되고, 업무윤리등 사회적 규칙에 도전하게 되며, 살얼음판 위의 인생을 살게된다. 그 불안의 크기만큼 주변이 보이지 않으니, 꾸준히 자신의 편이 되어주는 사람의 소중함을 알아볼 리 없다. 스스로의 안전경계가 무너진 터라, 생각과 감정을 주변에 자연스럽게 전달할 리도 만무하며, 타인의 영역을 침범하는 것도 서슴치 않는다.
인간은 무의식적으로도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려 노력하지만, 은중은 상연의 행동과 심리를 이해할 단초를 찾기 어렵다. 엄마의 온정적이고 평범한 보호를 받고 성장한 은중은 상연의 행동과 심정의 원인을 도무지 어림잡을 턱이없다. 거기에서 상연은 대의명분이라는 이름하에 은중을 조금이나마 이해하지만, 은중은 상연을 평생 이해할 수없는 구도가 만들어진다.
타인의 고통을 체감하지 못하는 이들은 흔히 "누구나 다 그만큼은 힘들게 산다" 라는 말로 상대의 고통을 단순화한다. 마치 고통의 무게와 크기를 아는척한다. 쓰는 단어와 표현법은 다르지만 속뜻은 모두 같다. 어려움에 헤매이고 있는 상대에게 뭘 꼭 해주지 않아도 된다. 상대의 어려움을 저런 말들로, 온몸으로 부정하기보다는 그냥 내가 너에게 해 줄 수 없는 것이 없음을 받아들이면 된다. 그리고 죄책감없이 각자 길을 가면 된다. 이렇게 가까운 사람들과도 소통할 수 없으며, 자신을 지키는 데 써야 할 마지막 남은 에너지도 탈진해버려 꼭 그것을 귀신같이 알아보고 이용하고 괴롭히려는 몇몇 사람들 속에서, 트라우마 외상 안의 사람이 견뎌내어야만 하는 현실은 가혹하기만하다.
자신을 둘러싼 상황 뿐 아니라, 스스로의 몸도 큰 병에 걸려 안락사를 선택하는 상연의 결정을 머리로 이해할 수 있었다. 세상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웠을까, 그 무거운 세상의 무게가 몸 속 깊이 스며들어 고통을 겪는 상연을 보며 죽음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안락사 선택은 자신에 대한 권리인가. 태어나는 것도 내 맘대로가 아니었는데, 죽는 것도 내 맘대로 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내 생각인 반면, 넥플릭스가 축소한 세상은 안락사제도를 활성화 할 것 같은 기색을 보인다. 변화하는 현실에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이며, 어떤 태도를 취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의 친구관계에 대해 반추해본다. 나는 그들에게 은중같은 사람이었을까, 상연같은 사람이었을까. 양분화는 불가능할 듯하다. 어떤 면에서는 은중같고, 또 어떤 면에서는 상연같았겠지. 아니다, 둘 다 아니다. 나는 그냥 후르츠캔디이다.
40년의 인생을 함께 꾸려갔던 둘은, 어떤 면에서는 서로를 힘들게 했지만, 극 중 대사처럼 둘은 촘촘한 감정의 시간 결 안에서 서로를 빚었다. 붙었다 떨어졌다 하면서도 40년의 세월을 함께 채워나간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우정을 넘어선 깊은 인연이자 귀중한 선물로 남는다.
시즌 2가 나올 수 있을까? 마지막 회에서 상연은 은중에게 자신의 일기장 위치를 알려준다. 그걸로 뭐든 하라며... [은중과 상연]은 은중의 시각에서 보는 세상을 썼지만, 상연의 시각에서 보는 세상을 다루는 시즌 2가 써지길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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