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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by 자두와두 Mar 12. 2025

 온갖 장식물과 화려한 조명, 맨 꼭대기에는 커다란 별을 매달고 있는 커다란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다. 트리 아래에는 각기 다른 색으로 빛나는 선물 상자가 즐비하다. 크기도, 모양도, 색깔도 다른 이 선물 상자는 누군가 자신을 가져가 주기를 바라는 듯, 이리저리 흩어져 있으면서도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 사람이 선물 상자 사이로 들어와서 상자를 하나씩 바라본다. 신중히 고민하다 결심했는지 거침없는 손길로 한쪽에서 선물 상자를 가져와 세운다. 그런데 가져오던 선물 상자를 중간에 세워두고는, 반대편으로 가서 다른 선물 상자를 또 가져온다. 그 사람은 두 선물 상자를 마주 세우고는 동시에 상자의 뚜껑을 열어 상자의 입구가 서로를 바라보게 한다.


“이 상자에서 네가 나오는 거야?”

“그렇지. 반대쪽에선 소개팅하는 사람이 나오는 거고. 뚜껑 딱 열기 전까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는 거지 그러니까.”

“뭘 또 그렇게까지 말하냐. 소개팅 가기 전에 뭐 이것저것 물어보고 하잖아?”

“직업이나 사진 같은 거? 그건 상자야 상자. 상자가 비싼가, 큰가, 예쁜가, 비싼가 이런 거. 안에서 뭐가 나올지는 알 수가 없다고. 한두 번 했을 때는 나도 당연히 설레고 좋았지. 그런데 하다 보니까 그냥 뽑기 기계가 뽑은 물건 같은 기분이야, 이제는.”

“그래도 뽑히긴 하네. 안 뽑히는 상자도 얼마나 많겠어. 트리 밑에 쌓여만 가는.”

“알아. 아니까 소개팅 들어오는 거 다 나가고 있잖아.”


 태민이 속이 상한 듯 맥주잔을 들어 얼마 남지 않은 술을 비운다. 앞에 앉은 형주는 자연스럽게 다음 맥주를 주문하고, 그 옆의 찬영은 태민과 함께 남은 잔을 비운다. 안주를 뒤적이는 태민에게 찬영이 물었다.


“그래서 오늘 들고 온 썰은 뭐야? 이제 조금 기대하게 돼. 세상엔 얼마나 다양한 사람이 있는 걸까.”

“맞아. 저번에 그 헬스에 미친 사람은 진짜 충격이었다. 그 사람이랑 좀 잘해보지. 진짜 그렇게 사는지, 네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게 말한 건지 봐야 했는데.”

“아 하루에 운동 세 번 한다는 사람? 무조건 거짓말이지. 너무 시그널이잖아. 난 너 마음에 안 드니까 그만하고 일어나자, 이거지.”

“아니 그렇게 사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는 거 아니야?”

“이형주 그 눈치로 결혼 어떻게 했냐. 진짜 제수씨한테 잘해라 너는.”

“야, 너보단 잘해. 지는 맨날 술이나 먹고 들어가면서.”


 태민에게 한 질문을 시작으로 형주와 찬영이 둘이서 이야기를 주고받다 이내 티격태격하기 시작한다. 태민은 익숙하다는 듯 가운데서 둘의 이야기를 듣다가 새로 나온 맥주를 받아 또 한 모금 마신다.

 30대 중반에 들어선 태민은 친한 선배들과 친구 대부분이 가정을 꾸렸고 후배들의 청첩장을 받기 시작했다. 회사 이야기, 돈 이야기, 주변 사람의 연애 이야기나 옛날이야기로 가득하던 사회 초년생 시절의 술자리와 달리 이제는 유부남끼리 통하는 이야기, 가정에서 울고 웃는 이야기가 주를 이룬다. 그 사이 태민은 조금 다른 방향으로 인생을 꾸려가면서 만족스러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유부남들이 가정 이야기를 하며 짓는 진심 가득한 표정을 보며 결혼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 사람들에 비해 자신이 너무 단조로운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 이후로 태민은 주변 사람을 통해 적극적으로 소개팅을 하고 있지만, 아직 좋은 결과를 얻지는 못하고 있었다. 오늘의 술자리도 오늘 점심에 있었던 소개팅이 결실을 보지 못하고 끝나 친구들과 만난 자리였다.


“그래서 이번엔 왜 잘 안됐는데? 여자분이 개발자라고 했나?”

“이번엔 별일 없었고, 그냥 공허하게 얘기하다가 끝났어. 둘 다 서로 관심은 없고, 머릿속에 주선해 준 사람이랑 지킬 의리만 남아있는 느낌? 요새는 거의 이렇게 되더라. 적당히 얘기 좀 하다가 끝나.”

“이 정도면 너도 문제가 있는 거 아닐까. 네가 맘에 들었다는 사람을 본 적이 없는데? 눈이 거의 정수리 위에 안테나에 꼭대기에 달렸으니까 그렇지.”

“얘 한 명 있었잖아. 마음에 들었다는 사람.”

“아 그 사람. 그래 봐 봐 그 사람 엄청나게 예뻤잖아. 그 정도는 돼야 혹한다는 거 아니야. 문제가 있다니까 박태민이.”

“그런데 또 얘기 들어보면 그럴 만하기도 하고? 쉽지 않은 사람도 많았어. 막 공장 어쩌고 한 사람도 있지 않았어?”

“와 나보다 너희가 더 잘 기억하냐, 그거를”


 덤덤한 태민과는 다르게 형주와 찬영는 신이 나서 태민의 이전 소개팅 상대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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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사회가 약간 공장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앞에 앉은 사람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태민이 눈을 크게 떴다. 방금까지 재미있게 여행 이야기를 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사회에 대한 감상을 뱉어내니 상황 파악에 시간이 걸리는 듯했다. 지연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태민의 어리둥절한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이 내뱉은 말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우리나라에 인구가 5천만 명인데, 그중에 99퍼센트는 다 똑같은 모습으로 살잖아요. 똑같이 생각하고 일하고 사는 게 꼭 공장에서 똑같은 사람을 잔뜩 찍어낸 것 같아요. 그렇지 않아요?”

“아, 뭐 그렇게 볼 수 있겠네요.”

“저는 그렇게 살기 싫어요. 그냥 만날 일 하고, 집에 가고, 일하고, 집에 가고. 그러다 죽으면 너무 허무하잖아요. 저는 죽을 때 아무런 후회도 안 하는 게 목표에요. 가보고 싶은 나라는 다 가볼 거고, 그러면서 디지털 노마드로 일도 하면서 돈도 벌고…”


 이후로 지연은 한참을 자신의 인생철학을 이야기했다. 태민은 지연의 이야기를 들으며 처음엔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자신의 신념이 확고하고, 그걸 이런 자리에서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는 게 어떻게 보면 대단하다고 느꼈다. 게다가 지연은 자신의 인생철학대로 살기 위해 어느 정도 기반을 마련한 상태였다. 프리랜서 디자이너로 어느 정도 자리를 잡고 있고, 그 수입으로 정말 다양한 취미를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야기가 길어지고 조금씩 다른 생각이 든 태민은 지연의 이야기 중에 틈을 봐서 질문을 건넸다.


“그런데 그럼 조만간 또 출국할 계획이예요?”

“네 내년 초에 치앙마이에 가 있으려고요.”

“얼마나요?”

“전 나가면 3개월은 있어요, 보통.”

“그럼…”


 소개팅은 왜 나온 것인가. 앞니까지 나온 이 질문이 다행히 입술 밖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물어보면 뭘 하겠는가. 태민은 조용히 마음을 굳혔다. 오늘의 소개팅은 커피 한 잔으로 끝이다. 그렇게 태민은 다른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고, 자리에서 일어나기에 이상하지 않을 만큼의 시간이 흘렀다.


“저희 이제 일어날까요?”

“네 식사는 생각한 곳이 있으세요?”

“아, 아뇨 제가 뒤에 일정이 있어서요. 죄송합니다.”

“네? 소개팅하는데 다른 약속을 잡고 왔어요?”

“직장인한테는 소중한 주말이잖아요. 죄송해요.”

“하, 그래 알겠어요. 일어나죠.”


 지연이 기분이 상한 채 짐을 챙기고 일어났다. 지연의 말에 태민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자신의 의도는 잘 전달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제 집에 가는 정류장까지의 어색한 시간만 잘 넘어가면 되겠다고 생각했지만, 다행히 카페 앞에서부터 길이 갈려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래도 마지막에는 성인다운 깔끔한 인사로 마무리하던 중, 지연이 한 마디를 얹었다.


“그런데 이렇게 볼 거면 소개팅은 왜 하신지 잘 모르겠네요. 조심히 가세요.”


‘그건 내가 아까 하고 싶었던 말인데.’


 여전히 속으로 생각하며 찝찝한 마음으로 태민은 집으로 돌아가 혼자 라면으로 배를 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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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진짜 왜 나왔던 걸까 소개팅은? 주선해 준 사람이 말 안 해줬어? 학교 선배였다고 했나?”

“몰라. 자기 여행 가기 전에 잠깐 놀려고 했나 보지. 안 물어봤어, 굳이.”

“그냥 물어보지. 어차피 너도 만날 마음 없었던 거 아니야?”

“알면 뭐 하냐. 마음이 콱 식어버렸는데. 이제 갈수록 뭐 하나만 안 맞으면 바로 별로야. 이래서 초반에 잘 만나서 잡아야 했는데.”

“초반에 그 운동만 하는 사람 만나지 않았냐? 두 번째냐 세 번째냐?”

“그래 그 사람이랑 운동하면 바디프로필 바로 가능하겠다. 잘 좀 해보지 그랬냐. 거절을 당하고 그래.”

“거절인 거로 확정된 거야?”

“당연하지. 네가 진짜 어지간히 싫었던 거라니까? 너 거기 가서 뭘 했길래 그렇게까지 싫어하는 거야.”

“뭘 하긴 뭘 해 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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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퇴근하고는 뭐 하세요?”


 본격적인 대화가 시작하기 위한 질문. 앞서 서로의 직장에 대한 이야기를 짧게 끝낸 태민이 조금 빨리 이 질문을 꺼냈다. IT회사에서 경리로 일한다는 현주가 직장에 대한 이야기는 별로 하고 싶지 않은 듯 대답을 짧게 끝냈기 때문이었다. 짤막한 대답에 당황한 태민은 반사적으로 자신이 주로 하던 레퍼토리를 꺼내 들었다.


“저 운동해요. 헬스.”

“아 헬스장 다니세요? PT하시는 거예요?”

“PT는 너무 비싸서, 그냥 혼자 해요.”

“그럼 어떻게 하세요? 유튜브 보고?”

“아뇨 그냥. 그냥 기구로 깔짝깔짝하는 게 다예요. 별로 열심히는 안 해요.”


 운동이라는 말에 오랜 기간 헬스, 축구, 농구에 클라이밍까지 다양한 운동을 섭렵한 태민은 눈을 반짝이며 되물었지만, 현주는 직장 이야기를 할 때만큼 흥미 없는 눈으로 몇 마디를 내뱉자 ‘운동’이라는 키워드가 둘의 대화에서 흩어졌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태민은 정신을 당황한 마음을 다잡고 물었다.


“운동 말고 쉴 때는 그럼 뭐 하세요?”
 “평소엔 그냥 집에 누워있는데. 별로 하는 건 없어요.”

“그런데 주말에는 그러면 심심하지 않아요?”

“음, 아침에 운동하고, 쉬다가 점심에도 좀 하고, 또 쉬고 저녁에도 하고 하면 별로 심심하지는 않아요.”

“세 번이나 하세요? 하루에? 주말에 그러면 쓰러지는 거 아니에요?”

“별로 열심히 안 해서 괜찮아요. 살살 조금씩 해서. 평일에도 그렇고. 아니면 그냥 휴일에도 집에만 있어요. 집에 있는 게 좋아서.”


 그래도 대화를 이끌어야 한다는 책임감에 현주의 흥미를 이끌만한 주제를 찾던 태민은, 부담과 책임을 깨끗하게 잊을 만큼 강렬한 호기심이 일었다. 이미 연애는 물 건너간 듯하고, 그건 상대방도 똑같은 마음인 듯하니 거칠 것도 없었다.


“그럼 연애할 때는 뭐 하세요? 전에 연애할 때는 뭐 하고 놀았어요?”

“그냥 같이 집에 있었는데. 그냥 집에 불러서 같이 이렇게 있었어요.”


 현주도 이제는 조금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태민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했다.


“와 어떻게, 답답하지 않아요? 저는 한 이틀만 집에 있으면 너무 나가고 싶던데. 천장이 집보다 높은 곳을 가고 싶지 않아요? 저는 하다못해 카페라도 가야 해요. 저번에는…”


 소개팅에서는 자기 이야기를 길게 하지 않는 태민이지만, 자신과 너무 다른 현주의 모습에 흥분한 나머지 자기 생각과 일상을 여과 없이 한참을 이야기했다. 혼자서 5분이 넘게 이야기한 태민의 이야기에 현주는 지금까지 이야기한 중에 가장 큰 흥미를 보였다.


“저는 태민씨가 더 신기한데요. 그렇게 다니면 안 힘들어요?”

“힘들죠. 그래도 나가고 싶잖아요.”

“그래요? 와 진짜 신기하다.”


 그렇게 서로를 신기해하며, 1시간이 채 안 되는 시간에 소개팅이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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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 이 정도면 혼자 살겠다고 할 만 한데 참 노력 많이 한다. 연애 꼭 해야겠어?”

“지들은 결혼 해놓고 나한테는 혼자 살라는 게 말이 되냐. 프사에는 오만 핑크색 다 올려놓고 서럽게 하네, 진짜.”

“아니 와이프가 올리라고 해서 한 거지 내가 했겠냐.”


 형주가 급하게 변명했다. 태민의 웃는 표정은 어느새 입가에만 남은 채 흥분하여 이야기했고, 찬영은 그런 태민을 달래주며 이야기했다.


“어쨌든 지금 되게 잘 살지 않아 너? 회사도 안정적으로 잘 다니고, 돈 꼬박꼬박 들어와서 너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잖아. 무슨 모임도 많이 다니더구만, 연애하고 결혼하면 그런 거 다 끝이다?”

“그래, 난 혼자 있어 본 적이 언제인지도 모르겠어. 군대보다 심하다 이거? 남편들이 화장실에서 그렇게 안정감을 느낀다는 게 내 얘기가 될 줄은 아예 몰랐다. 화장실에 앉아 있잖아? 내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나 싶은데, 또 조용하고 편해. 그런 공간이 없다 진짜.”

“야, 나도 그래. 사실 화장실 말고 도망갈 데도 없잖아, 맞지?”

“그게 다 복에 겨운 소리라니까. 둘 다 제수씨한테 감사하면서 살아.”


 티격태격하던 찬영과 형주가 이럴 때는 호흡이 척척 맞아 태민을 위로했지만, 태민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오히려 혼자 살아도 좋다는 위로에 더욱 속상한 마음이 들기도 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던 중 형주가 시간을 보고는 자리를 정리하려는 듯 이야기했다.


“10시 반이네 벌써. 나 들어가야겠다 이제.”

“벌써 10시 반이야? 나도 가야 해. 정리하자 그럼.”

“진짜 시간 칼같다, 유부남들. 솔로는 집에서 혼자 놀아야겠다.”

“얼마나 불쌍하냐, 30살 한참 넘어서 통금이 있잖아. 부모님도 통금 같은 거 안 하셨었는데.”


 투덜대는 형주와 찬영을 먼저 집에 보낸 후, 태민은 혼자 편의점에 들러 캔맥주와 과자 2봉지를 구매했다. 높은 오피스텔의 넓은 방이 있지만, 집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려 근처 공원에 자리를 잡고는 친구들과의 자리에서 미처 다 마시지 못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다. 밤늦게 놀러 나온 아이들을 놀아주는 아빠, 밤 산책을 나온 커플이 깜깜한 공원에 색채를 더해준다. 오늘 처음 본 사람들의 표정이, 태민은 왜인지 익숙하다고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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