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호, 너 안 나갈 거야?”
“어, 나 못 가겠어….”
“그려, 우리 구경부터 할 거니까 나올 거면 전화해. 아니면 그냥 쉬고.”
“예에….”
침대에서 미동도 하지 않던 준호가 가까스로 대답을 내뱉은 후 자세를 조금 더 편하게 바꿨다. 그런 준호를 뒤로하고 태영과 형일은 가벼운 옷차림으로 다시 숙소를 나섰다.
“일단 시내로 가?”
“그러자. 1시간이면 대충 다 둘러볼 것 같던데 여기. 그러고 장 봐서 들어가면 딱 맞을 듯.”
숙소에 도착한 세 사람은 빠르게 재정비를 마치고 계획했던 첫날의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다시 캘거리 시내로 향했다. 그 과정에서 여독을 이겨내지 못한 준호는 낙오되었지만, 형일과 태영은 씻고 나서 잠깐 쉰 것 만으로 다시 나갈 기력을 되찾았다.
“형일, 오늘 메뉴는 뭐야? 이런 것도 네가 계획하는 거 아니야?”
“그런 거야? 근데 뭐, 그냥 고기에 위스키 마시면 되겠지. 사실 위스키는 찾아본 게 있어서 가서 찾아보면 될 듯.”
“충분하네. 근데 나, 네가 여기서 하려는 거 뭔지 알 것 같아.”
“뭐야 눈치챘어? 뭔데?”
“아까 택시에서 눈치챘다. 말해도 돼?”
“아니 안돼. 김새게 하지 말자.”
잠깐 떠드는 사이, 형일과 태영은 어느새 캔모어의 중심거리에 도착했다.
캔모어는 마을이라는 말이 아주 잘 어울릴 정도로 아기자기하고 작은 동네이다. 그중에서도 식당이나 다른 인프라가 몰려있는 중심거리를 모두 둘러보는 데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조용한 거리의 양옆에는 3층을 넘지 않는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데, 모든 건물이 각자 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비슷한 듯 다른 건물들은 각각의 아기자기함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건물들이 모여있는 거리의 모습은 관광지의 활기참과 시골의 정겨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그리고 동서남북 어느 방향을 바라보아도 마을의 배경에는 로키산맥의 웅장함이 자리하고 있다. 그저 가만히 서서 고개만 돌리면, 혹은 몇 발짝만 걸어가면 마을은 매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고 매번 새로운 감상과 감동을 주었다.
태영과 형일은 이 매력적인 캔모어의 거리를 누비며, 서로 같은 감상평을 같은 말로 내뱉고 있었다.
“우와아아아….”
“이야아아아….”
아무리 많은 것이 느껴져도, 그 느낌을 표현하기 위해 필요한 말은 느껴지는 모든 것을 압축한 하나의 감탄사로 충분했다.
“야 태영, 이리로 와봐 여기 미쳤어.”
“아니 여기도 대박이야. 네가 와봐 빨리.”
“나 못 가. 미쳤다 진짜 우와….”
“의자 없냐, 의자. 나 이 자리에 망부석이 되고 싶어.”
“여기다 돗자리 깔고 술 마시면 안 되겠지? 잡혀가나?”
“한잔 하고 잡혀간다고 해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대화가 오가고 있지만 무슨 대화가 오고 갔는지는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혼이 쏙 빠진 채 감상했다. 그렇게 1시간 동안 수십 장의 사진을 찍은 태영과 형일은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목적지인 마트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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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야~ 아빠 왔다~.”
형일이 숙소로 들어오면서 말했다. 손에는 저녁거리로 사 온 음식이 가득한 커다란 장바구니가 들려있었다. 뒤이어 들어온 태영은 둔탁해 보이는 위스키병을 소중하게 품에 안고 있었다. 짐을 내려놓은 형일은 준호를 찾아 방문을 열었다.
“이눔 자식, 아빠 왔는데 나와보지도 않고!”
“어 아빠, 맛있는 거 사 왔어?”
준호는 잠에서 깬 지 시간이 제법 지났는지, 씻고 옷도 갈아입은 상태였다. 형일의 장난에 맞장구를 치던 준호는 이내 거실로 나와 장바구니의 물건들을 하나씩 꺼내 확인했다. 형일도 간단하게 손만 씻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바로 요리를 준비했다.
“오 이거 토마호크야? 너무 맛있겠다! 이건 뭐야? 이것도 립이네?”
“한번 사 와봤다. 토마호크부터 일단 먹자. 배고파 죽겠다.”
“좋아, 난 뭐부터 해야 하지. 고기랑 또 뭐 먹어? 우리?”
“샐러드랑 치즈하고, 라면도 먹자. 라면은 천천히 하고 다른 것부터 해.”
뒤이어 마찬가지로 옷을 갈아입고 나온 태영이 마지막으로 부엌을 기웃거렸다.
“난 뭐 해?”
“넌 저기 가서 예쁘게 앉아 있어.”
“안 예쁘면 어떡해?”
“노력해.”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4인용 식탁에 음식이 가득해졌다. 가운데 커다란 접시에는 제법 두꺼운 토마호크가 맛있는 갈색으로 잘 익어있고, 옆에는 두껍고 커다란 소시지 3개가 세 사람의 먹는 욕심을 대변하고 있다. 그리고 하얀색으로 둘러싸인 카망베르 치즈가 맛있게 녹은 상태로 고기 접시 왼편의 작은 그릇을 차지했다. 느끼함을 달래줄 음식으로는 초록색 샐러드와 빨간색 라면이 커다란 그릇에 가득했고, 마지막으로 고급스러운 노란색으로 반짝이는 위스키로 파티 테이블을 완성해 주었다. 잘 차려진 테이블의 귀퉁이에는 고프로가 설치되어 있었다. 한 대는 한쪽에 혼자 앉은 형일을 찍고 있었고, 한 대는 반대편에 나란히 앉은 태영과 준호를 찍고 있었다.
“시작해?”
“일단 좀 먹고 하는 건 어때. 너무 배고파.”
“맞아. 지금은 호응해 줄 수 없어.”
우선 차려진 음식부터 먹기 시작했다. 오전 시간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않은 세 사람은 보는 사람도 경쾌한 속도로 음식을 비워나갔다. 신나게 먹는 중, 어느새 각자 잔에 위스키가 채워졌고 빠르게 비워지기 시작했다. 높은 도수의 위스키인 만큼, 반 병만으로 세 사람이 기분 좋게 취하기 충분했다. 기분이 좋아진 형일이 다시금 위스키를 가득 채우고 말했다.
“자 이제 밴프의 여행 계획 발표가 있겠습니다! 집중!”
“와. 아.”
“아니 그 무미건조한 반응 뭔데.”
“응. 신경 쓰지 마. 그냥 계속 얘기해.”
형일은 담담한 반응에 굴하지 않고 자신이 계획한 투어에 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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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호는 유튜버가 될 생각에 신나 버린 형일과 태영을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봐봐 이게 영상 한두 개 이렇게 있는 채널은 뜨기 어렵다니까. 좀 많아야 해 영상이.”
“그렇긴 해. 근데 우리 열흘을 가는데, 하루에 한 편만 찍어도 열 편이잖아? 오전 오후로 하나씩 하면 더 많겠다.”
“그 안에 콘텐츠가 많아야지! 막 비싸고 고급스럽고 그런데도 가고! 고생도 막 해보고! 사고도 치고!”
“맞아. 사고도 좀 쳐야 재밌지. 맞는 말 하네 태영.”
점점 과열되는 두 사람의 이야기는 두서없이 산으로 가고 있었다. 보다 못한 준호는 말없이 앉아 혼자 여행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생각을 정리한 준호는 형일과 태영을 막아서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둘 다 조용히 해봐. 사공이 겨우 둘인데 배가 어디까지 가냐.”
“어디긴 유튜브 스타가 되러 가는 거지.”
“아니. 이대로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 일단 너, 네가 여행의 목표를 잡고 그걸 촬영하자며. 근데 지금 그 목표가 유튜브 스타가 되는 걸로 잡히지 않았냐? 연예인 병 컨셉도 아니고, 어? 고급스러운데도 가고 고생도 하는 그 컨셉은 무슨 컨셉이냐고. 그러려고 사고 치면 그 수습은 누가 하는데. 반성해 안 해.”
형일이 머쓱하게 목덜미를 긁으며 태영을 바라보았다. 덩달아 찔렸던 준호도 옆에서 숨을 죽인 채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주제와 목표를 정하고, 그대로 영상을 찍되, 영상은 여러 개가 나와야 하는 거잖아. 맞지?”
“음, 맞아. 근데 목표를 하나만 하면 영상이 많이 안 나올 것 같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생각한 건 이래. 들어봐.”
달아오른 열기가 순식간에 사그라지고 형일과 태영은 어느새 준호의 말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준호의 이야기는, 한 사람당 여행지 한 군데의 일정을 도맡아 계획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결정한 여행 계획은 4개의 여행지와 여행지별 숙박 일수, 그리고 이동 방법이다. 중요한 계획은 이미 끝났고 여행지 별로 무엇을 하고 놀 것인지 정하는 일만 남아있었다. 이 4개의 여행지 중 한 군데씩 맡아 어떤 여행을 할지 그 목표를 각자 정해보자는 것이 태영의 의견이었다.
“이러면 주제 3개가 딱 떨어지게 나오겠지. 그럼, 그거에 맞춰서 영상도 찍으면 될 거 아냐 그렇지? 여행 계획도 각자 정해와서 얘기하면 되고 얼마나 좋아.”
“근데 그럼 한 군데 남지 않아?”
“여긴 컨셉 없이도 훌륭하니까. 그냥 가도 돼.”
“그렇긴 하네. 그럼 난 찬성. 재밌을 것 같다.”
태영이 먼저 찬성표를 던졌다. 옆에 있던 형일도 딱히 반대할 이유가 없는 듯 잠시 생각을 하다가 말했다.
“그럼, 밴프는 내가 할래. 나 하고 싶은 거 있어.”
“그래. 여긴 네가 가자고 한 데니까 네가 해야지.”
“근데 하고 싶은 거 뭔데?”
“비밀이야.”
“뭘 또 비밀씩이나 되냐. 그럴 거면 나도 비밀로 할래. 아니 우리 다 비밀로 하고 전날 발표하기 어때. 그날 계획 말해주는 것도 영상으로 찍으면 그것도 분량으로 나오겠는데?”
“발표했다가 싸움 나면?”
“유튜브 각인 거지.”
마치 팀 프로젝트 회의를 빠르게 끝내고 싶은 팀원과 같은 의견이었지만, 형일과 태영의 적극적인 지지로 세 사람은 각자의 여행에 서로 동참하게 되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잠시 뒤로 미뤄진 세 사람은 긴장이 풀려 각자의 의자 등받이에 한껏 기대어 앉았다.
“근데 너 이거 계획할 시간 있어? 퇴사 지르고 이제 일 다 던진 거야?”
“몰라 되겠지.”
“우리 가서 전날 막 찾아봐야 하는 거 아니지?”
형일은 대답 없이 방긋 웃고는 화제를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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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준호와 태영의 표정에 아랑곳하지 않고 형일이 준비한 계획을 이야기했다.
“아시다시피 밴프 여행은 내일하고 모레까지 계획되어 있고요! 이 이틀 동안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길다는 이 로키산맥의 정기를 받기 위해 트레킹을 계획했습니다! 자 박수!!”
신나게 박수를 치는 형일의 앞에서 준호와 태영이 수군거렸다.
“내 말 맞지?”
“근데 사실 모를 수가 없긴 해 그렇지?”
“아니 박수 어디 갔어! 박수!”
“박수는 끝까지 들어보고 말해줄게. 자 다시 시작.”
“끝까지 말한 건데?
형일의 충격적인 발언에 두 사람은 잠시 넋을 놓은 표정을 짓더니, 이내 태영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이게 다라고? 내일 어디, 모레 어디 가서 트래킹을 하겠다. 이게?”
“그렇지? 어디 갈지는 다 정해놨지 내가 또.”
“그러니까, 이게 다라는 거지? 트래킹을 한다. 이게 이틀 치 계획 끝이다?”
“응. 이렇게 하다 보면 하루가 다 지나지 않을까?”
형일은 이야기를 마친 다음 태연하게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보았고, 태영과 준호는 황망한 표정으로 형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내 고개를 돌려 둘만 술잔을 부딪쳤다.
“나머지는 우리가 채워야 하는 거겠지?”
“그렇겠지. 힘내자, 태영.”
“왜! 너희가 안 해봐서 그렇지, 이렇게 하면 하루가 훌쩍 간다고!”
형일이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형일, 솔직히 말해보자. 회사 때문에 못 한 거지 지금? 그렇다고 하면 봐줄게.”
“아니…. 그건 아닌데….”
“아니야? 맞아야 할 텐데? 아니면 처맞을 텐데?”
“그럼 맞는 걸로 할까…? 아니, 회사 때문에 못 한….”
걱정이 앞서는 형일의 여행 계획이었지만, 늦은 시간과 다 비워버린 위스키에 이 이상의 반발이나 책망이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그저 구멍이 숭숭 뚫린 계획의 빈자리에 큰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라며 자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