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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삼 Mar 27. 2021

탐조 서스펜스

숲에 우리 말고 뭔가 있어




이 숲에 우리 말고 무언가가 있어



드르르르륵 드르르르륵

짧고 빠르게 나무를 켜는 듯한 소리가 났다. 사박사박 내 발자국 소리만 들리던 어두운 밀림. 적막감을 깨는 소리를 향해 본능적으로 주의가 집중됐다. 나는 발을 멈춘 채 오솔길 옆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수풀을 응시했다. 얼기설기 엉킨 줄기 하나를 따라가다 그림자에 푹 젖은 나뭇잎 무더기에서 시선은 갈 길을 헤맸다. 풀숲은 해독할 수 없는 문자로 가득 채워진 벽면 같았다. 나는 소리의 발원을 찾을 수 없었다. 미지의 소리는 외지인의 시선만 끌려던 작정이었는지 지켜보는 내내 침묵했다. 개운하지 않은 마음으로 발걸음을 돌리는데,

드르륵 드르르륵 단발의 소리는 더 크게. 나의 더 가까이에서 저의 존재함을 일깨웠다.



이번에야말로!

촉이 바짝 섰다. 이 녀석은 어디서 어떻게 내 앞에 나타날지 모른다. 허리춤에 묵직하게 매달린 탐사 장비의 자루와 기다란 경통으로 양 손이 옮겨갔다. 두 눈은 수풀 속을 뒤지면서도 손가락은 익숙하게 버튼과 다이얼을 조작했다. 그 녀석이 나타나면 언제든 조준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한 발 한 발 조심스럽게 떼며 수풀 가까이로 다가갔다. 일순간 시야의 사각지대에 무언가가 슥- 궤적을 그리고 사라졌다. 급히 사라진 방향으로 몸을 돌린다. 보임직 한 순간마다 이 녀석은 이 가지에서 저 가지로 자리를 옮겼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잔가지가 흔들리는 기척만 상하좌우로 들려온다. 눈과 귀, 방향감각도 잃고 정신이 어질어질하다. 그 녀석을 따라가는 나는 늘 한 수가 늦었다. 내가 보는 건 그것이 움직일 때 남기는 흐릿하고 연속적인 자취뿐이었다.

이번에도 틀렸다.




분명히 여기 있었는데?




탐조 서스펜스



탐조가로 분한 주말, 모기 기피제를 잔뜩 뿌리고 파나마의 밀림 속으로 들어갔다. 그 목적에 맞춰 행동거지도 달라졌다. 땅을 딛는 발길은 조심스럽고, 주변을 둘러보는 시선은 신중했다. 하지만 탐사가들의 준비에 때 맞춰서 모습을 나타낼 자연의 동물들이 아니다. 의지가 충천한 정도에 반비례하는 듯 새들은 낌새 한번 보이지 않고 숲은 고요했다. 오늘은 날이 아닌가. 가슴팍에 부풀어있던 기대와 의지는 지나온 길 뒤로 이따금 픽 픽 새어나갔다. 그리고 어느새 무념을 즐기며 숲길을 걷고 있었다.



그러던 그. 때. - 서프라이즈 성우의 단골 멘트. - 드르르르륵 드르르르륵. 정체 모를 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수풀 가운데를 헤치는 소리가 들린 것 보면, 분명 새일 텐데. 그 울음이 '짹짹짹' 혹은 그와 유사한 음색이 아니고 '드르륵'거린다는 것이 문득 생소하게 느껴졌다. 사실 새가 아니라면? 뭔가 위험한 존재라면?! 열대의 새의 형체를 보려고 바둥거리 동안 잠시 상상에 빠졌다.



이 새 녀석은 내 시야권을 요리조리 벗어났다. 작은 몸집, 날랜 몸놀림과 수만 년 DNA로 기록되어 전해지는 뛰어난 은신술에 어설픈 탐조가는 정신을 못 차렸다. 그런데 이거 약간 흔한 공포영화의 공식 아닌가? 우중충한 배경에 들어선 주인공이 미지의 존재에 쫓기는 위기에 처하는 플롯과 쫓기는 자의 감각을 뒤흔드는 연출기법까지 말이다. 탐조의 경우에는 오히려 미지의 새를 쫓는 쪽이지만, 쫓는 자와 피하는 자 사이의 긴박감은 그대로 전해진다. 서스펜스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살짝 들어갔다 나온 것 같다. 이번엔 클라이맥스가 아쉬운 서스펜스였다.

하지만 괜찮다. 탐조 서스펜스는 우리가 숲을 걷는 한 매 차례 다른 등장인물들과 다른 배경에서 다른 기법으로 우리를 긴장하게 할 것이다.




분명 저 어딘가 있다.




탐조 서스펜스

결말은 수만 가지



나는 결국 그 새의 정체를 카메라에 담지 못 했다. 분명 아주 작은 새였을 것이다, 나무 이파리 한 장에 가려질 정도로. 덤불 그늘 속에서 활동하는 걸 보면 조심성이 엄청 많은 친구다. 그렇다 해도 정말 가까이에 있었는데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걸 보면, 갈색이나 검은색 털을 가진 평범한 외모의 새일 수도 있다. 그래도 그의 울음소리만큼은 (아직은) 기억하니, 다음번엔 안면까지 트도록 하자.



우리는 회귀점을 돌아서 다시 입구로 돌아가다 또 다른 깜짝 만남을 가졌다. 그때, 무슨 주제였던가. 분명 시시한 논쟁이 시작되려던 차였다. 대화의 서막, 내 첫 대사가 끝나기도 전에 우리는 동시에 우워, 깜짝이야. 혼잣말에 가까운 고함을 질렀다. 나무 가지에 나란히 앉은 새빨간 깃털이 대번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빨간 배의 깃털은 초록천지에서 사람의 눈을 사로잡을 수밖에 없었다. 덩굴이나 높은 관목이 없이 비교적 성성한 나무 숲 사이로 정오의 햇살이 밝게 비쳤다. 탐조를 위한 완벽한 환경이었다.   




붉은 배가 인상적인 Black-taild Trogon




어떤 새는 기를 쓰고 피하더니, 이렇게 사람 안 가리는 새도 다 있다. 게다가 이 커플, 쌍으로 천연덕스럽다. 그들은 다정하게 앉아서 무엇을 보는지 한 방향을 지긋이 바라보고 있었다. 암컷은 제 짝을 향해 부리를 까악거리자 수컷 새도 시선을 맞췄다. 그러다 부스럭거리는 기척에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우리를 쳐다봤다. 그들 눈에는 인간 커플을 신기해 보일지도 모른다. 사이좋은 새 커플이 내게 한 마디 하는 것 같았다.

왜, 뭔데? 뭐 그런 걸로 실랑이하려는 겨~ 우릴 봐. 부부는 말여, 같은 곳을 바라보는 거여. 

나와 두두는 땅에 엉덩이를 파묻고 앉아서 카메라를 올려 들었다. 논쟁의 서막은 커튼을 닫고, 목구멍으로 쏙 빨려 들어갔다. 사진을 찍는 동안 머릿속에서도 싹 사라졌다.



입은 닫고 감각은 열자. 숲에는 무언가가 있다. 지구 상에 존중받아야 할 어여쁘고 연약한 존재들이 있다. 복잡한 세상살이에 굳고 무뎌진 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짜릿함이 있다. 나는 마음속으로 새로운 소원 한 가지를 품었다. 언젠가 꼭 작은 새들이 몸을 숨길, 가지 많은 나무를 심겠다.







(귀여우니 공유하는) 새 더하기 + 골든 칼라드 마나킨







이 새는 짝을 부르며 턱의 깃이 솟으며 딱딱 마우스가 딸깍 대는 소리를 냈다.

골든 칼라 마나킨은 암컷을 유혹하려 나뭇가지를 오가며 춤을 춘다.

두두가 이 영상을 보더니 본인이 새가 아니길 다행이란다.

춤 못 추면 장가도 못 가는 좐인한 새들의 세계.







https://youtu.be/3JrP_N9tqd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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