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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랑삼 Apr 01. 2021

고층 공포증 vs 저층 공포증

칠레에서 파나마로 이사하면 생기는 일



고층 공포증이 있었다.



고소 공포증도 아니고, 고층 공포증?

맘대로 이름 붙인 공포증고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 나는 수직 공간, 건물 ,특히 주거용 빌딩을 보면 마음이 불안하다. 발꼬락이 간지럽다. 파나마 시티에 막 도착한 나는 해안 따라 솟구친 고층건물들을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선득다.

이 고층에 대한 불안증은 남미의 한 나라에서 시작됐다. 지금 사는 이곳 파나마와 그차이에 따라서 삶과 사고방식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생각하면 우습기도 하다.



파나마에 둥지 틀기 전, 우리는 일 년 남짓한 기간 동안 칠레 산티아고에서 살았다. 불의 고리를 따라서 기이이일다란 국토를 가진 칠레. 짐작하듯 내 고층 공포증은 칠레의 지진을 경험하면서부터였다. 칠레는 정말이지, 자잘한 진동 일상처럼 대지를 흔들고 지나갔다. 그 땅에서 날씨 예보를 챙길 필요가 전혀 없었던 데 반해, 지진 레코드 애플리케이션은 수시로 열어서 확인했다. 노이로제가 생기려니 가끔 지나는 어지러움증마저도 지진과 혼동했다. 감각마저 못 미더워 앱으로 실상황을 확인하던 것이다.




낮고 단단하게 생긴 칠레의 아파트




안데스의 눈은 여름에도 남아있었는데




진동이 느껴지거나 공간이 흔들리는 게 보일 때마다 '얼음'이 되어 굳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쫙 지났다. 아찔했다. 어서 진동이 가시길 바랄 뿐이었다. 지진에 큰 소리를 지르고 놀라는 사람들은 그 땅에 적응 못한 외국인들뿐이었다. 칠레노들은 '진정해, 이 정도는 지진 아니고, 진동이야.' 라며 칠레식 표현으로 고쳐줬다. 그들은 진도 4 정도의 흔들림은 '떼레모또(지진)' 취급도 하지 않았다. 그러면서 얄궂게도 천장에 포물선을 그리며 움직이는 조명을 가리켰다.



그때 우리집은 이십층 건물의 8층이었다. 입주하는 날, 집주인은 뒤틀려 아귀가 맞지 않는 새시와 문틀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떼레모토, 떼레모토'를 연발했다. 솔직히 나는 그녀가 집 하자의 핑계를 자연재해로 돌린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내 얕은 판단을 돌이켰다. 땅의 진동은 강바람 같은 자연적 현상과 같았다. 우린 각자 다른 방에 있다가도 움직임이 느껴지면 방 밖으로 튀어나와 지진이 맞는지 확인했다. 이거 지진 맞지? 혹은 굳은 얼굴로 지진이다. 



하지만 시간이 가며 점차 반응도 점점 무뎌졌다. 어느 정도의 흔들림으로는 하던 일을 멈추지 않았다. , 지금 지진, 왜 그래? 아마추어같이 2015년 9월, 8.3 강도의 지진이 칠레 해안을 쳤을 때 300미터 높이의 산티아고 코스타네라 센터의 꼭대기가 좌우로 수 미터를 움직였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부엌의 제대로 닫히지 않는 문짝을 움직일 때마다 크고 작은 지진들을 버텨낸 이 집을 헤아리게 됐다. 나는 8층의 우리집을 아주 좋아하게 됐다.




칠레의 내진설계의 집약체, 코스타네라 센터




칠레 산티아고 풍경





종으로 횡으로

파나마만과 시티의 대비



그리고 파나마시티. 고요하게 펼쳐진 파나마만의 경계를 따라 솟아있는 고층 건물을 비행기 창밖으로 내다봤다. 중남미 대륙에도 이렇게 과시적인 도시가 다 있네. 파나마 땅에 발을 딛고 숙소가 있던 코스타델에스테 지역에 도착했다. 바다 산책로를 걸으며 꼭대기가 보이지 않는 빌딩들을 바라봤다. 높이에 압도당한 건지 다른 삶의 방식에 호기심 자극된 건지 모르게 시선이 끌려 들어갔다. 야자나무와 트인 트인 바다로 애써 시선을 돌렸다. 이곳의 마천루는 빽빽하게 들어찬 서울 도심과는 달랐다. 여백이 넘쳤다. 빌딩의 장벽 반대편으로는 끝없이 내달리는 태평양이, 하늘이 펼쳐져 있다.



※ '라틴아메리카의 가장 높은 빌딩 101선' 중 40퍼센트는 파나마시티에 있다. 그리고 그 빌딩들의 대부분이 상업용이 아닌 주거용 건물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또한 위에 언급한 칠레의 코스타네라 센터는 이 순위 차트에서 두 번째로 가장 높은 건물에 랭크되어 있다.

https://es.wikipedia.org/wiki/Anexo:Edificios_m%C3%A1s_altos_de_Am%C3%A9rica_Latina


코스타델에스테의 마천루 By 이랑삼




여기는 지진 안 나나요?

첫 집을 구할 때, 부동산 중개인에게 물었다. 그녀는 절대로. 나지 않는다고 확언을 했다. 그들이 보여주는 집들은 모두 기본적으로 40층이 넘었고, 해안가에 위치했다. 칠레적 세계관이 파나마까지 딸려왔다. 지진이라도 나면? 쓰나미 걱정도 해야 하나? 살집을 구하는 것치곤 심각한 수준까지 고민이 이르렀다. 우버를 타고 지나온 건설 현장들을 떠올랐다. 외벽은 벽돌로 쌓고, 건물 안의 뼈대들은 높이에 비해 너무 얇아 보였다. 내진설계는 되어있나요? 굳이 물어보지 않았다. 단지 복덕방 에이전트에게 나는 높은 을 아주 싫어한다고 손사래를 쳤다.



여러 집을 구경한 끝에 나는 건너 건물 틈으로 바다가 살짝 보이고, 서쪽 창가에 넉넉한 스튜디오 공간이 있는 집을 정했다. 층수도 딱 적당했다. 6층. 한국으로 치면 플란타 바하(Planta Baja, 콘시어지가 있는 층)를 포함해 8층이었다. 하지만 저층 선호가 내 절대적이고 최우선적인 취향은 아닌 것을 뼈저리게 깨닫게 된다. 환경에 따라 선호도 바뀌는 것이었더랬다.




골목골목마다 보이는 공사현장, 2018




나, 위로 올라갈래



대형 캐리어 두 대만 돌돌 끌고 들어온 이사 첫날밤. 우리는 칠레에서처럼 모든 창문을 열어두고 잠에 들었다. 더운 나라지만 자연풍이 꽤 선선하니 굳이 에어컨을 켤 필요가 없다.

그리고 맞이한 첫 아침에, 아, 망했다. 

새 집에서 행복한 꿈 꾸라던 친정 엄마의 축언과 다르게 눈도 뜨기 전에 처음으로 든 생각은 너무도 비관적이었다. 파나마시티의 아침은 무자비했다. 열어둔 창문으로 이보다 더 적나라할 수는 없을 도시 소음이 침입해들었다. 서쪽 창가에서 보이는 작은 포장도로가 문제였다. 현지 사정을 모르는 내 눈에 '기껏해야 동네 주민이 통행하는 1.5차선 도로'로 여겼던 그것의 날모습이 드러났다. 오래된 차, 배려 없는 차, 산업용 덤프트럭이 소음을 질질 끌며 오고 갔으며, 매연은 덤이었다.



나는 미련하게 버텼다. 보증금을 버리고서라도 뛰쳐나왔어야 했다. 하지만 계약기간 1년을 힘겹게 보내고 우리는 그 집을 나왔다. 그 집에서 겪었던 갖은 에피소드들은 말줄임으로 대신한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셋에 감사한다. 그래도 거기 집주인은 참 좋았더랬지 하하..




보기만 한다면 괜찮았을 서쪽 창밖 풍경이었죠





파나마시티의 로열층,

여기도 아닌가 보오



파나마시티의 두 번째 집은 확실하게 조용한 동네에서 찾았다. 우린 시티의 계획지구인 코스타델에스테로 갔다. 인도와 차도도 널찍하게 구획되고, 빌딩은 많지만 실제 주거 밀집도도 낮은 편이었다. 우리는 비행기에서 보이던 어느 고층건물의 11층에 자리 잡았다. 한국으로 치면 13층이니 로열층이지 않냐고 부모님들께 영상통화로 자랑했다. 우리는 기대한 것처럼 2년 반 동안 적당한 도시 소음과 새소리로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분명 도시의 어디선가 지독한 소음과 폐기물이 넘쳐날 텐데, 내 귀와 눈에만 안 보이고 안 들리니 세상이 이렇게 평화로울 수가 없었다.




격리 중인 어느 날의 코스타델에스테, 11층 집 테라스에서

 



팬데믹으로 록다운된 코스타델에스테는 적막해졌다. 일상의 소음이 쏙 사라지니 고요함으로 귀가 먹먹했다. 그렇게 계속 평온한 아침을 맞을 줄 알았던 11층 우리 집은 근래 들어 '굉음으로 여는 아침 ver.2'에 돌입했다. 뉴노멀이 시작되자 기다렸던 것처럼 아파트 옆 작은 공터로 공사차량과 인부들이 드나들었다. 테니스장이 있던 그곳엔 이따금 한 가족이 내려와 느린 속도로 공을 주고받던 게 다였다. 그럼 그렇지, 금쪽같은 땅에서 공만 튀길 리 없었다.

이렇게 또 하나 배웁니다. 파나마에서 집 구하기 팁 2. 공터 옆으로 이사 가지 말라. 땅주인은 공터를 꽁으로 남겨두지 않을 것이다.



4월, 우린 파나마에에서의 세 번째 집으로 이사를 간다. 다시 여러 집을 보러 다니고, 나도 지금 사는 집을 손님들에게 보여준다. 파나마시티에서 처음 집을 보러 다닐 때의 모습이 장면처럼 스쳐갔다. 손으로 뒷목을 받치고 빌딩의 저어어 높은 꼭대기를 올려다보며 섬찟함에 몸을 털어대던 나는, 이제 아파트 아래의 공사장에서 날리는 먼지를 보며 다른 의미로 뒷목을 잡고 있다. 파나마의 로열층, 8층도 아니오, 13층도 아니었다. 조금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야 집이 주는 온전한 휴식을 보장받을 수 있으려나 보다. 도대체 저 높은 곳에 어떻게 사나 궁금해하던 내가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간다. 내 고층 공포증은 어디로 갔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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