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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쥬한량 Oct 24. 2020

경험은 젓가락질? 그리고 직관 쌓기

5. 쓸모없는 경험이란 없다

경험은 젓가락질? 그리고 직관 쌓기

저는 경영학부를 나왔습니다만, 같은 대학 출신 절친 중 한 명은 현재 경찰이 되어 있습니다.

그 친구는 항상 후회 어린 말을 합니다. 이렇게 경찰이 될 줄 알았다면, 처음부터 경찰대학으로 진학해서 부임할 때부터 높은 직급으로 들어갈 걸 그랬다고요. (그러면서 그때 들어간 등록금을 너무 아까워합니다.)


물론 그 마음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경영대에서 배웠던 여러 가지 지식과 경찰대학을 다녔다면 미처 익히지 못했을 경험들이 그 친구의 성과에 담겼을 것 같습니다. 송곳처럼 드러나진 않더라도, 친구가 일을 더 잘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을 거라고 생각해요.



경험은 젓가락질?


저는 어릴 때부터 호기심이 많고 이것저것 시도해보고자 하는 욕심이 많아서, 언제나 부모님께 질타를 들었습니다. 게다가 뭔갈 시작한 다음에 오래 끌고 가질 못했기 때문에 더 싫어하셨죠. 

제가 지금까지 어딘가(학원 같은 곳)에 등록해서 무언가를 배운(단순 일일 체험 제외) 목록은 아래와 같습니다.



피아노, 미술, 한문, 서예, 웅변, 작곡, 양장, 발레, 코딩(온라인), 방송 아카데미(시나리오 작법), 보컬, 요리(한식), 꽃꽂이, 번역

태권도, 수영, 요가, 필라테스, 복싱, 국궁, 크로스핏, 라켓볼, 테니스, 폴댄스, 승마, 드래곤보트



피아노는 사실 그 길로 갈 거라고 생각한 분야였어서 10년 넘게 배웠습니다만, 나머지 것들은 대부분 3개월 전후의 수강기간으로 배운 것들입니다.


들인 돈과 시간에 비하면, 제가 실제로 체득한 것들은 상당히 사소한 수준들일 겁니다. 

'정말 너에게 도움이 되었다면 어느에서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지 증명해봐!'라고 누가 말하면, 불가능한 일일지도 몰라요.


하지만 서른 살을 넘어가면서, 어떤 일을 할 때마다, 어떤 상황에 마주할 때마다 마치 데자뷔처럼 제가 배웠던 것들, 경험했던 것들이 소중하게 다가올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깨닫게 되었죠.


그 시간들이 헛되지 않았구나.



어설프지만, 경험과 제가 했던 일과의 관계를 한번 정리해 봤습니다.



자율 문집 만들기

초등학교(국민학교), 중학교 시절, 친구들과 동화, 동시, 짧은 소설들을 모아서 자율 문집을 만들어 팔았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름의 크라우드 펀딩이었네요; 제본을 하지는 못할 상황이었기 때문에 필사한 원고를 주문받은 수량에 맞춰 페이지를 복사해서 스테이플러로 찍어서 만들었습니다.

↦ 이 경험은 제가 작년에 독립출판으로 추리소설인 <나는 연쇄살인자와 결혼했다>를 출간할 수 있었던 모태가 가 되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에너지와 호기심, 경험에서 말이죠.



학생회 활동

고등학교 시절, 저는 학업보다는 친구들과 어울리거나 이벤트를 만들고 이끄는 일에 관심이 더 많았습니다. 그래서 학생회 활동도 1학년 때부터 시작했죠. 학생회 활동으로 진행되는 일들 중, 1년에 한 번 진행하는 축제가 나름의 가장 큰 행사였는데, 생각보다 꽤 많은 부분(예산, 업체 계약, 프로그램 구성, 행사 진행 등)에 학생회의 자율권이 보장되어 있던 상황이라, 어린 나이에 생각지도 못했던 많은 일들을 해볼 수 있었습니다. 

↦ 이 경험은 제가 온라인/디지털 직무자로 주요 커리어를 쌓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에서 필요시 여러 형태로 서포팅과 리딩을 할 수 있는 토대가 되었습니다. 특히 어느 곳에서보다 한 사람에게 다양한 역량을 요구하는 NGO에서는 더 도움이 많이 되는 역량이었죠.



한국아마추어만화세상(Kacl) 자원봉사

저는 원래 대학생 때까지는 '만화판'에서 일하는 게 꿈이었습니다. 만화책으로 한글을 떼고(쿨럭;) 만화가 고행석 님의 작품을 좋아하는 아버지의 영향으로 언제나 제 곁에 만화가 있었기 때문이었죠. 제가 직접 그리고도 싶었지만, 몇 번의 시도 끝에 만화가가 되기엔 제 실력이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만화가게 사장님이라도 되고 싶었습니다(그래서 경영대에 진학했다는 웃긴 이야기...). 그러다 우연히 카클(Kacl)의 대표님 인터뷰를 신문에서 보게 되었고, 그곳에 자원봉사자로 합류하게 되었죠. 그때가 막 대한민국에서 www가 태동하던 시기라서, 다른 사람들에 비해 조금은 빠르게 웹서비스에 대해 익히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습니다.

↦ 이 경험은 현재의 제 커리어의 가장 큰 초석이 되었습니다. 아마추어 작가들의 원고를 스캐닝하고 파일 변환해서 업로드하던 자원봉사로 시작했지만, 후에 '뉴스란'의 운영자가 되면서 작가 인터뷰, 행사 인터뷰 등 다양한 업무로 확장했습니다. 더불어 기본적인 웹사이트 기획/개발/운영에 대한 이해를 갖추게 되면서, 후에 Daum 만화로 이직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모교 대학의 연구지원팀

제가 Daum 만화에서 본격적인 커리어를 시작하기 전, 잠시 모교 대학의 연구지원팀에서 계약직으로 일한 적도 있습니다. 성향과 맞지 않는 일이라 초반에 엄청 고생했었습니다. 그때 스트레스로 살이 너무 빠져서 제가 기억하는 최하 몸무게를 찍기도 했죠. 하지만 그곳에서 일하면서 연구개발비 운용 시스템에 대해 이해하고 간단한 회계 장부 처리하는 방법, 관련 용어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지불해야 하는 심리적 대가는 컸지만(제 커리어 인생에서 가장 실수도 많았고, 사건 사고가 있었던 시절입니다;), 지나고 나니 그것도 다 저에게 도움이 되는 경험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 이 경험은 적지만 인생 전반적으로 사회의 시스템을 이해하는 계기가 되었달까요. 후에 세금계산서나 세금신고, 정산 등의 업무에 대해 겁을 내지 않게 되었습니다.



Daum 만화 기획/운영

온라인 커리어의 본격적인 시작이었습니다. 저는 다행히 대학 때 교양필수로 드림위버를 이용해서 웹사이트를 만들어 본 경험이 있었고(모교 커리큘럼 찬양합니다) 카클에서 자원봉사를 하면서 익힌 경험이 있었기에, 큰 무리 없이 업무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기존의 작업들이 사이트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정도였다면, 이곳에서는 콘텐츠 마케팅, 캠페인 프로모션, 매출관리 및 정산 처리 등을 진행하면서, 제가 실제 매출을 끌어올려보는 희열과 좋아하는 작품들이 인기를 끌 때의 재미를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더불어, 간혹 진행되는 오프라인 이벤트/행사를 통해서도 그 분야에 대한 호기심을 충족할 수 있었죠.

↦ 이 경험은 대형 포털에서 많은 사람들과 조직, 시스템에 맞춰 일하면서 체득할 수 있는 지식을 쌓게 해 주었습니다. 이후, 근무하던 본부가 Contents Provider의 성격으로 분사하면서, 다른 포털에 만화를 공급/유통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이때의 작업을 진행하면서 직/간접적으로 SI나 에이전시의 방식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인크루트(씨올 cxiol, 채용전문 검색엔진) 기획

잠시 프리랜서 기획자로 합류했던 곳입니다. 기존에 포털 플랫폼에서 콘텐츠 서비스만 하다가 검색 Vertical Service를 경험할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길지 않은 기간이었지만(4개월), 데이터와 메타데이터에 대한 이해, SEO, 검색 프로세스 및 검색 엔진에 대한 지식을 작게나마 쌓을 수 있었습니다.

↦ 이 경험은 디지털 기반의 플랫폼 기획과 운영에서 상당히 많은 부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데이터와 검색은 디지털 플랫폼에서는 떼려고 해도 뗄 수 없는 기본이고, 정보데이터가 많아질수록 적합한 검색 결과와 개인화된 매칭 데이터의 필요성은 갈수록 커지니까요.



KTH(Allstar, 게임 포털) 기획

게임을 좋아하는 만큼 게임회사에서도 꼭 한번 일해보고 싶었습니다. 그전에도 이직의 기회가 있을 때 몇 군데 도전해보기도 했습니다만, 저와 인연이 닿은 곳은 KTH였습니다. 사실 이전까지 저는 온라인 보드게임 위주로 게임을 해왔기 때문에 여기에서 일하면서 비로소 게임 시장에서의 실질적인 영향력을 가진 게임 장르와 형태들을 본격적으로 접할 수 있었습니다. (강제적으로 게임을 해야 하는 아주 묘한 상황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 이 경험은 클라이언트 게임과 게임 시장에 대한 이해는 물론, 제가 NGO로 넘어가서 게이미피케이션 작업물을 만들고 마케팅하는 데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말라리아 모기장의 필요성을 강조한 플래시 게임 내부 총괄 PM
아프리카 빨간염소 보내기 캠페인 홍보를 위한 게임 어플리케이션 내부 개발 PM
아프리카 빨간 염소 보내기 캠페인 홍보를 위한 페이스북 애플리케이션 내부 PM
크라우드 펀딩 기부 플랫폼 흑기사 기부레이스 총괄 PM



세이브더칠드런(국제구호개발 NGO)

여기선 맡았던 직무가 너무 다양했어서 나열하기 조금 힘드네요. 시작은 온라인팀의 웹서비스 기획 운영 및 디지털 마케팅 담당자로 입사했고, 여러 팀과 직무를 거쳐 마케팅 전략 팀장으로 최종 퇴사를 했습니다. NGO 특성상 일반 회사(저의 경우에는 IT회사 위주)와는 달리, 자신의 주 직무 외에도 정말 다양한 일을 처리해야했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종사하던 사업 분야도 완전히 바뀌게 되었던 상황이라, 입사 후 일주일 가량 지났을 때 제 부장님께서 적응은 할 만한 지 물었을 때 답했던 대답이 아직도 생각납니다. 

"제가 전혀 모르던 분야에, 간혹 영어까지 사용하는 환경이다 보니, 3개 국어를 하면서 일하는 기분입니다."라고 답했었거든요.

심지어 담당자가 자주 바뀌는 일이 많아서(직무 전문 담당자가 부재했던 상황에서는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프로젝트를 맡으니까), 제가 온라인 플랫폼을 맡은 후 1년이 지나는 시점에서도 제가 존재도 몰랐던 웹페이지가 나타나곤 했습니다. 

하지만 규모가 커서 다양한 일을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환경이다 보니, 수년에 걸쳐 진행되는 대규모 캠페인의 기획이라든가, 광고 제작, 온오프라인 통합 광고 진행(옥외-디지털 플랫폼-DRTV), 캠페인 애플리케이션, 게임 제작, 오프라인 행사 기획/운영, 굿즈 제작에 이르기까지 상당히 많은 부분을 망라해서 일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기존에 제가 쌓았던 경험과 지식들을 가장 많이, 잘 활용할 수 있었던 곳일 겁니다.

↦ 그리고 이곳에서의 경험은, 제가 프리랜서를 하더라도 굶어 죽진 않고 먹고살 수 있겠다는 확신을 심어주었습니다. 다양한 경험들이 어느 정도의 결과물로 나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시간이었죠.




이상, 제 미력한 경험에 비추어 쌓이는 경험이 어떻게 업무 수행(혹은 삶)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한번 정리해봤습니다.


저는 경험은 젓가락질과 비슷하다고 생각해요. 우리가 젓가락질을 할 수 있는 방법을 알게 되면, 집는 게 무엇이든 먹을 수 있습니다. 반찬을 집기 위해 배웠지만, 국수를, 파스타를, 밥알을, 심지어 작은 조까지 집어먹을 수 있게 되니까요.




경험치로 직관(인튜이션 Intuition)이 생긴다. 


간혹 인튜이션(Intuition: 직관)과 인사이트(Insight: 통찰력)를 헷갈리는 분들을 볼 수가 있는데, 저는 엄연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직관은 경험치로 쌓게 되는 감각입니다. 우리가 무슨 일이나 작업을 반복적으로 하다 보면 비슷한 상황에서 특별한 논리 근거 없이도 흐름을 읽을 수 있고 결과를 예측할 수 있습니다. 단순한 예로 들자면, 우리가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을 때, 주머니의 위치를 일일이 확인하면서 손 넣을 자리를 찾지 않습니다. 그간 많은 바지를 입어보고 그 위치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있을 만한 위치에 손을 가져다 대서 바지 주머니의 입구에 밀어 넣는 거죠. 


반면 통찰력은 철저히 논리적 근거에 의해서 상황을 파악하고 중요한 요점들을 뽑아내는 이성적 접근입니다. 바지 주머니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위치에 손을 가져다 댔는데, 입구를 찾을 수 없다면 근처를 더듬거리거나 눈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통계적으로 바지 주머니는 대부분 그곳에 위치해있기 때문이죠. 그렇게 숨어있는 바지 주머니의 입구를 찾아내는 게 통찰력이라고 생각합니다.


쌓인 경험은 직관과 통찰력을 모두 증대시킬 수 있지만, 후자는 좀 더 논리적 접근을 해야 하고 추가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기 때문에, 전자인 직관 쪽이 더 경험치와 비례되게 움직일 겁니다.

직관은 어느 정도 결과치를 예상할 수 있게 하기 때문에, 작업의 초기 단계에도 많은 도움을 줍니다. 내가 그것을 할 수 있을지, 하면 어떤 결과까지 예상할 수 있을지에 대한 밑그림을 먼저 그려볼 수 있어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 과한 욕심을 내거나, 말도 안 되는 결과(뻥!)를 장담하지 않을 수 있어요.




+ 하지만 간혹 세상엔 천재들이 등장합니다. =_=


얼마 전 SNS에 떠돌던 아래 글을 보았습니다.


이누야사 작가 타카하시 루미코 씨가 인터뷰에서 한 말입니다.


타카하시 루미코 씨의 말도 맞습니다. 루미코 씨는 직접 경험은 해보지 않았지만, 글과 그림으로 세상을 배웠고, 이를 활용해서 만화를 그렸죠. 


하지만 이 또한 간접경험이 아닐지요?


공감능력이 뛰어난 사람들은 간접경험만으로도 충분히 다른 사람보다 더 경험적 자산을 축적할 수 있겠죠.

반면, 직접경험은 가성비는 낮더라도 지속력은 간접경험보다 훨씬 긴 자산이 될 거예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오랜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백문이 불여일견. (百聞不如一見)

백 번 들어도 한 번 직접 보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죠.


바로 '직접 경험'의 중요성을 이야기한 말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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