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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May 25. 2020

행진하는 청춘 - <잉투기>

그 어떤 잉여들과 때때로 자기개발서에 관하여

기성세대는 다음 세대의 행동양식을 설명하는 어휘를 갖고 있지 못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유의 말은 가장 기만적인 어휘이고 연대나 공동체의 가치를 운위하기에는 기성세대도 그 말의 진정성을 설득할 꼴값들을 하고 있지 못하다. 돌이켜보면 젊은 시절에는 다 무기력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었지만 할 수 있는 게 있다고 믿었을 뿐이다. 그게 이상적인 가치든, 세속적인 가치든 어쨌든 미래의 내가 실현할 수 있는 가치라고 믿었을 것이다. 오늘날의 젊은 세대에게는 상당수가 어떤 것도 불가능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라고 추측할 수 있을 따름이다"


김영진, 씨네 21, <바보도 괴물도 아니라면>



 “자네는 꿈이 뭔가?”     

 

 살면서 우리를 당혹하게 하는 몇 가지 질문들이 있다. 이를 테면, “이번 기말고사는 잘 봤니?”, “취직은 했니?”, “결혼은 언제 하니?”, “애는 언제 낳을 거니?” 다정스러운 표정과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동반한 저 질문 속에 포함된 ‘기말고사’, ‘취직’, ‘결혼’, ‘출산’을 우리는 수행해내지 못했고 그 질문은 반성을 촉구한다.

 

 이런 질문들 중에서도 백미이자 알파요, 오메가인 질문은 바로 이것이다. “자네는 꿈이 뭔가?”. 일단 이 질문은 너무도 많은 함의를 가졌으면서도 단순히 ‘꿈’ 이라는 한 음절로 단순화 시켜버린 통에 우리에게 올바른 답지를 고를 가능성을 거의 원천봉쇄 한다. 이루고자 하는 사상적, 신념적 성취인지, 장래희망인지, 직업인지, 경제적 수준인지, 아니라면 저 닿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어떤 초월적인 바람인지(미스코리아 들이 늘 외치곤 하던 ‘세계평화’ 같은) 의미를 헤아릴 수 없는 저 질문들 앞에 선 우리는 말을 잃는다. 간단한 질문으로 한 인간의 깊이를 헤아려보고자 하는 얄팍한 술수 앞에 침묵한 청춘들에게 돌아오는 말은 역시나 간단하다. “자네는 패기가 없군”, “젊은 사람이 그렇게 생각이 없어서야”. 물론 조금 다른 버전도 존재한다.


 “아프니까 청춘이에요”,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됩니다”, “아직 못 찾았나 보네요. 그럼 제 책을 보실래요? 이걸 보시면 꿈을 찾는 방법이 나와 있어요”.     


꼰대질을 거절할 권리     


  <잉투기>가 시작하는 지점은 여기에 있다. 꿈이 무엇인지 대답할 것을 강요당하면서도 정작 그들의 대답에는 관심이 없는 기성세대와 경쟁하는 새로운 세대. 그들은 그 자신의 존재이유를 인터넷에서 찾았다. 일종의 인정투쟁이라 해야 할까. 인터넷에서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의 강함을 필사적으로 어필해야 하는 이 슬픈 코미디 안 에서 새로운 인류는 태어났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을 ‘잉여’로 지칭했다. 경제학을 제외하곤 실생활에서 거의 쓸 일이 없는 이 단어. 손창섭의 <잉여인간>이 원형인가 싶지만 그것보다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천호진의 대사로 더 유명한 이 ‘잉여’라는 단어가 도대체 어찌하여 2000년대 이후 청춘들이 자신을 부르는 단어가 되었는지 우리는 알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이미 ‘잉여’인 우리조차, 그 ‘잉여’가 왜 ‘잉여’가 되었는지 모른다. 그저 우리가 아는 것은 서로의 아이디이고(칡콩팥, 젖존슨, 쭈니쭈니, 교미킹, pk야도란) 온라인 게임 내에서 쓰이는 무기의 가치가 “데미지만 세다고 해서 좋은 게 아니라 옵션이 좋아야 하는 것”이며, 예쁜 여고생이 치킨 먹방을 하면 남자들이 별풍선을 쏴준다는 것이다. 이 안에, ‘꿈’은 자리가 없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애초에 꿈이라는 것이 무엇일지 생각해볼 기회가 별로 없었던 잉여들이 꿈의 자리에 저것들을 채워 넣은 것이다. 더 나아가면, 인터넷 상에서 자신이 연기하는 캐릭터가 자신의 꿈을 수행한다.


 

 캐릭터가 자기의 꿈을 대리 수행할 때, 기성세대는 그것에 대해 전혀 이야기할 권리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이해할 수도 없으며, 이해하려 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여주인공 영자(류혜영)의 삼촌은 영자가 연기하는 ‘먹방소녀 영자’에 대해선 알지 못한다(혹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 한다). 삼촌은 자연인 ‘영자’이외엔 이해하지 못하며 사실 그 자연인 영자조차 완벽하게는 이해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삼촌은 그저 남자어른이 해줄 수 있는 ‘기술적인 지원’이외에는 기여하지 못한다. 망가진 문을 고치거나, 외숙모가 해준 반찬들을 날라주거나, 영자와 함께 견과류를 집어먹으면서 TV를 보거나. 칡콩팥을 연기하는 태식(엄태구)의 어머니 역시 마찬가지다. 어머니가 행하는 기초적인 의무들은 다 하지만 사실 태식이 어떤 생각을 가졌으며 어떤 것을 욕망하는지 관심이 없다. 앞서 우리가 이야기한 당혹스러운 질문과 궤를 같이 하는 ‘너 뭐 하고 싶은 건 있어?’ 라는 질문을 태식에게 던지긴 하지만 그것은 물론 ‘반성을 촉구하는 질문’이다. 태식은 이 질문 앞에서 언제나 침묵한다. 그래서 인지 태식이 어머니에게 그 자신의 삶에서 전혀 기여한 바가 없다는 사실을 선언하는 장면은 기묘하게 통쾌하다. 태식이나 영자나, 혹은 전혀 그 가족사가 등장하지 않는 희준(권율)이나, 그들은 고아나 다를 바 없다. 꿈이 무엇인지 대답하지 못하는 잉여. 혹은 고아들. 외로움을 느낄 수밖에 없지만 기성세대의 꼰대질에 동의하지 못하는 버린 자식들. 더 정확하게 이야기하면. 그 기성세대에게 꼰대질을 할 권리가 없다고 선언해 버리는 새로운 아이들.     


기만의 힐링과 오만의 멘토     

 

 지금 도처에 자리 잡은 ‘힐링’과 ‘멘토’의 열풍은 도대체 어디에서 왔을까. ‘힐링’은 치유이며 ‘멘토’는 길잡이로 번역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용례와 가장 비슷할 것이다. 그 이야기는 역으로 지금 우리에겐 치유와 길잡이가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것을 왜 필요로 하게 된 것일까.

 

 그 이유는, 사실은 간단하다. 그것이 바로 지금 가장 장사가 되는 나와바리이기 때문이다. 어차피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사회는 경쟁을 거부할 수 없는 사회이다. 필연적으로 그 경쟁에서 탈락한 아이들이 속출 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수는 점점 기하급수 적으로 늘어난다. 수많은 취준생들, 노량진에 미래를 저당 잡힌 고시생들, 비정규직을 전전해야 하는 아이들, 알바생들. 이 아이들이 경쟁에서 탈락할 수밖에 없는 그 태생적 비극보다 눈앞의 사탕발린 위로가 더 먹힌다는 것을 터득한 기성세대들은 그때부터 힐링 이라는 단어를 내세워 장사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 도대체 청춘은 왜 아파야 하는 것이고, 도대체 청춘은 왜 흔들려야 하는 것일까. 다 차치하고서도, 도대체 이 힐링이 이 아이들에게 어떤 방식으로 치유가 될까?

 

 힐링이 기만이라면, 멘토는 오만에 가깝다. 반말조로 내갈기는 꼰대질은 ‘격의 없는 독설’이라는 근거 없는 단어로 치환되고 경쟁에서 탈락한 아이들에게 ‘네 잘못’임을 강변한다. 그리고 ‘억울하면 출세해라’는 저 간단한 한 마디를 하기 위해 인문학을 끌어들인다. 여기에서 과연, 경쟁에서 탈락한 저 아이들에 대한 진심어린 자세를 찾을 수 있을까. 김영진은 <잉투기> 평론에서 저 아이들에게 동의하기도, 부정할 수도 없는 애매한 위치에 본인이 처했음을 인정한다. 본인의 젊은 시절에도 무기력했으며 지금 자신이 젊은 세대를 가르쳐야 하는 입장(평론가 김영진은 명지대 영화뮤지컬학부의 교수다)이 된 후에 더더욱 무기력 해진 오늘날의 젊은 세대를 보며 난처해진 마음을 숨기지 못한다. 그러면서 조금 더 긍정적인 일에 에너지를 쏟아 저 무기력함을 빠져나오길 기원하는 일 이외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음을 솔직하게 인정한다. 하지만, 기성세대와 잉여들이 소통할 수 있는 미약한 가능성은 바로 이 태도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결국, 칡콩팥과 쭈니쭈니, 영자는 그 자신이 몰두하던 자기 파괴의 퍼포먼스 속에서 짧은 구원을 얻는다. 물론 나 역시도(지금의 내 나이가 딱 칡콩팥과 쭈니쭈니와 비슷한데도) 그들이 기성세대적인 문법을 거부하고 잉여로써의 자기가 세상에 건네는 서툰 대화를 완벽히 인정할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난처한 입장에 처했음을 고백해야 할 것 같다. 영자는 자신의 먹방을 보던 아이디 ‘충무김밥’이 자신에게 “네 어머니가 너 이러는 거 아시냐?”라고 꼰대질을 하자 간단하게 대꾸한다. “그러는 네 어머니는 네가 이런 거 보는 거 아시냐?” 어차피 같은 잉여주제에, 어디서 돼먹지 않은 꼰대질 이냐는 영자의 일갈이리라. 하지만 저 ‘충무김밥’의 태도를 부정할 수 없는 내 안의 꼰대성(명예 기성세대라고 부르는 게 차라리 올바를까)은 계속 이 영화 앞에서 나를 머뭇거리게 만든다. 허나 이 작품의 감독 엄태화는 마지막까지 영자와 칡콩팥, 쭈니쭈니를 ‘성장’이라는 안전한 틀 안으로 봉합하지 않는다. 이런 유의 낙오자들이 등장하는 성장영화는 결국 이 인물들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사회와 불화하지 않는 청년이 되는 것을 ‘성장’으로 포장한다. 반대로 엄태화는 오히려 인물들이 더욱 더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파괴하도록 내버려둔다. 그 폭발적인 에너지가 이 영화를 약동하게 만든다.


 그럼으로써 이 영화는 두 가지 의문을 남긴다. 그럼 이제, 잉여인 우리는 어떻게 이 세상을 버텨내야 할까. 그리고 이 작품을 보며 난처해하는 또 다른 우리는 저 아이들에게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까. 엄태화는 여기에서 어쩌면 가장 윤리적인 선택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냥, 아무것도. 논평하지 않는 것. 아이들이 마지막 순간에 경험하는 그 짧은 순간의 구원조차도 ‘ㅋㅋㅋㅋㅋㅋㅋㅋㅋ’으로 점철된 의미 없는 기호로 도배해 버리는 것. 그럼으로써, 이해와 소통을 차라리 포기해 버리는 태도. 지금 우리가 저 잉여들에게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저 입을 닥치고 있는 것 뿐이라는 강건한 선언은 아닐까.                


※ 이 글은 2016년, 서울영상미디어센터 웹진 <미디어스코프>를 위해 썼다. 지금 다시 읽어보니, 이 글을 쓸 때 나는 매우 많이 분노하고 있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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