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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Jan 28. 2023

두 개의 옴니버스, 하나의 유니버스

짐 자무쉬의 <지상의 밤>, <커피와 담배>

우스꽝스러운 인간들의 밤     

 자무쉬의 초기작들을 다시금 되짚어 볼 때 어느 순간 다가오는 감정은 ‘기시감’ 이다. 어디선가 본 듯한 느낌. 분명히 이미 보았던 구도, 익숙한 구성, 반복되는 형식, 이미지들이 어렴풋이 인상에 남았다가 자무쉬의 다른 작품들을 함께 봄으로써 머릿속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 나오고 제각기 드러났다가 서로 달라붙는 기묘한 체험을 할 수 있다.      


 그런 자무쉬의 영화 중에서 <지상의 밤>과 <커피와 담배>는 하나로 묶였을 때 단차 없이 들어맞을 수 있는 작품들이지 않나 싶다. 단순히 옴니버스 영화라는 특징 이외에도, 이 영화들은 기묘하게 닮은 부분들이 많다. 조금 낯간지러운 표현일 수 있지만, 두 개의 옴니버스가 마치 자무쉬라는 하나의 유니버스로 수렴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어떤 순간들이 존재한다.     


 <지상의 밤>은 톰 웨이츠의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목소리로 울려 퍼지는 “Back in the good old world”와 함께 시작한다. <지상의 밤>의 오프닝은 어떻게 보면 코미디이면서, 또 어떻게 보면 야심적인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제목인 ‘지상’. 그러니까 ‘땅 위’의 밤인데 영화가 시작하는 지점에서 등장하는 인서트는 우주의 시점이다. 우주의 시점에서 지구를 둘러보는 것이 <지상의 밤>의 오프닝이다. 우주에서 지구로, 지구로 들어가면 지구본으로 점프하면서 각 대륙을 훑어본다. 이걸 보고 있는 우리의 시선은 ‘지상’. 땅 위에 발 딛고 있는 인간이 아니라 지구를 굽어보는 저 높은 곳의 무언가에 더 가까워진다. 다시, 영화의 제목 <지상의 밤>을 떠올려 본다면 이 오프닝은 제목과는 위배되는 방식, 그럼으로써 역설적으로 ‘지상’이라는 단어를 다시 한번 생각하게 만드는 방식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지상의 밤>은 택시라는 작은 공간에서 벌어지는 5편의 짧은 이야기를 묶은 영화다. 사소하다면 사소할 인간들의 이야기인 <지상의 밤>을 통해 우리는 등장인물들이 겪는, 그 인물의 개인사적 입장에서는 매우 중차대한 사건들을 구경한다. 그런데, 오프닝의 ‘우주적 시선’을 다시 생각해보면 <지상의 밤> 속 등장인물들의 이야기는 지구 어디에선가 벌어지는 작은 사건 정도로 인식된다. 이 장치는 주제와 서사의 심각성에서부터 한 발짝 떨어져 이야기 자체를 즐길 수 있도록 하는 기이한 효과가 발생한다. 로베르토 베니니가 연기하는 ‘로마’ 에피소드는 대놓고 ‘시체’까지 등장하는데도 우스꽝스럽기가 그지없다.   

  

 이 우스꽝스러운 무드는 자무쉬의 또 다른 옴니버스 영화 <커피와 담배>에서도 마찬가지다. 신명 나는 오프닝 곡 <Louie Louie>가 흘러나오고 화면에 위대한 배우들과 뛰어난 뮤지션들의 이름이 떠오르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커피와 담배>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이미 낡은 유행어가 되었지만, 잠시 빌려오면, “이 중에 네 취향이 한 명 쯤은 있겠지” 싶을 정도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지금 생각하면 이제 다시 볼 수 없는 듀오 밴드인 “화이트 스트라입스”의 잭 화이트와 멕 화이트의 이름이 화면에 떠오를 때 정말 반갑다) <커피와 담배>가 세상에 나온 지 대략 17년이 흘렀고 그사이에 우리들의 시간은 걷잡을 수 없이 흘러갔지만, 영화 속에서 뚱한 표정으로 심드렁하게 잭 화이트를 바라보던 멕 화이트의 표정은 그대로다. 새삼 영화는 영화 바깥의 우리가 그때의 영화로부터 멀어진 시간을 깨닫게도 하지만, 지나가 버린 시간의 어느 한 지점을 아주 오래도록 간직하고 있기도 하다는 걸 생각하게 된다.


반복된 실패에 대하여


 <지상의 밤>과 <커피와 담배>가 서사를 구축하는 방식은 ‘반복’이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실패의 반복’, 혹은 ‘반복된 실패’라고 해야 할 것 같다. 그러니 ‘반복’과 ‘실패’를 나누어서 보면 어떨까 싶다. 먼저 반복부터 살펴보자면.     


 <지상의 밤>의 모든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무대는 ‘택시다. 한 가지 소재로 에피소드를 묶는 방식은 <커피와 담배>에서의 ‘커피’와 ‘담배’를 통해 다시 한번 반복된다. (<커피와 담배>는 <지상의 밤>보다 늦게 개봉했으나, <지상의 밤>보다 먼저 촬영된 에피소드도 존재한다) 하지만 단순히 일관된 장소와 소재만이 반복되는 건 아니다. <지상의 밤>과 <커피와 담배>의 에피소드들 전체를 관통하는 주요한 특징, 조금 더 세밀하게 보면 사운드와 이미지가 <지상의 밤>과 <커피와 담배>가 시도하는 일관성을 성립시킨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지상의 밤>은 동 시간대에, 서로 다른 장소의 택시들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룬다. 물론 뉴욕, 로스엔젤레스, 파리, 로마, 헬싱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이기 때문에 해당 지역이 속한 국가의 시간이 물리적으로 서로 같지는 않지만, 그래서 거의 시종일관 밤에 진행되던 영화가 마지막의 ‘헬싱키’ 에피소드에서 어슴푸레한 빛을 화면에 담을 수 있었기는 하지만. ‘동 시간대’라는 점은 분명합니다. <지상의 밤>은 이 에피소드들이 동 시간대에 벌어지는 사건이라는 알려주기 위한 장치로 사운드를 활용한다.     


 매 에피소드에서 시계 화면을 비춰 줄 때마다 나오는 같은 곡조의 연주곡은 미묘하게 다르도록 편곡되어 있다. <지상의 밤> OST를 확인해보면 “뉴욕 무드”, “로스 엔젤레스 무드”, “파리 무드”, “로마 무드”, “헬싱키 무드”라고 이름이 붙여져 있습니다. 조금 상상력을 발휘해 보자면, 이 이야기들이 결국은 같은 이야기를 서로 다르게 변주해서 반복하고 있음을 알려주는 상징으로도 볼 수도 있는 부분으로 추측 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지상의 밤>은 에피소드의 어떤 중요한 지점에 도달하면, 예를 들어 첫 번째 <뉴욕> 에피소드에서 운전기사인 코키가 손님이자 헐리우드 캐스팅 디렉터인 빅토리아 스넬링의 집 앞으로 택시를 몰고 들어올 때, 로마 에피소드에서 로베르토 베니니가 연기한 택시기사가 그 자신의 정말 ‘다양한’ 성적 경험을 고백하기 직전에, 오프닝 때 들었던 톰 웨이츠의 노래 “Back in the good old world”의 전주가 다양하게 변주되어 깔린다. 이 반복된 사운드의 사용은 일관성과 반복의 효과 외에 또 한 가지의 기능적 기여를 하고 있다. 마치 일종의 ‘신호’처럼. 지금부터는 ‘집중’이라고 알려주듯 이 연주곡이 흐르면 에피소드의 중요한 변곡점이 도착한다.      

 ‘파리’ 에피소드에서, 이름이 드러나지 않는 흑인 운전기사 주인공은 진상이라는 말이 아깝지 않은 외교관들을 손님으로 태우고 불쾌한 대화를 겪는다. 이 외교관들과의 장면에선 톰 웨이츠의 음악이 흘러나오지 않지만, 주인공이 이 외교관들을 내쫓은 뒤 홀로 도롯가에 서 있는 시각장애인이 카메라에 잡히는 순간, 이 음악이 흘러나온다. <파리>편은 베이트리체 달이 연기한 시각장애인이 등장하는 순간 위대해진다.     


 <커피와 담배> 역시 반복을 통해서 서로 다른 에피소드들에 일관성을, 혹은 개연성을 부여한다. 단순히 둘 또는 셋의 등장인물이 마주 앉아 카페에서 커피를 마신다는 행동의 반복 말고도, <커피와 담배>는 인상적인 ‘이미지’의 반복도 주요한 전략으로 구사하고 있다. <쌍둥이> 에피소드와 케이트 블란쳇이 1인 2역을 한 <사촌들> 에피소드를 제외하고, 나머지 에피소드들에서는 등장인물들이 커피를 마시는 테이블에 ‘격자 모양의 반복적인 무늬’가 새겨진 테이블보가 깔려있거나 테이블 자체에 이 무늬가 새겨져 있다. <쌍둥이> 에피소드에서는 테이블에는 반복적인 무늬가 없지만 ‘벽지’에 같은 꽃이 반복적으로 새겨져 있고 <사촌들> 에피소드에서는 커피가 올려진 테이블 바닥에 깔린 반복적인 격자무늬의 장판을 계속 보여주고 등장인물이 마시는 ‘컵’에 반복적인 무늬가 보인다. 이 반복적인 무늬들은 오랜 시간에 걸쳐서 찍힌 이 단편들에 시각적인 일관성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있다.      


 빌 머레이와 우탱클랜의 멤버 르자와 즈자가 나오는 에피소드인 <망상>에피소드는 <커피와 담배>가 시작부터 쌓아 올린 반복의 요소들이 거의 절정에 달하는 에피소드인 것으로 보인다. 일단 구조가 두 번째 에피소드인 <쌍둥이>와 일치한다. <쌍둥이>에서는 쌍둥이 남매의 대화였다면 <망상>에서는 힙합 그룹 우탱 클랜의 멤버이자 실제 사촌관계인 르자와 즈자의 대화인 정도가 차이점이다. 이 ‘사촌’이라는 소재는 케이트 블란쳇이 1인 2역을 했던 <사촌들>과, 알프레드 몰리나와 스티브 쿠건이 족보를 놓고 대화하는 <사촌이라고?>에서 이미 등장한 소재다. <망상> 에피소드에서의 빌 머레이는 커피를 주전자째 들이마시고 즈자에게 “형씨는 진짜 카페인 중독자네”라는 말을 듣는다. 왠지 앞에서 들은 것 같은 이 대사는 앞선 에피소드 <캘리포니아 어딘가>와 <그게 자네를 죽일거야>에서 등장한 대사다. 이미지의 측면에서도 <망상> 에피소드의 무대가 되는 커피는 앞서 본 반복적인 격자무늬로 거의 도배가 된 장소다.      


 하지만, 진짜는 지금부터다. 즈자가 자신이 커피를 끊기 전에는 밤마다 커피를 마셔댔고 그렇게 커피를 마시면 “꿈을 빨리 꿔서 휙휙 지나간다”라는 대사를 할 때,(이 대사는 이미 앞선 에피소드 <만나서 어색하네요>에서 스티븐 라이트가 한 대사다) 빌 머레이가 자신은 “커피를 얼려서 커피 막대사탕을 만드는 녀석을 안다”(역시 앞선 에피소드 <만나서 어색하네요>에서 스티븐 라이트가 한 대사다)라고 할 때 영화는 뭐라 형언할 수 없는 코미디의 완성에 다다른다. 영화가 끊임없이 쌓아 올려온 반복의 구조는 이 황당한 대사들이 에피소드 간의 경계를 뛰어넘어 튀어나왔을 때 새로운 에너지를 발휘하는 어떤 특별한 순간으로 만들어준다. 그리고 이것은 짐 자무쉬 라는 한 작가의 작품세계 안에서 주요한 특징으로 발휘된다.     


실패의 반복에 대하여     


 그다음 ‘실패’의 측면을 보자면, ‘소통’이라는 단어를 경유해야 할 것 같다. <지상의 밤>과 <커피와 담배>는 모두 실패하는 소통의 현장을 포착해낸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지상의 밤>이 보여주는 수준이 소통의 측면에서 조금 더 낫긴 하지만, 크게 차이는 없다. 


 <지상의 밤>의 첫 번째 에피소드 <뉴욕> 편은 여성 운전기사 코키와 캐스팅 디렉터 빅토리아가 아주 짧게나마 동질감을 느끼는 순간을 포착해내지만 그렇다 해도 결국 그들의 발화는 온전히 소통되어 목적을 달성하지는 못한다. 이 ‘실패하는 소통’을 두 가지 방식으로 반복해 보여주는 것이 <로스 엔젤레스> 에피소드와 <로마> 에피소드다.      


 <로스 엔젤레스> 에피소드. 구동독에서 온 기사 ‘헬무트 그로켄베르거’와 로스 엔젤레스에 사는 남자 ‘요요’, 그리고 요요의 처제 ‘안젤라가 등장하는 이 에피소드에는 정말 쉴 새 없이 발화가 오간다. 요요의 처제 안젤라가 등장하면, 문득 쿠엔틴 타란티노 영화를 볼 때처럼 FUCK이 몇 번 나오나 한번 세어보고 싶어진다. 수도 없이 많은 대화가 오가지만 그들의 소통은 실패로 점철된다. 단적으로, 요요는 끝까지 헬무트의 이름을 똑바로 발음하지 못하고 ‘헬멧’이라고 부른다. 아무리 요요가 “주행은 기어를 D에 놓아라”라고 알려줘도 헬무트의 택시는 덜컹거리기만 할 뿐이다. 에피소드의 마지막 부분, 요요가 맨해튼으로 다시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어도 헬무트는 일관되게 반대로만 움직인다. 꽤 즐겁고 활기찬 발화들이었지만 엔딩은 이 발화들이 그들의 행동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은 서글픈 반증이 되어버린다.     


 <로스 엔젤레스> 에피소드가 서로 쉴새 없이 떠들어대지만, 결국엔 실패하고야 마는 애잔함으로 귀결되었다면, <로마> 편은 말 그대로 ‘일방통행’이다. 승객으로 택시에 탄 신부는 ‘고해성사는 이곳에서 하기 힘들다’라는 의사를 표현한 후 더 이상 말이 없어지고 에피소드의 남은 시간 동안 떠들어 대는 건 로베르토 베니니가 연기한 택시기사뿐이다. <로스 엔젤레스> 에피소드가 수없이 오가는 대화 속에서도 기어이 실패하고야 마는 소통의 방식을 보여준다면, <로마>에피소드는 애초에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없는 인간들을 보여준다. 비록 끝까지 요요는 헬무트를 헬멧이라 부르면서 끝나긴 했지만 그래도 서로에 대한 따뜻한 마음 그 자체까지 부정하진 않고 끝났던 <로스 엔젤레스> 에피소드에 비해 로마편은 대화의 상대자가 아예 ‘사망’ 해버리기 까지 한다.      


 이 실패한 소통, 혹은 실패한 대화들은 <커피와 담배>에 이르러 더욱더 변화무쌍한 양상으로 전개된다. <커피와 담배>는 아무래도 ‘취향’의 영화일 것 같다. 조금 말을 바꾸어보자면 ‘기호’의 영화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커피’와 ‘담배’는 모두 대표적인 기호식품이다. 커피와 담배는 없어도 생명을 유지해나가는 데에는 아무런 지장이 없지만, 그것이 없는 삶을 살아가느니 죽겠다는 강경한 사람들을 만들어내는 어떤 마력이 있는 기호식품들이기도 하다.    

  

 <커피와 담배>에는 ‘커피’와 ‘담배’의 의미를 찬미하는 장면도 분명 존재하지만, 이것들의 해악을 설파하는 장면도 있다. 직접적으로 <그게 자네를 죽일 거야>라고 대놓고 소제목으로 적어놓기도 한다. <그게 자네를 죽일 거야> 에피소드에서 조는 줄담배를 피우는 비니에게 그것이 비니의 목숨을 해칠 것이라고 경고하지만 조 역시 커피를 주전자 통째로 마시긴 마찬가지다. 조는 “커피가 활력소”라고 이야기하고 비니는 “넌 중독자야”라고 한 줄 요약해버린다. 그들은 각자의 ‘기호’를 전혀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기호를 포기하지 않을수록, 대화는 정확한 목적지로 향하지 못하고 계속 빙빙 돌 뿐이다.      


 <커피와 담배> 속 등장인물들은 마주 앉아서 대화하지만 그들의 대화 속에 어떤 ‘진심’이 담겨 있는 건 가장 마지막 에피소드인 <샴페인> 정도이고 나머지 에피소드들에선 뜬구름 잡는 얘기, 자신조차 지키지 못할 조언, 괜한 아집, 민망함, 질투, 잘난 척, 속물스러움 등이 엿보인다. 이기 팝과 톰 웨이츠가 등장하는 <캘리포니아 어딘가> 에피소드에서 필사적으로 대화 사이의 틈을 메우려는 이기팝(이때 적합한 표현이 아마도 ‘마가 뜬다’ 아닐까 싶다)과 어떻게든 대화가 실패하는 방향으로 말을 이어가는 톰 웨이츠를 보고 있으면, 위대한 두 뮤지션을 이렇게까지 한심스러워 보이게 연출한 짐 자무쉬의 연출력이 얼마나 뛰어난지를 다시금 깨닫게 된다. 대화가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점점 더 대화는 도랑으로 빠져버리고 그때 그들의 손은 부지런히 커피와 담배로 향한다. 그들의 손이 커피와 담배로 옮겨갈수록 대화는 더더욱 절묘하게 실패합니다. 그러다 보니 몇 개의 에피소드를 보고 나면, 등장인물들이 커피와 담배로 손을 옮기는 순간부터 이미 웃음이 나기 시작한다.

     

단 한 번의 기적 같은 순간     


 <지상의 밤>과 <커피와 담배>는 반복적으로 '실패'하는, 주선율 하나를 놓고 여러 가지 방법으로 변주하는 방식으로 구축된 작품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디. 그런데 딱 한 번. 이 반복된 실패를 딛고 서로의 이해에 다다르는 기적 같은 한순간이 찾아온다. 그것이 <지상의 밤>에서의 <헬싱키> 에피소드와 <커피와 담배>의 <샴페인> 에피소드. 즉 각각의 영화에서 가장 마지막 에피소드다.     


 <지상의 밤>에서의 <헬싱키> 에피소드는, 다른 에피소드들과 절대적으로는 동일한 시간대에 있겠지만, 핀란드의 시차 상 새벽에 막 들어서려 하는 시점에 시작해 어스름하게 밖이 밝아져 오는 시간에 끝난다. 다시 한번, 제목 <지상의 밤>을 떠올려본다면, '밤'이 끝났음을 알려주는 일종의 신호처럼 보이기도 한다. 세 명의 취객이 택시를 잡아타고 그중 취객 한 명은 택시에 타기 전에 이미 뻗어있다. 여담으로, 이 뻗어버린 승객만이 <헬싱키> 에피소드에서 명확한 이름이 밝혀지는데 이름이 '아키'이다. 이 에피소드가 진행되는 곳이 헬싱키, 그러니까 핀란드라는 걸 생각해보면. 그리고 노동계급들의 서글픈 이야기라는 걸 생각해보면 이 '아키'라는 이름은 핀란드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에서 따온 게 아닐까 하는 추측도 가능할 것 같다. 짐 자무쉬는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영화 <과거가 없는 남자>를 호평한 적이 있다.     


 하여간, <헬싱키> 에피소드는 한 줄 요약해 보면 '불행 배틀'이다. 이미 뻗어버린 아키를 대신해 아키의 친구들이 아키가 겪은 하루 동안의 불행을 기사에게 늘어놓는다. 새 차를 뽑았더니 동네 껄렁패 형들이 고물로 만들고 회사에선 해고당하고 집에 갔더니 딸은 임신했고 아내는 무능한 남편과 못 산다며 빵칼인지 고기칼인지를 들고 덤볐다고 한다. 아키의 이야기를 전해 듣던 택시기사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덤덤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어렵사리 아이를 가졌지만, 너무 일찍 세상에 나와버렸고, 의사는 곧 죽을 거라 해서 아이에게 일부러 정을 주지 않으려 했지만, 아이가 3주를 버티자 아이는 더 오래 우리와 함께 할 거고 나도 아이를 사랑하겠다 다짐한 그 날 아이가 떠나버렸다는 이야기.     


 그런데, 이 이야기를 듣는 노동자들의 태도엔 <지상의 밤>의 다른 에피소드들에서 찾아볼 수 없던 감정들이 끼어든다. 훌쩍훌쩍 울면서, 이야기를 들려준 이의 마음에 깊이 이입하면서, 이야기를 들려준 이와 아이를 잃은 아내의 상실감을 위로하면서 지금의 그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진솔한 애도의 태도를 보여준다. 아키의 친구들은 여전히 뻗어있는 아키를 택시기사가 걱정하자 '별일도 아닌 것에 질질 짜는 놈'으로 아키를 격하시킨다. 밖이 밝아오자 아키의 친구들은 노래를 흥얼거리며 사라지고 홀로 남은 아키 역시 밝아온 거리에 주저앉는다. 물론 이 장면 이후에 <헬싱키> 에피소드에 등장한 인물들의 삶에도 희망이 비칠지 여전히 그들이 겪어온 지난함이 연속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헬싱키> 에피소드의 마지막은 어쩌면 그날 밤 그 택시에 탔던 모든 이들에게 오늘은 빛이 비칠지도 모른다는 낙관적인 생각을 해보고 싶어지도록 자무쉬는 슬쩍 우리에게 윙크를 건넨다.     


 이 ‘낙관적인 무드’는 <커피와 담배>의 마지막 에피소드 <샴페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마지막 장면. 두 노인이 말러의 가곡 <나는 세상에서 잊혀지고>를 들으며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다. 그들을 연결해주는 어떤 끈으로서 커피와 담배가 거기 존재한다. 자무쉬는 시종일관 커피와 담배라는 지지대에 기대어 억지로 대화의 장에 붙들려 있는 인물들을 보여주는 척하다가, 마지막 순간에 커피를 샴페인으로 둔갑시켜 그들의 남은 삶을 축복한다. 그리고 그 축복의 순간을 기록해주는 친구로서 커피와 담배는 아마도 모자람이 없어 보인다. 자무쉬는 마지막 에피소드에 이르러. 커피와 담배의 역할이 무엇이었는지를 넌지시 알려준다. 

     

 실컷 반복적으로 소통이 실패하는 풍경을 보여주다가, 마지막에 별안간 서로의 마음이 온전하고 티 없이 전달되는 한순간을 두 번이나 보여준 자무쉬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는 없겠지만, 한 가지 추측은 해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대화하고 여전히 시도해야 한다는 것. 그 수많은 시도 끝에 잠시라도 섬광이 비추듯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는 순간이 기어코 올 거라고 믿는 것. 그게 자무쉬가 우리와 공유하고 싶었던 하나의 메시지는 아니었을까.    


※ 이 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예술과젠더 연구소의 학회지 NW4.5를 위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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