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산: 용의 출현>, <외계+인 1부>, <헌트>
※ 몇몇 영화, 소설의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습니다.
2022년의 한국 영화는 영화 각각에 대한 어떤 이야기들이나 논의보다, 노이즈의 양산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를테면 최동훈의 <외계+인 1부>는 20년 전 장선우의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과 비견할 참사인가 아니면 더 큰 참사인가, 한재림의 신작 <비상선언>의 저조한 스코어는 정말 역바이럴로 인한 조작에 기인했는가 아닌가. 개인적으로는 ‘역바이럴’이라는 용어 자체를 처음 듣고 이것이 실체가 있는지, 있다고 해도 과연 영화 하나의 흥행을 엎어뜨릴 만큼의 파괴력이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있다. 만약 역바이럴이 영화를 엎어뜨릴 수 있다면 ‘정바이럴’(‘바이럴’의 의미)은 영화 자체의 완성도와 상관없이 흥행시킬 수도 있다는 의미가 되니 이건 더 난처한 이야기다. 냉소적으로 이야기하면 <비상선언> 영화 자체는 비상 없이 그냥 침몰했다. 그리고 영화사, 제작사, 배급사에는 ‘비상’이 걸렸다. 결정적으로는 한국 내에서 ‘굿즈’에 대한 가장 면밀한 정보를 제공하는 것으로 알려진 영화 커뮤니티 사이트 하나가 <비상선언>의 시사회를 둘러싼 일련의 과정들이 밖으로 노출되면서 ‘비상선언’을 하고 이용자들이 소개(疏開)되었다.
이 모든 사단의 원인은 여름 영화 모두가 평균적으로 저조하거나 기대치에 못 미친 관객 수 때문이다. 그러나 그저 한 명의 개인으로서 중요한 건 ‘한국 영화산업의 나아갈 방향과 그 전망’이 아니라 결국 영화가 ‘나’에게 어떤 사유를 끌어냈는지에 있다. 그 ‘사유’가 꼭 인문적이거나 철학적이거나 사변적일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영화 자체의 만듦새를 떠나 창작자의 연속된 작업 형태에서 이질적으로 떨어져 나갔거나, 혹은 이전의 작법을 고의로 회피한 것처럼 보이는 작품 앞에 놓인 관람자는 사방팔방으로 생각의 전선을 펼칠 수 있을 것이다. 정리되지 않고 중구난방으로 늘어져 있음에 미리 양해를 구하며 한 관람자의 뒤죽박죽 한 머릿속을 구경하는 재미가 있으시길 바란다.
흥행사는 작가의 꿈을 꾸는가?
2014년 당시 통계청의 ‘장래인구추계’에 따르면 남한 총인구는 5,160만여 명 정도였다. 그리고 한국의 영화산업에서 2022년 기준으로 최다 관객을 동원한 영화는 김한민의 2014년 영화 <명량>이다. <명량>은 영화관 입장권 통합전산망의 공식통계에 따르면 17,613,682명을 동원했다. 즉 1,700만 명 하고도 60만 명을 더 동원한 숫자다. 2014년 당시의 남한 인구가 5,160만이었으니, 대략 3명 중 한 명은 <명량>을 보았다는 산술 계산이다. <명량>은 15세 미만 관람 불가 영화였고, 인구추계는 15세 미만의 인원도 합산하므로 조금 무리한 추측임을 인정하고 이야기해보면 <명량>을 볼 수 있는 연령대의 인구는 거의 다 보았다고 이야기해도 될 듯하다.
물론 <명량>의 기록적 흥행을 놓고 뻔한 레퍼토리를 반복할 수 있다. (이건 물론 <명량>뿐 아니라 방학 시즌 성수기용 대작 영화들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스크린 수 독과점, ‘버스배차 간격’이라는 멸칭이 붙는 촘촘한 상영시간표, 멀티플렉스의 수없는 ‘할인쿠폰’ 뿌리기, 대형배급사의 무차별적 마케팅 예산 살포, 이른바 ‘독립영화’의 미약한 지반, 등등 온종일 헤아릴 수도 있다. 그러나 2022년 시점에서, 2014년 영화 <명량>의 기록적 흥행이 오로지 산업적인 측면에서 ‘만들어진’ 결과라고 매도하기엔 조금 주저된다. 코로나 극복의 원년인 2022년에 <범죄도시2>는 새로운 천만 영화가 되었다. 코로나의 한복판이었던 2020년 8월에 개봉한 홍원찬의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는 400만 관객을 넘었다. <범죄도시2> 이후에 개봉한 2022년 여름시즌의 기획 영화들. 최동훈의 <외계+인 1부>가 150만을 가까스로 넘고, 한재림의 <비상선언>이 200만을 겨우 넘어가는 것을 생각해보면 단지 스크린독과점 같은 몇몇 요소가 영화의 흥행을 견인한다고만 보기는 어려울 것 같다. 물론 여기에는 코로나 시즌을 거치며 폭등한 티켓가격이라는 큰 변수도 존재하지만.
김한민의 <명량>이 비평적으로 주요하게 언급되는 영화는 아니다. 오히려 다른 측면에서 주요하게 언급되는 영화다. <명량>은 2010년대 중반 이후 한국에서 주요한 문화상품으로 떠오른 이른바 ‘국뽕’ 붐을 일으킨 어떤 시발점으로서의 ‘콘텐츠’로 자주 언급된다. <명량>이 다루는 주요 인물은 이순신이고, 주요 사건은 명량대첩이다. 이순신의 해전은 실제 사건임에도 어떤 신화적 아우라가 덧씌워져 있다. 명량대첩은 ‘신에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있사옵니다’로 압축되는, 지휘관의 담대한 전략 전술로 상대의 거대한 물량전을 막아낸 전투다. 명량대첩 직전 이순신은 파직당해 백의종군 중이었고, 다시 해군 사령관으로 돌아왔을 때 조선의 수군은 궤멸 직전이었다. 이런 전력을 통솔해 전투에 나가 승리하였으니 실로 자랑스럽지 아니한가.
문제는, 이런 ‘낭만적 기술’과 ‘입체적 서사’는 결이 다르다. 원균 명장설 역사 왜곡 논란에 시달렸던 김탁환의 <불멸>을 드라마화한 <불멸의 이순신>조차도 명량대첩에 나선 이순신이 겪는 정서적 고통이 묘사된다. 두려워하는 인간과 강건한 애국지사는 사실 별개가 아니라 하나의 몸 안에 깃들어 있다. 강건한 애국지사는 두려워하는 개인을 안고 투쟁한다. 이 아이러니를 입체적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가 ‘국뽕’영화로 매도됨을 방어할 수 있는지를 가르는 기준점이다. <명량>이 개봉했을 때, 영화에 대한 압축적 평가라 할 수 있는 한 줄 평에서 반복적으로 관찰되는 현상이 ‘침몰하는 캐릭터’다. <명량>은 이전의 한국 영화가 잘 재현해 내지 않았던 ‘해전’의 스펙터클을 불어넣는 데 큰 성공을 거뒀고, 이것이 영화의 흥행을 크게 견인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김훈이 <칼의 노래>에서 이미 첨언할 것이 없을 정도로 성공시킨 문제적 인간에 대한 면밀한 탐구의 흔적은 소거되어 있다. 소거된 작가의 자리를 차지한 건 치사량의 ‘신파’다.
잠시만 우회해보자. 2010년대 이후 한국 영화에서 가장 열성적인 이야기꾼은 연상호일 것이다. 연상호는 자신이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한 <부산행>이후 <염력>, <반도>를 극장개봉 시켰고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정이>를 작업했다. 동시에 드라마 <방법>의 각본을 썼고 <방법>의 영화판인 <방법: 재차의>의 각본도 작업했다. 웹툰 작가 최규석과 웹툰 <지옥>을 함께 작업하고 웹툰을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지옥>으로 옮겨 역시 드라마판의 각본도 최규석과 함께 작업하고 연출했다. 숏플랫폼 오컬트 드라마 <괴이>의 각본을 작업하는 한편 요네무라 쇼지의 만화 <기생수>를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더 그레이>의 연출/각본가로 선임되었다. 아직 자세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은, 또 다른 넷플릭스 오리지널 오컬트 드라마의 각본가로도 확정되었다. 이 모든 작업이 2016년의 <부산행>으로부터 단 6년 사이에 일어났다. 극영화 연출자로 활동하기 이전에 연출한 애니메이션 <돼지의 왕>이나 <사이비> 같은 건 제외하고 말이다. 앞에서 연상호를 ‘열성적인 이야기꾼’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러나 ‘탁월한 이야기꾼’인지는 의문이다. 연상호의 서사를 한 마디로 관통하는 건 ‘신파’다. 이를테면 <반도>에서 영화 시작하자마자 가족이 좀비 떼에게 사망하는 전개를 보자. 연상호는 더 이상 헤집을 수 없을 만큼 인물들의 상처를 벌리면서 동시에 서사의 긴장감을 넓히는 데 까진 대단한 역량을 발휘한다. 문제는 이것을 수습하고 봉합하기 위해 고도의 서사 기술을 발휘하는 것이 아니라 신파라는 아교를 통해 강제로 접합해버린다. 이때의 신파는 단순히 ‘신파’라고 명명된, 더 심술궂게 말하면 ‘질질 짜는’ 감정선의 형태만을 말하지는 않는다. 이를테면 납작한 정의감으로 발현된 무법적 행위도 ‘당위’의 이름으로 해결해버린다(<방법: 재차의>). 신파는 단순히 ‘눈물’이 아니라 논리적 설명이 필요한 자리를 감정의 과잉으로 대체했을 때 발생하는 어떤 울렁거림에 가깝다. 그리고 이건 한국의 보편적 흥행 영화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신파가 ‘눈물’의 형태로 발휘되면 <7번방의 선물>과 <신과 함께> 인 것이고, ‘국뽕’으로 치환되면 <명량>이다.
우회를 거쳐, 김한민이 <명량>에 이어 다시 이순신의 세계로 돌아온 <한산: 용의 출현>(이하 <한산>)의 차례다. <한산>은 명량보다 시기상 앞선 시점을 다룸으로 이순신을 맡은 배우가 최민식에서 박해일로 변경되었다. <한산>은 <명량>을 보았다면 당황스러운 영화다. 실제의 역사에서 한산대첩은 명량대첩과 다르게 물량 대 물량으로 맞부딪히는, 말 그대로 규모의 전쟁이다. 명량대첩 당시 백의종군하다 겨우 해군 사령관으로 복귀했던 이순신에 비해 한산대첩 당시의 이순신은 수군을 훈련시키고 전선을 건조하는 데 힘을 기울일 수 있는 조건을 가진 상태였다. 이 물량전을 영화화하면서 김한민은 조금 이상하게 ‘첩보영화’의 형식을 가져온다. 이순신과 맞상대하는 일본군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같이 출정 나온 일본군 장수들 사이에서 정치싸움을 벌일 줄 아는 전략가이자, 조선 수군 진영에 첩자를 심고 최대한 많은 정보를 체득하려는 병법자다. 실제의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와 관계없이, <한산>에서 두 전략가 이순신과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자신이 가진 조건을 면밀하게 검토하고 가장 최선의 수를 두기 위해 움직이는 바둑기사 같은 형상으로 등장한다. 이런 ‘바둑기사’ 같은 면모로 두 캐릭터를 등장시켰을 때 발생하는 효과가 있다. <한산>에서 두 전략가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전략의 측면을 제외하고 감정을 드러내는 장면이 제한되어 있다. 감정이 넘쳐흘러 과잉의 상태로 몰아갔던 <명량>과는 크게 다른 지점이다. 김한민은 가능한 한 높은 곳에 올라가 한산대첩이 벌어진 역사의 전장을 조망하면서 거대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두 명의 장수에 집중한다. <명량>은 조망했어야 할 인간의 다채로운 측면을 외면하고, ‘미래 세대를 위해서 우리가 고생한다’는 일종의 새마을 운동적 세계관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한산>의 세계는 자기의 일을 해내기 위해 투철하게 움직이는 군인과 첩보원의 세계다. 민중주의적 세계관을 넘어서 소명으로서의 군인들을 묘사하는 <한산>은 그럼으로써 상당히 건조한 영화가 되었다. 영화의 후반전이라 할 해전 장면의 스펙터클은 <명량>과 마찬가지이나, <한산>은 해전으로 가기 전의 전반전인 첩보전 역시 공들여 묘사함으로써 <명량>과는 다른 형식의 영화가 된다.
물론, <한산>의 첩보전이 서사적 완성도가 높은 이야기로 구축되었는지는 다른 평가가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중요한 건 <명량>과는 다른 길을 간다는 데 있다. 여기에는 ‘신파’도 소거되어 있다. 당연히 조선 수군이 왜군을 격파하는 해전 장면은 ‘웅장’하지만, 승리의 쾌감으로 영화의 모든 감정적 파고를 일원화하던 <명량>에 비하면 절제되어 있다. 절제되어 있으므로 ‘국뽕’도 일종의 토핑일 뿐 영화의 정체성으로 부를 수 있는 만큼의 함유량이 아니다. 이 선택이 생각보다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는 건, <한산>이 <명량>으로 한국영화사 최대 관객을 동원했고 <명량> 이전에도 흥행에 실패한 적이 없는 흥행사 김한민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JK필름의 윤제균이 비평적으로 참혹한 평가를 받아도, 계속 영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건 흥행사로서의 결단이 늘 주효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김한민은 적어도 이번 <한산>에서 흥행사의 본능적 감각으로부터 거리를 둔 것처럼 보인다. <한산>은 이 선택이 가장 흥미로운 영화다. 이것이 일시적이며 비 계획적인 특이사례인지, 아니라면 김한민의 이순신 유니버스가 작가주의적 요소를 탑재하기 시작한 것 인지는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인 노량해전을 다룬 <노량: 죽음의 바다>가 나와야 확실해질 것 같다.
참을 수 없는 취향의 참사
최동훈의 신작 <외계+인 1부>를 보고 느낀 당혹스러움은, 최동훈의 영화임을 증명하는 가장 강력한 요소인 ‘말의 맛’을 찾아볼 수 없음에 있었다. 최동훈은 대사와 대사가 충돌하는 순간을 액션의 경지로 끌어올려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감독이다. 최동훈의 영화에 한정한다면, 최동훈은 육체적(<도둑들>)이거나 혹은 총기(<암살>)를 사용한 실제의 액션 장면에서 그렇게 인상적인 순간을 만들어낸 감독은 아닐지도 모른다. 오히려 최동훈의 영화에서 강렬한 액션이라 할 수 있는 건 수없이 패러디되어도 원본의 흉흉한 기운이 퇴색하지 않는, <타짜>에서 ‘손모가지’를 운운하는 고니(조승우)와 아귀(김윤석)의 대화 장면이다. 최동훈의 영화에서 신체나 도구를 활용한 액션은 서사의 한 지점에서 쾌감을 폭발시키는 방식이라기보다 서사를 전개하는 장치에 더 가까워 보인다. 오히려 쾌감은 대사에서 나온다. 대사의 ‘문학적 쾌감’으로만 따지자면야 홍상수를 따라갈 수 없을 것이고, 절묘한 압운의 미를 구현하는 건 봉준호의 특기이며, 문어체와 구어체의 기이한 혼성을 통해 언어 감각을 깨우는 건 박찬욱(의 대사를 만들어내는 각본가 정서경)의 마법이다. 그러나 최동훈의 대사에는 홍상수나 봉준호, 박찬욱의 대사에 없는 ‘맛’이 있다.
영화 개봉 당시 인상적인 캐릭터임은 분명 하나 중도에 퇴장하는 인물이라 주목받지 못했던 <타짜>의 곽철용(김응수)은 개봉하고 16년이 지나서 다시 그의 대사들(이를테면 “묻고 더블로 가!”)가 주목받으며 컬트적인 인기를 끌었다. 최동훈은 어떤 캐릭터를 묘사할 때 그의 행동만큼이나 캐릭터 자신이나, 혹은 해당 캐릭터를 관찰하는 타인의 식견을 짧고 간결한 대사로 수식한다. 보편의 서사 기법에서 대사로 캐릭터의 성격을 기술하는 것은 그렇게 능란한 기법은 아니다.
그러나 최동훈은 보는 사람이 ‘구구절절’이라고 인식하기 직전에 끊어지는 대사의 힘으로 캐릭터의 매력을 끌어올리는 데 대단한 재능을 발휘해왔다. 이를테면 <타짜>에서 정마담(김혜수)의 성격을 한 번에 설명하는 대사. “나 이대 나온 여자야”. <도둑들>에서 펩시(김혜수)가 등장하고 해당 캐릭터의 성격을 한 번에 관통하는 예니콜(전지현)의 단평 “어마어마한 썅년 같은데”(영화도 필자도 여성혐오의 의도가 없음을 양해주시길 바란다) 거슬러 올라가 최동훈의 데뷔작 <범죄의 재구성>에서 사기꾼 최창호(박신양)가 동료 사기꾼들에게 자기를 소개할 때의 대사 “제가 레지던트라 전문의들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말하지 말고 보여줘라’가 시나리오 작법의 오랜 격언인 걸 생각해보면 최동훈의 방식은 함부로 따라 하기 어려운 독특한 것임이 틀림없다. 그래서 최동훈의 대사는 끊임없이 회자되고 어느 순간부터는 ‘밈’으로 지정되어 영원한 생명력을 얻는다. 그런데 다시 말하지만 <외계+인 1부>에서 최동훈은 뇌리에 남을 인상적인 구강 액션도, 캐릭터를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펀치라인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것이 보여주지 ‘않은’ 것인지 보여주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보여주지 않은’ 가능성까지도 추론해 볼 수 있는 건, 최동훈은 무엇을 어떻게 ‘들려줄지’를 아는 작가임을 의심하지 않아도 될 만큼 이전의 성공사례를 축적한 연출자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렇다면 <외계+인 1부>는 최동훈의 작법에 있어 조금 특이한 사례다. 다른 측면에서, <외계+인 1부> 이야기 전체에 흐르는 무협적 기조와 ‘도사’의 등장은 최동훈의 이전 작품 중 흥행에는 일정 정도 성공했으나 주요한 작품으로는 잘 언급하지 않는 <전우치>를 연상시킨다. 이전의 최동훈이 성공적으로 성취한 지점(대사의 힘)의 흔적은 찾기 어렵고 장르와 캐릭터 적 유사성은 상대적으로 밀도가 낮았던 <전우치>에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외계+인 1부>의 만듦새에는 필연적으로 공백이 발생하고, 이 공백을 새로이 채워 넣어야 할 필요가 발생한다. 이 공백을 채워 넣는 것은 최동훈의 ‘취향’이다.
최동훈의 세계는 반복해서 ‘무협’으로 되돌아간다. 그러니까 고전적 무협영화의 구조에서 출발해 무협영화의 알맹이 위에 현대 배경의 외피를 입힌 ‘홍콩 누아르’, 화투패와 트럼프를 쥔 ‘홍콩 도박 영화’의 세계를 왕복한다. 허영만의 원작이 이미 그런 성격을 띠지만, 최동훈이 재현한 <타짜>의 구조는 온전히 무협영화다. 선천적 재능이 있으나 아직 실력이 개화하지 못한 풋내기(주인공 고니)가 운명처럼 은둔 고수(평경장)를 만난다. 은둔 고수는 풋내기를 제자로 받아들이지 않고 우회적으로 무술(<타짜>에선 화투)의 길을 가지 말 것을 권유하나 풋내기는 근성으로 고수의 시험을 통과하고 고수를 스승으로 사사한다. 결국 제자는 스승의 지도를 받아 선천적 재능과 숙련된 기술을 겸비한 고수로 진화하고, 제자는 스승의 인도를 통해 강호(<타짜>에선 정마담을 만나 벌이는 큰 판)에 나선다. 그리고 스승은 적에 의해 퇴장하고 제자는 스승의 복수에 나선다. 이렇게 정리해보면 <타짜>는 성룡의 <취권>과 다르지 않은 이야기다. 최동훈은 단선적인 복수의 서사를 되풀이하면서(형의 복수를 하러 사기판에 뛰어든 <범죄의 재구성>의 동생, 친일파들을 처단하려는 의열단원들이 등장하는 <암살>, 다이아몬드를 목표로 팀을 모으지만 실제로는 복수가 목적인 주인공이 등장하는 <도둑들>) 이야기를 무협의 무드로 이끌고 간다. 홍콩 무협영화는 ‘무협’이라는 원형의 형태를 놓고 누아르, 도박 영화, 소동극의 형태를 띤 집단 범죄영화 ‘케이퍼 필름’으로 분화했다. 이 세 장르는 최동훈의 영화에서 반복적으로 보이는 주요한 특성이다. 최동훈의 제작사 이름부터가 ‘케이퍼 필름’이니.
<외계+인 1부>는 이렇게 보자면 최동훈의 취향에서 한국적으로 변환과정을 거쳤던 이전의 영화들과 다르게 원형 그대로를 가져온 <전우치>와 닮아있다. 문제는 이 원형 그대로의 ‘무협’적 세계와 SF를 결합시켰을 때의 이상 현상에 대한 대비책이 상대적으로 미완이었던 것처럼 보인다. 즉 최동훈의 이전 영화들은 무협 서사의 ‘구조’를 가져온 것이지 외형적 형식에서 아예 무협의 이미지를 그린 사례는 드물었다. 그런 사례인 <전우치>를 제외한 최동훈의 이전 영화들이 대단한 파괴력을 지녔던 건 익숙한 레퍼런스들의 기반 위에 천의무봉 한 구강 액션의 진경과 재치 있는 서사적 뒤틀기를 결합시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계+인 1부>는 무협과 SF가 이종교배 되어있다. SF는 필연적으로 세계관을 설명해야 한다. 동시에 개연성을 확보하기 위한 기초작업의 충실함이 성패를 좌우한다. 여기서 <외계+인 1부>는 SF를 다루면서 SF를 ‘판타지 장르’의 일환으로 상정하고 결합시킨 듯한 의심이 든다.
판타지와 SF를 구분하는 수많은 학술적 기준들이 있지만, 약간 농담을 전제하고 이야기해보자. 이를테면 주인공이 어떤 장애물을 만났을 때 ‘기도’해서 뛰어넘으면 ‘판타지’고, 말이 되건 안 되건 주인공이 장애물을 ‘폭발’ 시킬 수 있는 어떤 장비를 제작해 해결하는 과정을 ‘설명’하면 SF다. 이 느슨한 구분을 따라가 보면 무협은 판타지에 가깝지, SF에 가깝진 않다. 두 장르는 ‘상상’에 기반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태도가 다른 장르다. <외계+인 1부>는 즉 ‘무협’으로서 원래의 최동훈이 익숙하게 보여주었던 부분에서 기본점수를 획득하고, SF에서 기술점수를 획득해야 하는 어려운 형식으로 갖춰진 영화였다. 그러나 <외계+인 1부>에서 최동훈의 원래 장기인 ‘구강 액션’은 무협의 영역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다. 오히려 슬랩스틱에서 큰 성과를 낸다. <외계+인 1부>에서 자주 언급되는 장면은 흑설(염정아)과 청운(조우진)이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사지가 마비되는 절체절명의 위험 속에서 가까스로 신체를 움직이는 장면이다. 이 슬랩스틱은 <천녀유혼>에서 어리숙한 선비 영채신(장국영)이 도인 연적하(우마)의 엉덩이에 침을 꽂아버리는 독보적 슬랩스틱에 버금간다. 그러고 보면, <외계+인 1부>의 무협파트 주인공인 도사 무륵(류준열)이 반복적으로 읊는 주문이 바로 <천녀유혼>에서 연적하가 외치던 ‘반야바라밀’ 이다.
최동훈이 성공적으로 재현해 왔던 무협적 세계관 그 자체(‘잡채’ 라고 쓸 뻔했다)로 직진하는 무협파트의 흥미로움은 이전에 비해 감소했고, SF 파트의 세계관은 으레 그렇듯 쉽지 않은 설명과 설득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 같다 최근의 몇몇 성공적 SF 영화들에서 보인 공통점은 ‘게임’ 속에 들어간 캐릭터(스필버그의 <레디 플레이어 원>, 숀 레비의 <프리 가이>)를 소재로 삼았다는 데 있다. ‘게임’이라는 설정 자체가 보는 사람의 보편적 인식 안에 이미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이미 완성된 ‘게임’이라는 안전한 틀 안에서 해당 게임의 특징적 요소만 보여주면 되기 때문에 새로운 세계관을 설득해 내기가 용이하다. 그러나 애초에 처음부터 세계관을 설계하고 전개한다면, 영화의 초반을 희생해낼 감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외계+인 1부>는 SF와 무협파트를 1부와 2부로 나누지 않고, ‘1부’로 개봉한 144분짜리 영상 안에 엇갈리게 배치했다. 그건 2부도 1부와 마찬가지로 무협과 SF가 교차하는 전개라는 의미일 것이다. ‘기도’의 세계와 ‘설명’의 세계가 결합하였을 때 애석하게도 최동훈의 장기인 대사의 힘은 소멸해버렸다. 그것이 본인이 다루고 있는 두 개의 장르. 무협과 SF를 통제함에 있어서 독창적인 대사는 오히려 통일성을 해친다는 판단으로 지양한 것인지, 혹은 두 개의 장르를 통제하는 것에서 이미 투여할 수 있는 모든 노동력을 소진해 대사의 완성도까지는 고려하지 못한 결과인지는 알 수 없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라면, 그저 창작자가 자신의 취향에 도취하여 혼자 즐거워 한 결과일지도 모를 일이다. <외계+인 1부>는 2023년 <외계+인 2부>를 예정하면서 끝난다. <외계+인 2부>에서는, <외계+인 1부>에 왜 최동훈의 인장이 이렇게 약하게 찍혀있었는지에 대한 납득할만한 설명을 확인할 수 있을까.
존 르카레에 대한 집단적 흠모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적확히 실현되다
1931년에 태어나 1961년 첩보 소설 <죽은 자에게 걸려 온 전화>로 데뷔한 영국 소설가 ‘존 르카레’는 이상하게 한국 영화감독들의 인터뷰에서 자주 언급되는 작가다. 존 르카레는 사기죄로 감옥을 드나들던 아버지와 존 르카레가 5살 때 부동산중개인과 함께 집을 떠난 어머니를 두었다. 기숙학교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스위스 베른 대학에서 독일 문학을, 옥스퍼드 대학에서 현대언어학을 전공했다. 이미 20대 중반에 이튼 칼리지에서 프랑스어와 독일어를 가르칠 정도로 뛰어난 언어능력을 보유했던 존 르카레는 1959년, 영국 외무부 공무원으로 특채된다. 그리고 곧 영국정보국으로 이직했다. 1961년에 발표된 존 르카레의 데뷔작 <죽은 자에게 걸려온 전화>는 존 르카레가 출퇴근하던 통근열차에서 집필했다. 즉 존 르카레가 첩보 소설가가 되던 그 순간에도 여전히 그는 실제 첩보원이었다. 존 르카레는 3번째 소설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를 발표한 뒤, 소설의 대성공 이후 첩보원을 그만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설(異說)로는 영국 정보부 최대의 첩보 스캔들이었던 ‘킴 필비 사건’(영국 상류층 출신으로 영국 정보부에 근무하던 고위급 공직자 ‘킴 필비’가 사실 소련의 스파이였음이 밝혀진 사건)으로 인해 존 르카레의 신분이 외부에 노출되었고, 그래서 첩보원을 사직할 수밖에 없었다는 주장도 있다. 존 르카레는 생전 이 질문들에 대해 답하지 않았고 2020년 사망하였으므로 진실은 끝까지 알 수 없다. 존 르카레가 평생에 걸쳐 읽어낸 명민한 현실감각과 동시에 그의 페르소나인 첩보원 ‘조지 스마일리’의 투철한 애국심을 생각하면 사임에 얽힌 두 가지 가설 모두 그럴 듯하다. 존 르카레의 본명은 ‘데이비드 존 무어 콘월’이다.
존 르카레는 작가 활동 내내 냉전기 영국과 소련의 대립에서부터 시작해 공산주의 붕괴 이후의 현실정세와 그 안에서 끊임없이 소모되는 첩보 세계의 인물을 추적했다. 그리하여 존 르카레는 몇 안 되는 분단국가이면서 동시에 선진국인, 기묘한 기반 위에 서 있는 ‘한국’의 창작자들에게 계속 언급되었다. 2012년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존 르카레의 소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이 소설이 존 르카레의 실제 삶에 큰 영향을 준 ‘킴 필비’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를 영화로 만들어 개봉했을 때, 박찬욱은 한 인터뷰에서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고 싶어서 판권 구매까지 알아봤는데 이미 누가 사 갔더라”라고 아쉬워했다. 박찬욱은 2017년 인터뷰에서도 다시 존 르카레를 좋아하는 작가로 꼽았고, 결국 2017년 연말 존 르카레의 소설 <리틀 드러머 걸>의 BBC 드라마판 연출을 맡게 된다. 2013년 류승완은 <베를린>의 개봉 인터뷰에서 프레데릭 포사이스, 로버트 러들럼, 존 르카레 같은 스파이소설의 마니아임을 자청하며 <베를린>의 뿌리가 존 르카레에게 있다고 설명한다. 2015년 김지운은 <밀정>을 만들 때 차갑고 건조한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존 르카레의 소설과 영화판을 참조했다고 밝혔다.
김지운이 이야기한 ‘차갑고 건조한 분위기’, 즉 ‘콜드 누아르’ 장르의 영화를 만들려는 창작자들이 계속 존 르카레의 영향력을 언급한다. 당연히 존 르카레의 소설은 콜드 누아르 적 정서, 그리고 에스피오나지(첩보) 장르의 창작에 있어 중요한 참고자료다. 그러나 존 르카레의 소설에서 ‘쿨함’의 정서를 떼어다 새로운 창작물에 이식하려는 시도는 맞는 듯 아닌 듯 가끔 아리송하다. 존 르카레의 ‘쿨함’은 ‘멋’의 의미를 지닌 쿨함이 아니라, ‘비루함’의 쿨함이다. 존 르카레의 비전은 비루하고 비정함으로 메말라버려 ‘건조’한 쿨이지, 우아하고 낭만적인 ‘멋’의 형상은 아니다. 언급한 한국 영화들이 상대적으로 차가운 정서를 가져가려고 한 흔적들은 보이지만, 존 르카레의 그 ‘비루함’으로까지 도달하고자 하는 시도는 그렇게 선명치 않았다. 그런데, 2022년 여름 한복판에 존 르카레식의 ‘비루함’에 가장 가까이 접근한 영화가 난데없이 등장했다. 그것도, 실연자가 아니라 창작자로서의 첫 작품을 만든 이정재의 손에서.
<헌트>는 1980년대 초반, 국가정보원 국내파트의 팀 리더 김정도(정우성)와 해외파트 팀 리더 박평호(이정재)가 각자 조직 내에 침투한 북한 스파이가 있다는 상황을 놓고 먼저 색출하기 위한 작전에 들어간다는 내용이다. 그리고 후반부로 가면, 이 내부 첩자의 색출을 건 전략게임에서 신념과 정의가 결부된 거대한 사건으로 확장된다. <헌트>의 원제는 <남산>이었고, 우민호의 <남산의 부장들>이 먼저 개봉하면서 <헌트>로 제목이 바뀌었다. 영화의 제목은 영어인 ‘헌트’로 바뀌었지만, 극 중의 인물들이 쓰는 용어들은 가능한 한 외국어를 피한 흔적이 보인다. 이를테면 영화에서 ‘스파이’라는 단어는 잘 언급되지 않는다. ‘동림’이나 ‘두더지’라는 용어를 쓴다. ‘동림’은 윤이상과 이응노, 천상병이 연루된 것으로 유명한 동베를린 간첩단 사건, ‘동백림’ 사건에서 모티브를 따온 용어로 추측된다. 그리고 여기서 다시 존 르카레로의 회귀. 존 르카레 소설에서 작가의 페르소나인 영국 정보부 요원 ‘조지 스마일리’가 필생 동안 추적한 라이벌이자 동독 첩보요원의 이름이 ‘카를라’다. 그리고 이 ‘카를라’를 영국 첩보부는 ‘두더지’라고 불렀다. 한국식 용어인 ‘동림’과, 존 르카레식 용어인 ‘두더지’의 결합.
여기서 <헌트>는 자신도 존 르카레의 첩보물에서 자양분을 얻었음을 슬쩍 내보인다. 그러나 이전의 한국 영화들이 견지해온 ‘쿨한 누아르’를 만들기 위해 존 르카레를 차용하는 전략과는 조금 다르다. 오히려 <헌트>는 서사의 구조만 본다면, 클라이맥스에서 존 르카레와는 다른 길을 간다. 존 르카레의 소설에서 총은 거의 격발되지 않는 데 비해 <헌트>는 초반부터 끊임없이 총격 액션 장면을 삽입하니 이 부분도 다르지만, 결정적 차이는 클라이맥스에 있다. 존 르카레의 소설에서 클라이맥스의 순간은 쾌감이 폭발하는 이벤트가 아니다. 주인공들이 필사적으로 알아내려 한 정보는 사실 거짓되었음이 밝혀지거나, 사력을 다해 성취하고자 한 목표는 허망하게 무산될 뿐이다.
이를테면 존 르카레의 대표작인 <추운 나라에서 돌아온 스파이>는 주인공인 첩보원 앨릭 리머스가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움직이지만, 클라이맥스에 가면 간단히 목표가 무산되고 앨릭 리머스의 운명은 마지막 페이지에 가서야 단 몇 줄의 기술로 마무리되어 버린다. 그러나 <헌트>는 클라이맥스에 가서 모든 인물이 거대한 이벤트로 빨려 들어간다. <헌트>가 어쨌든 여름 방학 시즌의 텐트폴 영화라는 산업적 배경을 생각해보면 필경 당연한 결과다. 그러나 <헌트>는 이전의 한국 영화들이 존 르카레를 인용하면서 올바르게 인용하지 못한 그 비루한 ‘무드’에 집중한다. 일제강점기를 다룬 <밀정>을 보면, 한국 영화에서 가장 ‘후까시’에 능한 김지운이 연출했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겠지만 냉전기보다 더욱 심각한 상황인 식민 지배 상태의 비밀결사들에서 ‘피곤함’이라는 인간적 감정이 소거되어 있다. 그러나 <헌트>에 등장하는 박평호와 김정도, 그리고 그들의 조력자들에게는 모두 ‘피곤함’의 감정이 짙게 드러난다. 이를테면 유사 부녀관계임을 대놓고 드러내는 박평호와 그가 보호하는 정보원의 딸 조유정(고윤정)의 서사는 박평호가 유능하고 스타일리쉬 한 첩보원처럼 보이는 걸 방해한다.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은 유사 자녀의 뒤치다꺼리를 위해 이리저리 움직이는 박평호의 모습은 ‘생활인’으로서의 동질감에 가깝다. 존 르카레의 소설이 강력하게 독자를 이입시키면서 동시에 감정적으로 치솟도록 만드는 힘은 고도의 기능적이고 특수한 업무에 종사하는 첩보원이 ‘노동자’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증명하는 데 있다. 일선 노동자들이 겪는 노동의 현장은 내부에서의 배신과 승진을 위한 협잡, 보신주의에 눈이 먼 지휘부와 소모되는 말단직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건 영국 정보부건 미국 정보부건 북한 보위부건 한국 정보부건 다르지 않고, 집단 속에 움직이는 가련한 장기 말들의 운명도 마찬가지다.
다시 <헌트>가 지닌 산업적 한계. 어쨌든 <헌트>는 여름 시즌 기획영화로서 상업적 흥행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경주해야 하는 영화다. 그리고 <헌트>가 주요한 정서를 인용하고 있는 존 르카레의 소설엔 첩보원들이 펼치는 액션 활극이 없다. <헌트>는 절정 부에 와서 두 가지 이질적 목표. 여름 시즌 전략 영화로서의 외적 목표와 첩보-작가주의 영화로서의 내적 목표를 결합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러니까 거대한 파열을 동반한 마지막 파국의 무대로 김정도와 박평호를 내몬다. 단, 무대 위로 등장인물들을 불러올리기 이전에 이미 이들이 모두 실패할 것이란 암시를 심어둔다. 파국의 무대에서 발사되는 총탄과 기폭 되는 폭약의 스펙터클은 <헌트>의 허망하고 비루한 존 르카레적 결말을 마스킹하는 구조물이다. 이 파국의 무대에서 피어오르는 스펙터클이 비루함의 정서를 감추기 위한 것이었음은 영화가 등장인물의 운명을 묘사하는 에필로그에서 직접 증빙한다. 다만, <헌트>의 각본가이기도 한 이정재는 존 르카레에게서 냉전기라는 피로사회를 견뎌내는 첩보원들의 비루함이라는 중요한 정서를 정확히 인용하면서도, 마지막 순간 어떤 희망을 본다. 존 르카레는 냉전이 끝난 이후에 발표한 일련의 작품들, 이를테면 <콘스탄트 가드너>같은 작품에서 강인하게 버텨내는 인간들이 살아갈 내일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남겨두었다. 냉전기의 첩보원들이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을 감추며 끝내 이루고자 했던 허망한 꿈은 이미 부서졌지만, 부서진 꿈의 조각 속에 담겨있던 희망의 불꽃을 건네받은 다음 세대들은 자신을 숨기지 않으며 불온한 세상에 맞선다. 그건 영화의 배경인 1983년으로부터, 4년 뒤의 역사가 증명한다.
※ 이 글은 한국예술종합학교 부설 예술과젠더연구소의 학회지 <NW4.5>를 위해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