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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무형 Mar 08. 2024

스물 일곱, 서른 일곱

나고야의 어느 친절한 사장님이 구해주신, 풀카운트 데님 0105 모델



음악 이야기를 조금 해볼까요. 요즘의 힙스터들이 라디오헤드와 오아시스를 들으면서 더 이상의 음악이 없다는 투의 인스타 게시물을 올려놓은 걸 가끔 봅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이 듭니다. 라디오헤드와 오아시스가 활발히 활동하던 때, 아니면 활동이 중단된 직후 즈음부터 이 밴드들을 알게 되어 좋아했던 제 나이대의 세대로서는 아마 동의하실 겁니다. 물론 저보다 윗 세대께서도 동의하시겠지요. 사실 저는 스웨이드를 가장 좋아했습니다만. 그리고 물론 너바나도 당연히 좋아했죠.


 하여튼. 스물 여섯살의 저는, 너바나의 "Heart-Shaped Box"를 들으면서 매우 조급해 하고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스물 일곱 전에 큰 업적을 남겨야 했기 때문입니다. 글을 끄적거리던 고등학생때부터 저는 제가 천재라고 믿었습니다. 지미 헨드릭스도, 제니스 조플린도, 짐 모리슨도, 그리고 커트 코베인도 불꽃같이 타오른 26년의 세월을 살아내고 스물 일곱살에 사망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저는 제가 당연히 26살까지 대단한 업적을 남기고 27세에 죽음을 맞이할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무료하고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은 채 스물 여덟이 될 거라곤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죠. 


 하지만 스물 여섯살의 저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군대를 다녀와 복학하고 졸업을 앞둔 예술대학교 학생이었습니다. 그것도 졸업작품을 쓰면서 이 단어를 쓰냐 마냐를 가지고 지도교수와 지루한 입씨름을 하는 비루한 학생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동기는 동나이대에 큰 성과를 냈죠. 저는 점점 더 마음이 급해졌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뤄내지 못한 채 스물 여덟을 맞이했습니다. 저는 '27세에 요절하는 천재클럽' 멤버가 아니었던 거죠.


 그리고 지금 저는, 그때보다 열살 더 나이 먹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설날이 지났으니까 이제는 빼도 박도 못 하겠네요. 지금의 저는 제가 천재라는 생각은 1도 없고, 무능하고 아둔한 인간이라는 것을 너무 오래전에 인정해서 이젠 그런 제 자신에게 화도 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비루하고 이 세상의 보조출연자 같은 누군가 에게도 빛나는 순간이 있었음을 이해하는 조금 더 좋은 사람이 되었는지도 모릅니다. 그건 제가 너무도 당연히 스물 여덟을 맞이한 이후에 만난 좋은 사람들의 덕일 겁니다. 이를테면, 지난 나고야 여행에서 저를 위해 풀카운트의 0105W 모델을 다른 가게에 수배해 가져다 주셨던 중년의 어느 일본인 사장님 처럼 말입니다. 


 뜨내기 여행자를 위해 제품을 수배해 준 사장님의 친절이 담긴 바지를 입고 나고야 공항에 앉아 비행기를 기다리면서, 서른 일곱의 제가 되기까지 자신들의 인생에서 한 부분을 제게 내어준 이들을 생각했습니다. 비록 저는 스물일곱에 요절하는 천재클럽 멤버는 아니었지만, 서른 일곱까지 살아왔으므로 행복한 순간들을 더욱 많이 누릴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저는 저 자신을 용서하기 위해 스물 일곱으로 부터 10년의 시간을 더 살아온 건 아니었을까 합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다음의 10년엔 무엇이 있을까요. 절망스러웠던 스물 일곱의 밤 보다는, 조금은 충만한 서른 일곱의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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