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어도 브레이크도 없는 인생
【블루재스민】

by 글로


86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2014)

우디 앨런 감독, 케이트 블란쳇 주연


김창옥 강사는 말한다. 네덜란드에서 아주 특이한 광경을 많이 보았다고. 다름 아닌 픽시(Fixi) 자전거. 기어변속도 안되고 브레이크도 없는 자전거들의 행렬. 우리나라처럼 언덕이나 경사가 있는 곳에서는 위험한 이 픽시 자전거가 네덜란드에 많은 건 끝없는 평지가 펼쳐지기 때문이란다.


이렇게 인생도 평지만 계속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한치 앞을 모르는 것이 인생인 걸 감안하면 좋은일도 나쁜일도 생길수 있다는 얘기가 된다.



여기 아주 나쁜 일로 평지에서 심한 경사길을 걷게 되는 한 여자가 있다. 이름도 우울한 블루 재스민.

입양된 자매 재스민과 진저

재스민은 할과, 진저는 오기와 결혼한다.


둘의 생활은 매우 다르다. 소설 ‘모순’의 안진진 엄마와 이모처럼. 재스민은 사업가 할을 만나 초호화 생활을 누리고 아들도 있다. 진저는 잘 사는 언니네 집에 놀러와 사업 얘기를 하다가 할의 사업에 투자하게 된다. 복권에 당첨되어 돈이 생긴 것이다. 할은 습관적으로 바람을 핀다. 아내인 재스민만 모르고 있다. 할은 길거리에서 FBI에게 체포되어 감옥에 갇힌다.


이 거대한 금융사기를 저지른 것이다. 체포되어 간 이유는 이와는 다르다. 10대 프랑스 여자아이와 바람을 피운 것이다. 얘기는 현재에서 과거로 넘나들며 펼쳐진다. 재스민이 오갈 데 없어 동생인 진저의 집에 온다. 비행기 안에서 모르는 여자에게 온갖 얘기를 혼잣말처럼 중얼거린다. 정신에 이상이 생긴 것이다.


잘 나가는 고위공무원 드와이트를 만나 사랑에 빠지고 약혼반지를 고르러 간다. 길거리에서 우연히 진저의 전 남편인 오기를 만나 모든 사실이 발각된다. 재스민은 자신의 과거를 철저히 감추었다. 모든 것이 드러나자 둘은 차 안에서 격렬히 싸운다. 재스민을 비난하는 드와이트, ‘사랑이면 극복할 줄 알았다’고 항변하는 재스민.

블루에는 ‘우울한’ 이라는 뜻이 있다. 푸른 눈을 가진 재스민, 그리고 매우 우울한 재스민. 숨이 쉬어지질 않고 극도로 흥분하면 약을 복용해야한다. 폭풍같은 충격으로 정신이 불안정한 재스민은 어디에나 약을 달고 다닌다. 마스카라가 번지도록 우는 일은 흔하다.




남편이 어느 날 바람을 피고 들어와 당신에게 얘기할 것이 있다고 하며 이번 여자는 다르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서 정신을 온전히 붙들고 있을 아내가 있을까? 주변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고 본인만 모르고 있었던 남편의 외도. 거대 금융사기, 결국 남편은 자살하고 아들은 집을 나간다.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비운의 주인공 재스민은 현실에 발을 붙이고 살아가기 위해 애쓴다. 그러나 과거의 환영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일을 해본 적이 없으니 현실부적응자가 된다. 여전히 우아해야하고 옷은 샤넬, 가방은 에르메스다. 겉모습은 부유하지만 마음은 가난하다.


경사길에서 속도를 늦추거나 멈출 수 있는 기어와 브레이크가 없는 픽시자전거를 타고 있다. 계속 평지인 줄 알고 달린다. 인생은 납덩이를 매단 듯 무겁고 이겨낼 수 있는 힘은 내장되어 있지 않다.


현실을 받아들이고 가진 만큼 만족하며 사는 진저와 달리 재스민은 과거를 잊지 못한다. 자신을 단번에 다시 상류층으로 끌어올려 줄 남자를 기다린다. 하지만 현실은 그녀의 편이 아니다. 꿈을 쫓을 필요는 있지만 꿈이 실현되지 않을 수도 있다. 대부분은 쫓기만 하다가 끝날 공산이 더 크다. 꿈이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실망에 젖어 현실을 망칠 수는 없다. 평범함 속에서 빛나는 하루를 잘 채웠다면 좋았을걸. 재스민은 감각을 잃었고 정체성을 상실했다. 유연한 정체성 갖기에 실패한 것이다. 오랫동안 몸 담았던 익숙한 환경은 새로운 곳으로의 변화를 두렵게 한다. 더구나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가기란 몇 배 더 힘들 것이다.




하루 아침에 벼락 부자가 되기는 어렵지만 그 반대의 경우는 쉽게 일어난다.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코어를 잃지 않고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은 아니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삶이 고양된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더 흔하다. 어려움에 처한 경우 회복탄력성을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의 최후는 많이 다르다. 과거를 딛고 평범하게 살아가는 자가 있다. 또한 이전의 모습을 내내 그리워하다 현재의 생활을 망치는 자도 있다.


어떠한 경우와 환경에서도 버텨내야하는 것이 인생이라면 재스민의 경우는 실패작이다. 과거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결국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렸다. 남편의 잘못이지만 남편에게 모든 것을 의지하며 살아온 재스민은 잘못이 없을까?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최후의 경우에 생계를 위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재난 같은 일은 얼마든지 찾아올 수 있다. 불청객은 우리가 거부한다고 해서 지나가지 않는다. 내 인생에 끼어든 반갑지 않은 모든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 처리하느냐가 결국 인생을 살아내는 실력이 아닐까?

어려움과 장애물을 잘 극복해나가며 사는 사람들을 보면 그 내공에 놀라곤 한다. 타고 태어난 무신경함이 있다면 모를까, 대부분의 경우 트라우마를 겪기 마련이다. 그러나 슬픔에 잠겨 좌절한들 시간은 빨리 흘러가지 않는다. 치욕스럽고 자존심이 상한다 해도 그 또한 나의 인생이라면 받아들여야한다. ‘영원한 천국’을 집필한 정유정 작가의 말처럼 야성을 회복해야한다. 그것만이 한 개인이 어려움을 뚫고 나갈 진정한 원동력이 아닐까 싶다.

keyword
이전 09화우리는 진실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스포트라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