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Whale
95회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분장상 (2023년)
대런 아로노프스키 감독, 브렌든 프레이저 주연
찰리는 남자에게 끌려 부인과 딸을 버리고 사랑을 선택한다. 미치게 사랑했지만 연인 엘런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그 후 찰리는 어둠 속에 자신을 방치한다. 집에서 온라인 강의를 하며 생계를 꾸리고 사회생활은 하지 않는다. 폭식으로 거구가 되어버린 몸, 정신적 우울감으로 집에 갇혀 지낸다. 엘런의 동생 리즈만이 찰리를 돌본다.
이제는 한계상황이 되어버렸다. 272킬로그램의 몸무게, 움직이지 않는 찰리.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을 주울 수도 없다. 화장실을 가려면 보조스탠드를 써야 한다. 냉장고와 씽크대에는 온갖 정크푸드만 가득하다. 거의 매일 피자를 배달시켜 먹는다.
살기 위해 먹는 음식이 본인을 서서히 죽음으로 내 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지만 멈출 수가 없다. 그렇게라도 해야 부인과 딸, 죽은 연인에게 속죄가 되는 듯 자신을 학대한다. 숨은 가쁘고 심장은 찢어질 듯 아프다. 리즈는 그에게 선언하듯 말한다. 병원에 가지 않으면 일주일 안에 죽을 거라고.
영화는 월요일부터 시작된다. 화요일 그리고 수요일, 하루 하루 급격히 찰리의 상태는 나빠진다. 죽음을 예감했던걸까? 유일한 삶의 희망 딸, 엘리를 부른다. 엘리는 매우 반항적이고 거칠다. 대놓고 아빠에게 욕을 하고 역겁다고 무시한다. 왜 어린 나이의 자기를 버렸냐고, 제자인 남자친구와 재미 보려고 가정을 버린 사람이 어떻게 아빠냐고 창피하다고 다신 자기를 부르지 말라고 외친다. 그러나 찰리의 한마디에 돌아선다. 돈을 주겠다고, 여기 와서 에세이를 쓰면 전 재산을 주겠다고 말하자 엘리는 귀를 의심하며 돌아선다.
찰리를 찾아오지만 딸은 오히려 부탁한다. 자신의 에세이를 써달라고. 비난투가 전부인 딸의 어떤 말도 찰리는 부드러운 노래처럼 사랑스럽다는 듯 다 받아준다. 그리고 미안하다고 말한다. “너는 내 인생 최고의 작품이야. 그 에세이는 너야. 넌 훌륭해” 라며 딸에게 하고 싶었던아껴둔 말을 쏟아낸다.
삶의 희망을 걷어낸 듯 살고 있던 찰리는 자신이 번 돈 거의 전부를 모아 엘리에게 주려고 한다. 병원에 가는 대신 딸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무슨 말로 설득해도 병원을 가지도, 구급차를 부르지도 않고 죽어간다.
모비딕에 나오는 어부는 자신의 다리를 앗아간 고래를 잡기 위해 복수를 결심한다. 복수만이 인생의 목표이자 과제인 듯 고래를 찾아 헤맨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들이 얼마나 허망하고 자기 파괴적인지 알고도 그러는 것일까? 아무 감정도 없는 고래에게 복수하겠다고 인생을 걸 필요가 있을까?
나는 무엇에 인생을 걸었나? 상대는 알지도 못하는 감정에 대해 혼자 지레짐작으로 판단하고 앙심을 품었던 적은 없었나? 죄책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나를 파괴하듯 지내온 적이 있던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기본적인 본능에 사로잡혀 균형이 깨진 생활을 한 적은 없었나?
영화를 보면서 주인공의 연기가 대체 불가능할만큼 휼륭하다는 생각을 했다. 272킬로그램의 몸을 만든 분장능력도 대단했다. 마치 실제 인물인 듯 배우가 배역을 잘 소화해 몰입도가 높았다. 얘기는 다소 극단적이지만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이다. 경중의 문제가 있을 뿐이다.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 자신의 실패, 마음대로 되지 않는 인생에서 회복탄력성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찰리와 같이 생활할 수도 있다.
순수하다고 얘기해야 할까? 연인의 죽음에서 빠져나올 수 없는 사람. 자신을 죽여가면서 속죄하는 사람, 그 순수성은 찰리를 서서히 파괴하고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한다. 그러나 어쩌지 못하고 그 수렁에 빠져들고야 만다. 구원의 손길도 거부하고 오롯이 속죄하려는 사람. 타인의 죽음을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이기로 한 사람.
‘사람은 타인에게 무관심할 수가 없어. 사람은 놀라운 존재야.’
길을 지나가던 한 사람이 하늘을 보면 주변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함께 하늘을 쳐다본다는 실험은 유명하다. 인간만이 그런 행동을 한다. 동물은 한 개체가 하늘을 본다고 동시에 함께 하늘을 쳐다보지 않는다.
인간은 인간에게 무심할 수 없다.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 가족을 버리며 찾은 사랑의 죽음에 찰리는 무관심할 수 없다. 어떻게든 살아내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슬픔은 그의 뇌를 장악해버리고 철저히 몸을 망가뜨림으로써 자신만의 세계 속으로 빠져든다.
옆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든, 사랑하는 사람이 무슨 일을 당하든 훌훌 털고 잘 살아내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겉으로는 정상으로 보이지만 속으로는 시퍼런 멍이 들었을 것이다. 그래도 살아내야 하는 잔인한 인생, 내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어 보이는 인생. 찰리의 딸도 아빠에 대한 극도의 분노로 자신을 무너뜨리고 있는 중이다. 험한 말을 하고 SNS에 아빠의 외모를 비하하는 글을 올린다.
안타까운 모습에 찰리는 딸을 격려한다. 나는 그러지 못했지만 너의 모습은 아름답다고, 잘 살아달라고 부탁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실패를 겪으며 자신의 이성을 통제하지 못했던 경험들은 모두 있을 것이다. 어떠한 일이 있어도 자신을 다잡으며 요동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극단의 이야기로 우리에게 위로와 메시지를 던지는 영화, 더 웨일, 괜찮은 영화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