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을 그만두면 큰일 나는 줄 알았다. 넘쳐나는 시간을 무엇으로 채울 수 있을까? 시간의 쓰나미를 감당할 수 있을까? 누구랑 놀지? 앞으로 몇 십년의 시간이 남아 있다고 가정하면 앞이 까마득했다. 일을 할 생각에 지치기도 하지만 막상 일을 그만 두자니 돈줄이 끊기는 건 고사하고 시간을 때울 일이 제일 걱정이었다. 내가 아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일을 하고 있으니 누구와 함께 시간을 보낸단 말인가? 15년 전 TV도 없앴는데 다시 사야 하나?
걱정들이 무색하게 지금 바쁘다. 핸드폰 속 캘린더에는 하루도 빈칸이 없다. 연예인 스케줄 뺨치는 폰을 보고 남편이 어이 없어 하며 말한다. ‘일하는 나보다 당신이 더 바쁘네.’ 차 트렁크에는 가방이 즐비하다. 보부상이 따로 없다. 팔러 다녀야 하는 책부터, 골프가방, 수영가방, 각종 신발, 등산장비까지 아무리 정리를 해도 너저분하다.
30년간 직장 다니며 두명의 딸 육아. 숨 쉴 틈 없이 살았던 시간이 흘러 50대 중반이 되었다. 일을 그만 두어야 하는 상황 앞에서 제일 걱정한 것이 시간을 어떻게 보낼까이다. 여유로운 시간을 갖고 싶었는데 이제는 시간에 매몰될까 겁이 났다. 직장에서 1,000여명의 사람들이 내는 소리를 들으며 조용하게 살고 싶다던 내가 옆에 사람이 없을까 걱정이다.
걱정은 쓸모없었다. 지금 모임이 10손가락을 다 세어야 할 정도로 많다. 인생사 걱정을 한다고 걱정이 없어지는 건 아닌가 보다. 흘러가는 대로 살면 될 것을 물같은 인생을 그렇게도 쥐어보겠다고 계속 물을 떠올렸나보다.
어느 덧 중년을 맞고 직장도 그만둔 한가한 사람이 되었다. 관광객이 꽉 채운 바닷가를 원래 주인이던 자연이 와서 채우듯 내 마음은 풍요로움으로 채워져 있다.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몰라 막막했던 시간이 오히려 모자라 요일을 하루 더 만들고 싶을 지경이다.
노는 것도 일처럼 하는 성향도 문제가 있긴 하지만 이전의 걱정은 쓸데 없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이렇게 비교적 일찍 직장을 그만 두게 될 줄, 책을 쓰게 될 줄, 노래앨범을 발매하게 될 줄, 많은 모임을 하게 될 줄 몰랐다.
파친코에서 주인공 모자수는 얘기한다. 인생은 파친코와 같다고. 앞으로도 어떻게 펼쳐질지 알 수 없다고. 키를 내가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오만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내 앞에 어떤 길이 펼져진대도 크게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않을 작정이다. 그렇게 오랜 세월 살았는데 아직도 더 새롭거나 놀랄 일이 있을까 싶겠지만 어떻게 알겠는가? 희망은 아직 있는법. 다시 도박하는 심정으로 인생의 스틱을 돌려본다. 완전한 중년을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