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양한 사람들과의 만남은 편협했던 인간관계에 새로움과 변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들과 함께 했던 공원에서의 바비큐 파티를 잊을 수 없다. 멜번에서 교회에 출석 했는데 한번은 교회 친구들과 공원에 놀러갔다. 호주 대부분의 공원에는 바비큐 시설이 구비되어있다. 한 켠에 장작이 마련되어있다. 난로처럼 밑에 장작을 넣고 위에서 고기를 굽게 되어있다. 우리도 마트에서 사간 고기와 소시지를 호일에 싸서 제육볶음처럼 구워먹었다.
외국 친구들과의 만남은 더 얘기해서 무엇하겠는가? 최고의 친구를 꼽으라면 단연 1학기 때 살았던 중국인주인 딸 탬(Tam)이다. 참고로 탬은 20살. RMIT대학에 들어갔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하는 탬이 보여준 친절과 순수한 마음은 잊을 수 없다. 탬에게서 살아있는 영어를 많이 배웠다. 함께 음식을 만들고 식사하고, 산책을 하며 다양한 주제의 대화를 나누었다. 아낌없이 퍼주는 탬. 그래서 탬의 아빠는 딸의 그런 점을 걱정하기도 했다. 너무 착하기만 하다고.
또 고마운 친구를 꼽으라고 하면 스테파니(Stephanie)다. 같은 수업을 듣는 대만 친구였는데 호주에 이민와서 살고 있다. 남자친구는 파키스탄인이다. 한 동네에 살고 있어 나를 라이딩 해주었다. 수업이 7시 30분에 끝나고, 차도 없고 버스는 끊기고, 택시는 비싸서 탈 수가 없었다.
스테파니는 한 학기 동안 일주일에 두 번 집에 데려다 주었다. 한 번은 같이 수업을 듣지만 다른 수업은 일부러 집에서 학교까지 데리러 오는 것이다. 싫은 내색도 없고 뭘 바라지도 않는다. 자기도 똑같은 경험이 있으니 미안해하지 말라고 얘기한다.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나의 부모도 아니고 형제 자매도 아니고 그냥 친구인데 이런 호의를 베풀 수 있나?’ 이해가 안 갔지만 스테파니는 당연하다는 듯 즐겁게 라이딩해주었다. 한국인의 바쁘고 쪼들리는 마음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마인드였다. 미안하고 고마웠다.
6개월을 함께 생활한 호주 친구 벡(Bek-Rebbeca의 애칭)도 잊을 수 없다. 영화를 좋아하고 씩씩하다. 전형적인 스코틀랜드 조상의 피가 흐르는 호주인 벡. 한번은 그녀의 엄마가 퀸스랜드에서 딸을 보기 위해 와 약 10일간 머물렀는데 둘이 장난치고 웃는 모습이 모녀지간이 아니라 자매 같았다. 너무 허물없어 보였다.
호주에서의 마지막 날 새벽 비행기를 타기 위해 4시에 집에서 나가는데 거실에 내어놓은 나의 배낭위에 벡이 쓴 편지가 놓여있었다. ‘한국 가면 잘 도착했는지 꼭 연락하고 다시 멜번에 오게 되면 자기 모른 척 하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쉐어 하우스에서 셋이 살고 있을 때 혹시 한 친구가 집에 안 오면 둘이 남게 된다. 친구들과 노느라, 혹은 다른 볼일 때문에 늦게 되면 우리는 서로를 챙기며 문자를 남겼다.
‘오늘 몇 시쯤 집에 들어갈 것같다, 어디에서 자고 갈 거다’라고 연락했다. 호주는 대부분 단독주택이고 동네가 어둡다. 아파트 대단지가 아니라 단독주택들이 옆으로 늘어서있다. 혼자 큰 단독주택에서 잠드는 건 힘든 일이다. 벡도 그랬나보다. 대학원수업이 늦게 끝나 밤에 귀가하면 서로 연락하며 마음을 안정시켰다. 항상 고마웠다.
벡에게는 또 한 가지 고마운 것이 있다. 긴 리포트나 과제는 로즈마리교수가 교정해주었지만 발표내용이나 멘트, 대화표현, 그리고 짧은 과제등은 벡에게 교정을 부탁했다. 언제나 자기 일이라는 듯 받아주었다. 심지어 환호까지 했다. ‘예!’하며 나의 과제를 받아든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본인도 할것이 많은데 나의 과제를 교정해주었다. 틀린 부분에 이모티콘으로 스마일도 그려가며 자연스럽게 문장을 고쳐주었다.
보답으로 맛있는 간식을 사다주었다. 두 학기를 함께 쉐어했으니 꽤 오랜 기간 한 집에서 생활한 것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공부로 영어가 늘었다기보다 친구들과 시간을 보내며 좋아졌다. 어려운 단어, 정확한 단어를 쓰는 것보다 무슨 말이든 넣어서 문장을 끊기지 않게 이어나가는 것이 중요했다. 물론 듣기가 됐을 때 얘기다. 어려움이 있지만 일상생활 회화는 상황과 표정과 여러 가지 제2의 언어로 이해에 도움을 받았기 때문에 별 무리는 없었다.
돌아보면 고마운 사람들 뿐이다. 처음에 기숙사에서 나올 수 있게 도와준 영어교육학부 한국인 동생, 외롭지 않게 교회를 소개시켜 준 친구, 그리울 때쯤이면 때맞춰 한국 음식으로 밥상을 차려주시던 목사님 내외분, 나이든 나와 함께 놀아준 교회 친구들. 쉐어메이트들, 학교의 외국인 친구들과 교수님까지 모두 고맙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그들이 없었다면 무사히 공부를 마치고 돌아올 수 있었을까?
따지고 보면 이 모든 것이 가능하게 했던 것은 한국에 있는 시댁의 형님과 아주버님 덕분이다. 형님 아들이 5살이라 우리 딸과 함께 유치원을 다녔다. 위에 초등학생 딸도 있다. 자신의 아이 둘 건사하기도 힘든데 우리 딸을 1년 반동안 케어해주셨다.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고마운 마음이 크다. 남이 하는 일은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내가 해보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안다. 품이 넓고 큰 분이라 가능한 것이 아닌가 싶다.
우리딸은 아토피피부염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그때 당시 형님은 강원도 고한 시골에서 근무하셨다. 중학교 사회선생님이다. 주말이면 아주버님과 산으로 나물을 뜯으러 다니셨다. 아이 셋을 데리고 다니셨다. 딸아이가 산나물과 좋은 공기덕분에 방학 때 들어가보면 피부가 놀라보게 좋아져있었다. 공기와 섭생이 얼마나 피부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 처음 알았다. ‘우리 아이 피부가 이렇게 좋아질 수 있구나!’ 내내 빨갛고 거친 피부가 뽀얘지고 반질반질해졌다. 여러모로 고마움을 느꼈다. 미안함보다는 고마움으로 감정을 바꿔 두고 두고 보답하기로 했다. 잘 되지 않지만 마음은 늘 그대로다.
*비빔밥을 만들 때, 어머니는 흰 쌀밥에 여러 가지 나물들과 고추장, 들기름을 넣고 비볐다. 제삿날이나 명절날처럼 많은 양을 비빌 때는 주걱을 썼는데, 청동주걱이 아니라 나무주걱을 썼다. 나무주걱은 청동주걱보다 재료에 가해지는 힘이 약하다. 내가 어머니를 도와서 주걱을 들고 비비면 어머니는 ‘살살 비벼라. 으깨지 말고 치대지 마라. 반죽을 만드는 게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로 엉겨붙어 누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가 아닌 서로의 개성을 존종하고 지켜주면서 도움을 주는 관계, 옆에 있지만 다른 사람의 영역을 침해하지 않으며 지켜주는 관계, 강압없이 알맞게 여유롭게 맺는 관계는 살살 비빈 비빔밥처럼 조화롭다.
*출처: ‘허송세월’ (김훈, 나남, 20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