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현 Oct 06. 2020

동서양의 만남 그리고 충돌

김보현의 미술 읽기

무제, 캔버스에 유채, 255x213cm, 1957 ⒸThe Sylvia wald and po kim gallery,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방인의 길

   1917년 창녕에서 태어나 2014년 뉴욕에서 생을 마감한 김보현(Po Kim)은 화려한 추상 미술과 단정한 구상미술 세계를 동시에 선보인 미술가이다. 그는 일본에서 미술을 배워 귀국한 후 광주에 정착하여 조선대학교에서 미술을 가르쳤다. 그러나 그 당시 불안정하였던 정세에 따라 미군정과 북한군 치하의 상반된 두 상황을 겪으며 두 곳 모두에게 불려 가 취조와 고문을 받는 경험을 하였다. 1950년대 한국 사회가 당면한 이데올로기의 문제의 희생양이 된 김보현은 생존의 기로에서 일리노이대학교 연구원으로 초청받아 미국으로 이주를 감행하였다. 그리고 한국에서 경험한 일을 잊기 위하여 미국에 정착하였고, 아예 시민권을 획득하여 이방인의 길을 선택하였다. 수중에 300불만 쥐고 도미하였기에 이주 초기에는 넥타이 공장에서 일을 하며 고생을 하였지만 한국에서 그가 경험한 공포는 트라우마로 남아 그를 미국에 머무르게 한 것이다. 1950년대 미국은 추상 미술을 한창 선보이는 시기였고, 김보현이 경험한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기억은 아픈 흔적처럼 자연스레 추상표현주의의 미술과 잘 어우러졌다. 이후 그는 구상 미술과 추상 미술을 결합한 미술을 선보인다. 실제와 똑같이 자연물을 묘사하되, 그 배경은 실제 존재할 수 없는 세계를 그렸는데 이렇게 탄생한 그의 작품은 그만의 세계를 형성하게 되었다. 그리고 규모가 큰 벽화와 같은 그림을 그리며 다시 추상 미술로 변모하였다. 흔적과도 같이 그어진 붓질과 색 테이프의 조화는 화려하고 또 환희에 가득한 느낌을 전달하는 회화 작품이 되었다. 생존을 위하여 이방인이 되기를 선택한 김보현의 미술은 완벽히 한국인의 미술도, 또 미국인의 미술도 아닌 그만의 미술 세계가 되어 고통과 두려움이 없는 화려하고 또 기쁜 그만의 세계를 구축한 것이다.


무제, 캔버스에 유채, 240x210cm, 1957 ⒸThe Sylvia wald and po kim gallery,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1950년대 세계 2차 대전을 경험한 유럽의 미술 시장이 흔들리던 무렵의 미술가들이 대거 이주하며 세계 미술 시장의 무대를 미국으로 옮기고 있었다. 그 당시 유럽에서는 전후의 경험을 반영한 추상미술이 대세를 이루고 있었으며 미국으로 옮겨와 더욱 커다란 스케일로 변모하며 다양성을 더하였다. 1955년 미국으로 이주한 김보현은 자신의 개인적인 경험에 기인한 추상 표현주의 작품을 선보였다. 당시 김보현의 작품은 어두운 색감과 반복적인 신체성을 투영하여 거칠게 자신이 경험한 고통의 흔적으로 표출하였다. 그의 추상표현주의는 마치 필묵에 기인한 화법으로 서서히 미국 화단에서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김보현은 시민권 획득 후 미국에서의 생활이 안정되며 1970년대에 사실주의적인 구상 미술과 추상 미술이 결합한 미술 세계로 나아갔다.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호두와 브로콜리, 양파. 복숭아, 물고기 등의 사물을 극사실적으로 표현하였으며 그 사물의 배경은 흰색으로 비워두었다. 이후 추상적인 배경을 그리기도 하였으나, 하얀 배경의 극사실 회화는 서구인들의 눈에 익숙지 않았으나 사물의 존재에만 집중한 독특한 느낌을 전달하고 있다. 또한 극사실적으로 표현된 사물은 수채화로 표현한 듯한 은은한 톤으로 선보였으며 서정적인 느낌마저 주고 있었다. 이렇게 표현된 그의 그림은 미국의 화단에서 동양적이라고 평가받았다. 마치 먹으로 여백을 고려하여 흰 화선지에 그린 듯한 분위기를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탐구는 다시 추상 미술로 환원되었으나 도미 초기의 어두운 분위기가 아닌 밝고 희망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김보현은 1955년 미국으로 이주한 이후 1988년까지 한국에 방문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후 한국과 교류하며 그의 작품은 새로운 세계를 향하게 되었고 작품의 규모도 점점 확대되어 마치 그만의 세계를 확장시키는 듯 보인다.


복숭아 III, 종이에 색연필, 54x77cm, 1970년대 ⒸThe Sylvia wald and po kim gallery,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인간은 자신의 어둡고 힘든 기억은 잊어버리려고 하는 망각의 본능이 있다. 김보현의 한국에서 경험한 사건이 그러했다. 미군에게 그리고 또 북한군에게 영문도 모른 채 고문을 받는 시련을 겪었고 불안감에 휩싸여 늘 약을 먹어야 할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경험은 스스로 한국과 인연을 단절하면서까지 지우고 싶은 기억이었다. 그러나 고향의 기억은 고통만이 존재하는, 그리고 쉽게 잊히는 것이 아니었다. 길의 경찰관만 봐도 느껴지는 불안감 때문에 한국으로 귀국할 수는 없었지만 그만큼 마음속의 고향을 향한 애절함은 점점 커져갔고, 이러한 감정은 그의 그림 속에 그가 지향하는 그만의 유토피아를 창조하였다. 김보현의 후기 작품을 보면 그가 키우던 새가 자주 등장하고 또 밝은 색상에 자유로워 보이는 사람들이 자주 등장한다. 이를 통하여 유추해 보면 김보현의 세상은 경계가 없이 자유롭고 또 밝고 희망찬 세계였다. 이러한 그의 작품은 전후, 고향을 떠난 미술가들의 작품과 유사한 특징을 지니고 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 프랑스에서 활동한 마르크 샤갈을 비롯하여 한국의 이성자와 같은 미술가들은 현실과 괴리된 물리적 고향을 그리워하며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은, 그만의 고향인 유토피아를 추구하였다.  

   김보현은 뉴욕의 중심이자 추상미술을 주도해 온 아스터 플레이스에 오랜 기간 거주하며 삶을 마무리하였고 구겐하임 뮤지엄에서 장례식을 치렀다. 이러한 그의 행보는 한국의 초기 추상미술을 시도한 미술가이자 당시 추상미술이 활발히 전개되던 미국의 화단에서도 추상 미술을 풍부하게 한 공로를 인정받은 미술가로 자리매김하였다. 김보현의 작품은 생전에 거주하던 뉴욕의 건물에 갤러리를 조성하여 자신과 부인의 작품을 영구적으로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국내에서는 자신이 초대 미술대학교수로 부임하였던 조선대학교 미술관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날개, 지느러미 그리고 얼굴, 캔버스에 아크릴릭, 180x152cm, 1990 ⒸThe Sylvia wald and po kim gallery, 국립현대미술관 제공


*이 글은 월간 비자트와 중기 이코노미에 기고되었습니다

이전 14화 유토피아를 꿈꾸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