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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현 Dec 07. 2020

빛으로 수 놓은 자연

이대원의 미술 읽기

뜰, 캔버스에 유채, 80.5x100cm, 1939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이대원의 우주, 농원

   파주 문산읍 농원에는 이대원의 탄생을 기념하여 그의 아버지가 심은 사과나무가 있다. 그 사과나무와 함께 자연에서 자라난 이대원은 지속적으로 그의 농원에서 그림을 그리며 예술 세계를 키워나갔다. 그는 동시대 미술가들에 비하여 큰 고난 없이 평탄한 삶을 살았기에 그가 그려온 농원의 다채롭고 풍요로운 감성은 미술가의 삶 그 자체로 해석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대원의 아버지는 한국전쟁 전 고향인 황해도로 가신 후 연락이 두절되었다고 한다. 아마도 이대원이 마지막까지 파주를 지킨 것은 어린 시절에 대한 추억과 더불어 생사를 알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역시 그곳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아마도 파주의 자연은 이대원의 모든 감정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었을 것이다. 


감나무, 캔버스에 유채, 91x60.5cm, 1963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적인 서양화 

   파아란 색의 하늘 아래, 화려한 색상으로 물든 과일나무와 들판은 보는 이들의 마음까지 풍족하게 해 준다. 이대원은 당시 우리 주변에서 살펴볼 수 있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였다. 혹자는 프랑스의 인상파, 점묘 화가들과 그의 그림을 비교하고는 하는데, 이는 표피적인 해석으로 기법을 세밀하게 살펴보면 그 표현이 매우 다르다. 이대원의 그림에서는 당시 한국의 자연과 문화를 자신이 체득한 그대로 표현하려고 치밀한 연구를 거듭한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우선 그의 그림을 보면 벽 혹은 담이 등장하여 화면을 가로지르며 공간을 평면적으로 보이게 의도하고 있다. 그림 뒷부분의 산이나 나무들 역시 구성에서 깊은 공간감을 유도하지 않고 평면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평면성은 사물의 형태에 강조되어 표현되는 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리고 다양한 색상의 점들로 채색되어 있는데, 이는 동양화에서 찾아볼 수 있는 자연을 묘사하기 위한 준법 중 하나이다. 이 점들은 빛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색상들을 흩뿌려 놓은듯하여 풍요로운 이미지를 더해준다. 이대원의 그림이 유달리 화사해 보이는 이유 중 하나는 그림자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림자의 빛깔까지 사물에 선과 점으로 표현된 그의 그림은 보는 이들에게 공감각적인 심상을 불러일으킨다. 이대원은 유화를 도구로 그림을 그리지만 이러한 요소들은 모두 동양화의 기법이다. 이 때문에 청전 이상범은 이대원의 그림을 ‘서양 물감으로 그린 동양화’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1960년대 한국 미술계에는 앵포르멜과 같은 추상 미술의 형식이 주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대원은 스스로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고찰을 지속하였으며 1965년에는 노수현에게 사군자를 배우며 체득한 화풍이다. 점차 그의 화풍은 정착되어 선과 점으로 강조되는 자신만의 시각적 서사 방식을 가지고 구축할 수 있었다.  


농원, 캔버스에 유채, 112x162cm, 1983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한국 미술계의 버팀목

   경복고교 시절 일본인 미술 선생님의 권유로 유화 물감을 구해 그림을 시작한 이대원은 아버지의 반대로 미술 대학 입학이 무산되고 졸업 후 회사에서 일하였다. 그러나 미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지속되어 1957년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이후 1959년 김환기, 윤호중, 장우성과 함께 ‘반도화랑’의 운영을 맡았다. 이후 미술대학 교수와 대학 총장을 역임하며 든든한 미술계의 버팀목이 되었다. 

   오늘날 갤러리의 원형이 되는 ‘반도화랑’은 교통부 소속의 ‘반도 호텔’ 1층에 위치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이후 미술품을 사고파는 작은 화랑들이 생겨났었는데, 모두 운영의 어려움으로 금방 사라졌다. 1957년 시작된 ‘반도화랑’은 생존 미술가들의 미술품만을 판매해주는 형식으로, 당시 체류하고 있던 외국인들을 중심으로 한 ‘서울 아트 소사이어티’를 결성하여 이들이 주축이 되어 운영하였다. 그러나 그들이 귀국하며 문을 닫아야 하는 위기에 처하자 미술가들이 위원회를 구축하여 회생 방안을 강구하였고 ‘아시아 재단’의 후원 하에 운영을 지속할 수 있었다. 당시 영어가 가능하였고 ‘아시아 재단’과 친분이 있던 이대원은 1967년까지 화랑 운영에 참여하였으며 나름 다양한 마케팅을 통하여 미술에 대한 대중의 인식을 변화시키는 데 힘을 썼다. 비록 이러한 시도를 한 ‘반도화랑’은 오늘날 사라졌지만, ‘반도화랑’에서 1961년 화랑업에 첫발을 내디딘 박명자는 이후 오늘날 ‘갤러리 현대’로 독립하여 한국 미술 발전의 주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호텔 내에 위치하는 갤러리의 개념은 국내에서 지속해서 확대되어 한국 미술계에 다양한 시도를 가능하게 해 주었다. 또한 화랑이 상업만을 위한 공간이 아닌, 미술인들에게도 모임의 장소가 되고, 일반인들의 문화 인식도 고취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화단의 신사

   이대원은 미술가로서 작품 창작 활동뿐만 아니라 미술품의 유통 그리고 교육까지 다방면으로 미술계에서 활동하였다. 그의 작품들 속 농원에서 피고 지고 또 꽃피우고 열매 맺는 일상들이 반복되며 발전하는 자연의 모습처럼 한국 미술계의 생태계를 구축하는 일에 기여하였다. 또한 그는 무엇보다 자신의 미술을 전개해 나가는 일에 누구보다 매진하며 한국의 정서를 표현하였다. 이러한 그의 영향으로 오늘날까지도 많은 미술가가 그의 작품에서 영향을 받은 화풍의 작품을 전개하고 있다. 늘 호주머니에 초콜릿을 넣고 다니며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시던 생전의 마음 씀씀이처럼 오늘날까지도 많은 미술가가 그의 영향력 아래 활동하고 있으며, 또한 무한히 반복하며 자라는 자연의 일상처럼 그가 세운 토대 아래 한국 미술계도 발전할 것이다. 


담, 캔버스에 유채, 73x50cm, 1963 Ⓒ 국립현대미술관 소장


* 이 글은 월간 비자트와 중기 이코노미에 기고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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