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amak Apr 24. 2024

"해피투게더" 왕가위, 1997

"Happy together", Wong Karwa, 1997


해피투게더: 함께 행복할 수 있는 사랑의 조건은 뭘까?

미숙한 나의 경험을 토대로 정의해보자면, 서로에게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표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고 상대를 대한다면, 어떤 오해나 상처는 눈 녹듯 사라지고 애틋한 시선만 남았던 경험이 나에겐 꽤나 특별했기 때문이다. 이렇듯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에서 감사는 비료가 되어 사랑의 성장을 돕는다.

다들 그렇겠지만, 비로소 사랑에 대한 어떤 생각을 가지기까지 시행착오가 많았다. 보영처럼 철저히 이기적일 때도 꽤 있었고 아휘처럼 상대에게 휘둘리다가 제 풀에 지친 적도 있었다. 장처럼 묵묵히 누군가의 곁을 지킨 적은 있었나? 모르겠다. 아무튼 해피투게더는 현재 내 연인과의 관계에서 나는 어떤 태도로 상대를 대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적절한 시기에 이 영화를 만난 것 같아 꽤나 반갑기도 하다.


사실, 해피투게더는 나에게 끌리는 작품은 아니었다. 여전히 나의 시선이 편협하고 어린 탓이다. 무려 1997년도에 퀴어영화를 찍은 영화인들의 열린 시선이 부러울 따름이었다. 그래도 제 50회 칸영화제 감독상을 받았다는 것 자체만으로 이 영화를 들여다보기에 충분한 이유를 가질 수 있었다.

나의 시선이 어리다는 것을 검증하게 된 순간을 찾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들의 관계를 설득하려 드는 장면 없이 있는 그대로의 관계만 조명함으로써 낯설게만 느껴졌던 보영과 아휘의 강력하고 깊은 관계가 그저 연인 그 자체로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스포일러 포함

아휘와 보영은 함께 아르헨티나에 왔다. 보영이 사온 스탠드에 그려진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다가 길을 잃고, 보영은 단지 '답답하다'는 이유로 아휘에게 이별을 통보한다. 원래는 폭포만 보고 바로 홍콩으로 돌아갈 생각이었지만 연이 닿으면 다시 시작하자는 말을 서로 믿은 것인지, 아니면 정말 홍콩에 돌아갈 돈이 없었는지 여전히 아르헨티나에 머무른다.

보영은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탱고바에서 아휘를 본 뒤 그에게 미친 듯이 들이댄다. 심지어 충동적으로 시계를 훔쳐와 전 애인에게 쥐어터진 모습으로 아휘 앞에 선다. 홍콩에서도 늘 비슷한 방식으로 아휘의 마음을 흔들었을 게 뻔히 보였다. 보영의 그윽한 눈빛,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몸짓. 아휘가 너무나 사랑하는 보영 그 자체였기에 아휘는 그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그저 아휘가 할 수 있는 얇고 서툰 표현은 잠자리를 따로 쓰는 것 뿐이었다.

상처가 다 낫자 보영은 다시 아휘를 떠난다. 애석하게도 아휘는 보영이 아플 때 제일 행복했다고 말한다. 아마도 자신만 바라보는 보영의 모든 순간이 사랑스럽고 행복했을 것이다.

너무나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보영과 안정적이고 지고지순한 사랑을 꿈꾼 아휘는 '애초에 사랑에 빠지면 안되었을 사람들이었나?, 그럼에도 사랑에 빠졌다면 그들은 서로를 위해 어떤 선택을 했어야만 했나?, 서로에게 조금만 더 솔직했다면, 존재 자체를 감사히 여겼다면 어떤 결과를 낳았을까?'하는 여러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릿속을 부유했다.


아휘는 끝끝내 보영에게 여권을 돌려주지 않고 홀로 귀국한다. 보영의 눈빛에 더 이상 흔들리지 않기 위해선 다른 대륙에 머무는 방법만이 유일하다고 생각한 것 같다.

보영이 떠난 후의 여름 날, 새로 사귄 친구 장과의 시간은 사뭇 빨리 흘렀다고 말하는 걸 보면 아휘는 보영 없이도 행복한 일상을 누릴 수 있다는 걸 처음 깨달았던 게 아닐까? 떠나간 연인에 대한 미련과 새로운 사랑이 온 줄도 모르고 느끼는 산뜻함 그 사이에서 아휘는 얼마나 혼란스러웠을지 가늠하기 쉽지 않다.

-조금 웃기지만 요즘 유행하는 예능프로그램인 환승연애가 떠올랐다. 처음 그 프로그램이 방영했을 땐 뭐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나 싶었는데, 환승연애가 인위적인 환경을 설정했다면 어떤 이들은 일상에서 아휘처럼 이별의 아픔과 새로운 설렘을 동시에 느낀 적도 분명 있을 테니 말이다-


결국 아휘는 혼자 가는 길을 택한다. 장과의 아쉬운 이별을 뒤로하고 묵묵히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돈을 번다.

영화는 아휘가 장의 가족이 운영하는 포차에 들리기까지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질문을 던졌을지에 대해 설명해주지 않는다. 한가지 짐작하기로, 아휘는 비로소 어떤 책임감과 의무감에서 벗어나 자신을 온전히 마주하는 경험을 한 것 같다. 이어폰을 꼽고 지하철을 탄 그의 표정은 꽤나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다. 부디, 아휘에게 남은 보영의 여권과 장의 사진이 그의 삶에 좋은 에너지로 작용되길 바란다.



작가의 이전글 "사랑에 빠진 것처럼"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2012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