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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빌리시, 야경을 보며 든 생각

복잡한 생각은 내려두자

by 담아

트빌리시에서 보내는 세 번째 날,


원래대로였으면 트래킹이 유명한 카즈베기라는 지역으로 이동을 할 계획이었으나, 그곳의 날씨가 좋지 않다는 소식을 듣고 결국 우리는 하루 더 트빌리시에서 보내기로 했다. 이미 이틀 동안 있던 숙소는 다음 예약이 있던 터라 연장이 안된다기에 어쩔 수 없이 숙소를 옮겨야만 했는데, 새로운 곳은 비록 외관이 조금 별로긴 했지만 내부는 마치 잔잔한 영화의 한 풍경인 것처럼 오래된 나무 베이스의 인테리어에 깔끔함이 유지된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어제의 일 이후, A와 나는 큰 계획이 없을 경우엔 각자 홀로 다니는 시간도 가져보기로 했다. 그는 이미 여행한 지 두 달이 넘은 만큼 한국의 지인, 가족들과 연락할 시간을 가질 겸 산책 좀 하다가 근처 카페에 들어가 시간을 보낼 예정이라고 했고, 나는 앞선 여행기에서 크게 언급한 적은 없지만 여행 도중에도 개인 사업체 업무를 계속하여 관리해야 했기에 그동안 밀린 일 좀 하며 시간을 보낼 예정이었다.


물론 생각이 그랬고, 그저 일만 하기엔 날씨도 워낙 좋고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도 예쁘다 보니 중간중간에 소파에 누워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내 여행의 모토는 '먹고, 기도하고, 이별하라' 였던 만큼 역시나 이 전까지의 여행기에는 따로 언급한 적은 없지만 아침에 일어난 직후, 혹은 여행 중간에 여유가 될 때마다 명상하는 시간을 조금씩 가지려 시도하고 있었고, 오롯이 혼자인 이 이번에도 그 시간을 가져보기로 했다.


아직은 더운 날씨였지만, 가만히 누워있으면 시원했던 숙소의 풍경


명상을 할 땐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리를 비워야 하는데, 나는 기본적으로 생각이 많은 - 나쁘게 얘기하자 면면 걱정이 많고 자꾸 혼자만의 세상에 빠지는 사람이기 때문에, 처음 명상을 시도할 땐 그 조차 쉽지가 않았다. 그래서 찾은 나만의 명상법이라면, 흰색 공간에 흰색 큐브를 떠올린 뒤 내가 갖고 있는 잡생각들이 모두 그곳에 빨려 들어가는 상상을 한다. 어차피 끊임없는 생각을 멈출 수 없다면, 지속적으로 흰색의 큐브만을 상상하며 내 머릿속에 동동 띄워두는 게 나만의 명상법이었다. 어제의 복잡했던 심정이 조금은 정리되는 느낌이었다.




혼자 잘 놀고 일하다가 금세 A와의 약속시간이 됐길래 그가 있는 카페 앞에서 만나 합류한 후, 오늘은 원래 일정에 없는 하루였던 만큼 어디 갈까 고민하다 마침 다른 전망대 근처인 놀이공원에 가기로 했다. 놀이공원이라기보단 테마파크정도인데, 입장료 자체는 따로 없지만 놀이기구를 타려면 탑승권 카드를 구매한 후 충전해서 써야 하는 그런 방식의 장소였다.


도심과 거리도 좀 있는 데다 굳이 처음 오는 동네까지 와서 놀이공원이냐 싶어 별 기대 없이 방문했는데, 생각보다 구성도 괜찮고 너무 재밌는 시간을 보내고 왔다. 아이스크림은 일단 튀르키예보다 훨씬 맛있었고, 활기찬 장소의 분위기를 느끼는 것도 좋았고, 놀이기구를 직접 탈 생각은 없었지만 길 가던 다른 사람이 다 쓴 카드를 주고 가길래 이건 타라는 계시다 싶어 금액 충전만 한 후 롤러코스터랑 대관람차까지 야무지게 즐겼다.


롤러코스터는 그리 길진 않았지만 꽤 스릴 있는 편이었던 데다 근처에 탄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학생들이 우리가 한국인인걸 알아보고 한국어로 인사를 시도해 보며 까르르 웃어대는 것도 정말 귀여웠고, 대관람차는 일몰 타이밍을 맞춰 우리가 탑승했기에 예쁜 풍경을 또 구경할 수 있었다. 물론 나랑 A는 그 순간을 즐긴다거나 하는 생각 없이 낭만이고 나발이고 관람차가 다 돌아가는 제한시간 동안 사진을 많이 남겨야 한다!!라는 생각밖에 안 떠올라서 열심히 사진 찍고 영상 찍고 놀았다. 진짜 여행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즉흥적으로 이뤄지는 게 많은데, 적어도 지금까진 그것들에서 후회된 것들이 단 하나도 없을 정도로 재밌는 일만 있다.




정신없이 놀다 보니 어느새 깔린 어둠. 마침 어제 구경한 삼위일체 성당의 야경과 그곳에서 바라보는 도시의 풍경 역시 예쁘다길래 그곳으로 향했다. 어제의 감상과 마찬가지로 이곳 특유의 양식과 넓은 성당 터, 주위에 보이는 야경들이 참 조화롭게 아름다워서 계단에 걸터앉은 채 그 장면을 가만히 눈에 담았다. 이때 A 도 내 옆에 앉더니 대화를 걸더라.


"무슨 생각해요?"


이 분위기에 휩쓸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냐면, 아직은 잊히지 않은 전 연인의 생각. 아름다운 풍경이지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봤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 평화롭고 고요한 곳에 도착하여, 충분히 행복해 할 수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그 행복을 있는 그대로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 이런 생각들에 잠겨 혼자서 가라앉고 있던 차였다. A가 대화를 건 타이밍은 좋았을 수도, 혹은 나빴을 수도 있지만, 그의 질문이 나의 침묵을 깨며 우리의 대화가 시작되었다. 어제는 각자의 시간을 갖느라 이뤄지지 않았던 시간이 오늘은 이뤄지고 있었고, 문득 그에게 전망대에서 있던 일에 대한 내 생각을 얘기해주고 싶었다.


"우리 어제 야경 보면서 기억나죠? 나한테 잠시 혼자 이 순간을 조용히 바라봐도 괜찮겠냐고 물어봤었잖아요. 난 그때 A가 되게 멋져 보인다고 생각했어요. 본인을 위한 말을 그렇게 쉽게 전할 수 있다는 게 스스로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아서, 혼자서도 그 기쁨을 누릴 줄 아는 사람인 것 같아서 부러웠어요."


조명이 켜진 삼위일체 대성당의 모습


다만 여기서, 나는 A에게 뜻밖의 얘기를 들었다.


"그렇게 봐줘서 고맙고, 어제의 그 시간을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하지만... 나 사실 담아가 생각한 것처럼 그리 쉽게 얘기 한 건 아니에요. 나 역시도 혹시 그 말이 무례하게 전해지지 않을까 고민했고, 기분 나쁘진 않았을까 걱정했어요. 그 순간을 나에게 더 집중하고 싶었던 건 맞지만, 쉽게 전한 건 아니었어요."


그러게... 나는 왜 A가 저 말을 쉽게 전했다고만 지레짐작했을까. 그도 분명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에 대하여 걱정했을 텐데, 왜 나는 A가 어떻게 생각하고 말을 꺼냈을지 혼자서 판단했을까. 내가 좋게 받아들인 쪽이었기에 별 다른 오해 없이 지나갈 수 있었던 일이지만, 혹시라도 내가 어제의 일을 기분 나빠했다면 그건 그거대로 우리의 동행에 큰 지장이 갔었을 것이다. 남의 생각까지 혼자 판단하고 결정짓는 나쁜 버릇이, 나에게 있었다.


미리 말하자면, 나는 이번을 시작으로 이 여행이 무르익을 때까지 같은 실수를 몇 번이나 반복한다. 심지어 이 날 저녁 또 같은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다시 야경을 보며 한 얘기로 돌아와서, 이후 A는 나한테 되묻더라.


"그럼 담아는 어제 전망대에서 각자 시간 가지며 야경 바라볼 때 무슨 생각했어요?"


"그냥 불빛들의 움직임을 바라보았어요. A, 그거 알아요? 나 역시 지금까지 내내 모르고 살다가 어제 혼자 시간을 가지며 알게 된 건데, 가깝게 있는 불빛들은 그저 가만히 고정되어 있어요. 반대로 멀리 있는 불빛은 그게 어떤 것이든 간에 아지랑이처럼 일렁이고 반짝이더라고요. 난 그게 조금은 씁쓸했어요. 늘 멀어지는 것들이 더 반짝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게."


이 얘기를 들은 A가 얘기해 주기를, 본인이 얼마 전 어떤 영상 하나를 보게 되었다고 한다. 저 먼 거리에 보이는 자동차의 조명도 멀리서 바라보면 반짝이는 예쁜 빛인데, 정작 그 차에 타고 있는 사람만 그걸 모른다더라. 본인도 누군가한텐 빛나고 있다는 걸 잊은 채, 멀리 있는 빛만 쫓아가는 사람이 많다고. 그러니 너무 그렇게 생각하지 말라고, 비록 며칠 함께하진 않았지만 나의 빛나는 부분도 분명 있다고 말해주는 A가 고마울 뿐이었다.




성당 문이 닫을 시간이 다가와서, 식당까지 택시 타고 이동했다. 오늘만 해도 택시를 세 번 이상은 탔는데 다 합해서 만원도 안 나온 마법 같은 나라 조지아! 하지만 가려던 식당은 막상 도착해 보니 문을 닫아 결국 근처유명하지도 않은 아무 식당이나 들어갔다. 그렇게 생각 없이 들어간 식당치곤, 그래도 나름 수도인데 식당 종업원들이 영어를 단 하나도 하지 못하는 것도 나름 신기하다면 신기했고, 와인이 유명한 나라인 만큼 한 병 시켜서 나눠마셨는데 저렴한 가격에 달달하고 맛있는 와인을 맛볼 수 있던 것도 좋았으며, 무엇보다 음식도 맛있는 편이었기에 만족스러웠다.


성당에서 나누던 대화의 연장선상으로, 마침 술도 들어갔겠다 식당에서도 A와 많은 얘기를 가졌다. 우리는 불과 일주일 전까지만 해도 생판 모르는 남이었지만 이스탄불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같이 다녔던 만큼, 게다가 앞으로 함께 할 여행도 한참이나 남은 만큼 서로의 성격이라거나 성향을 좀 더 파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혹시나 여행하면서 서로가 불편했다거나 마음 상한 게 없었는지에 대한 얘기를 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나는 또! 혼자서 생각이 많았다. 앞서 말했던 저녁의 실수가 바로 이것인데, 나는 기약 없는, A는 6개월이라는 기한을 두고 각자가 세계를 돌아보고 있다. 다만 A는 나보다 훨씬 어린 나이에 본인의 목표인 첫 세계여행을 위해서 열심히 돈을 모아 떠나온 만큼 이 여행에 가지는 의미가 클 것이라 생각했고, 한편으론 걱정도 됐었다. 어찌 보면 그의 인생에 계속 남아있을 이 반년 간의 세계여행에서, 무려 1/6이나 나와 함께 다니는 게 괜찮을까? 하고 말이야. 물론 이 말을 들은 A는 기가 차다는 듯 대답했다.


"담아! 얼른 생각을 비워요. 그건 내가 생각할 문제지, 담아가 걱정할 게 아니에요. 한 달을 같이 다니자 한 건 우리가 대화를 거쳐 같이 결정한 선택인 데다, 그 결과가 나중에 봤을 때 좋은 경험이던 후회로 남던 인정하고 받아들일 건 순전히 나의 몫이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그냥 지금 같이 이 순간을 재밌게 보내면 되는 거예요."




성당에서도 마찬가지였고, 식당에서도 나눈 대화에서도 A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어떻게 느끼는지 또 혼자 판단하고 나만의 생각에 갇혀있었다. 이게 참 어려워.. 누굴 만나더라도 꼭 비슷한 실수를 한 번씩은 하는 것 같다. 가까운 지인들에게 늘 나는 생각이 너무 많고, 그걸 조금 비울 필요가 있다고 누누이 들으며 살아왔는데 말이야.


나의 쓰잘 데 없는 걱정을 오히려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걱정하지 말라며 시원시원하게 대답해 주는 A한테 고마움을 느낀 것과 동시에, 현재 내가 관계에 너무 위축되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어쨌든 나는 여행이 시작하기 전 미래를 함께 그렸던 사람과의 이별로 인해 관계에 대한 상실감이 대단했던 만큼, 인간관계에서 또 다른 실수 하고 싶지 않던 마음이 A에게 계속 드러나고 있던 것이었다. 그를 가볍게 만난 처음과는 달리, 지금 우리의 관계가 어떤 형태이든 간에 이 순간을 또 잃고 싶지 않았기에 점점 그의 눈치를 보게 되고 더 조심조심 행동하려는 마음이 커졌던 것이다.


내가 시작한 여행.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와서 계획도 없이, 아는 사람 하나 없이 돌아다니는 이 여행. 이곳에서 우연히 A라는 사람을 만났다면 그건 그거대로 의미가 있는 거겠지. 일단은 그의 말대로 지금을 기쁘게 즐기자. 내일 이동하게 될 여행지도 새롭게 준비하고, 앞으로의 계획도 차근차근 짜나가면서 시간 보내면 되지. 내가 어떤 마음으로 이곳에 왔든 간에, 혼자 다니는 시간을 많이 가져야겠다고 다짐을 했든 간에, 일단은 그 강박들을 모두 내려놓자. 가장 중요한 건 지금이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근심 걱정 없이 편하고 행복하다는 것이니까, 그럼 그걸로 된 거지 뭐.


트빌리시, 복잡한 생각은 이곳에 내려두고 가자. 내 여행은 이제 시작했을 뿐이고, 아직도 내가 갖게 될 아름다운 경험은 많을 테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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