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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빌리시, 평화롭고 따듯한 도시

생각은 깊어져가고

by 담아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로 출발하는 날이자 이스탄불에서의 여행을 마무리하는 날.


공항으로 이동하기까진 시간이 좀 있었던 터라 마지막 이스탄불을 즐기기 위해 일찍 일어나 바쁜 하루를 시작했다. 조지아에서도 일주일정도의 계획이 잡혀있는 만큼 취사시설이 있는 숙소에서 요리해 먹기 위해 이스탄불의 한인마트에서 고추장 및 라면등을 구입하고, 며칠 A와 다녀보니 멀미가 좀 심한 것 같길래 약도 대신 구매해 준 뒤, 아침을 깨울 겸 근처 카페에 앉아 간단히 차이도 한 잔 했다. 이스탄불도 오전의 전철은 사람이 참 많더라. 다들 열심히 출근하는 사람들이겠지? 불과 2~3주 전의 내 모습도 저랬는데 싶었다.


이후엔 준비를 마친 A와 합류한 뒤, 공항버스를 타고 사비하 괵첸 공항으로 이동했다. 조지아의 일정까지 무사히 마친다면 이스라엘에 들어가기 위해 다시 튀르키예로 돌아오긴 할 테지만 나의 첫 번째 여행지가 좋은 기억만 남은 채 무사히 마무리된 것과 앞으로 어떨 여행이 펼쳐질지 기대하며 이스탄불의 마지막 풍경을 눈에 가득 담았다.




별 탈없이 비행을 거쳐 조지아의 트빌리시에 도착했고, 아무래도 나라를 이동하며 피로감이 쌓인 만큼 숙소까지 택시 타고 이동했다. 조지아는 물가가 꽤나 저렴한 편이라 약 30분 정도의 거리를 택시로 가더라도 7~8000원의 비용밖에 들지 않길래 이후에도 이 나라에서만큼은 3보 이상 무조건 택시를 실현할 수 있을 만큼 부담 없이 이용할 수 있었다. 다만 탑승 전에는 카드 된다고 해놓고 막상 타니까 무조건 현금만 된다길래 결국 중간에 내려서 ATM으로 현금 인출했다. 진짜 어이없는 아저씨야.


어제 이스탄불에서 이곳 숙소 예약할 당시에만 해도 가격대비 퀄리티가 말도 안 되게 좋길래 약간 의심스럽기까지 했었는데, 막상 도착해 보니 과장 하나 없이 정말 너무 완벽한 숙소였다. 이리저리 여행 많이 다녀보기도 했지만 이 가격에 이런 숙소에서 묵어볼 수 있는 건 조지아가 처음이었던 것 같다. 이미 약간 늦은 시간이었던 터라 간단하게 짐을 푼 뒤 근처에 있는 대형 쇼핑몰인 리버티 스퀘어에서 아이쇼핑을 하고, 약간의 밤산책으로 오늘 하루는 가볍게 마무리. 이스탄불에 처음 내려 느껴지는 이국적인 풍경도 마음에 들었지만, 오랫동안 몸 담았던 유럽의 풍경이 느껴지는 이곳의 길거리가 훨씬 더 편하게 다가왔다.




다음날 아침 7시에 일어나서, 장도 보고 간단한 아침 식사도 해 먹을 겸 숙소에서 15분 정도의 위치에 있는 대형 마트를 다녀왔다. 아침이라 그런지 날씨 자체는 약간 선선했지만, 이 도시 특유의 한적함과 평화로움이 느껴졌다. 이스탄불이 열기가 넘치는 곳이라면, 트빌리시는 조용한 따듯함이 감싸는 느낌? 눈부신 햇빛과 시작하는 트빌리시의 아침은 내 걱정과 고민거리를 떠오르게 할 새도 없이 빛나고 있었다.

가끔은 이런 평범한 거리의 모습이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기도 한다


숙소로 돌아와 간단하게 식사를 마친 뒤, 우리의 원활한 여행을 위해서 아침에 약한 A를 대신해 나름의 계획을 세워 홀로 이동했다. 일단 첫 번째로 통신사에 방문해 우리가 일주일간 사용할 유심을 구매하고, 트빌리시에서 쓸 교통카드를 구입 한 뒤, A가 합류하기 전까지 어제 공항에서 택시를 타고 오면서 본 트빌리시의 현대 미술관인 모마(MOMA)를 방문하는 것. MOMA는 세계적으로도 유명한 뉴욕의 현대 미술관인만큼 트빌리시에도 있는 것을 보고 나름 기대하고 오픈 시간에 맞춰서 갔으나... 내 기대와는 다르게 볼게 거의 없다시피 해서 괜히 돈만 날렸다.


미술관에서 못해도 1~2시간은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부족했던 콘텐츠로 인해 30분도 채 되지 않아 나와서 A와의 약속시간까지 시간이 많이 뜨게 됐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어쩌겠어, 이것도 여행인걸? 미술관은 비록 실망스럽긴 했지만 그 대신 트빌리시의 거리를 산책한 시간이 오히려 더 좋은 기억으로 남았고, 벼룩시장과 꽃시장, 분주히 움직이며 하루를 보내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하며 간단한 빵과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숙소로 들어왔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A와 만나 처음으로 간 곳은 삼위일체 대성당. 오전에 내가 부랴부랴 움직이며 필요한 것들을 구매하고 알아본 대신 오후의 일정은 거의 A한테 맡겼던 터라 우리가 뭘 하는지, 어디에 가는지도 거의 모르고 따라갔던 관광지지만 생각보다 너무 좋았다. 유럽에 거주하며 수도 없이 많은 대성당을 보러 다녔던 만큼 크게 감흥을 느끼는 편은 아닌데, 트빌리시의 삼위일체 대성당은 내가 자주 봐오던 성당들과 다른 이곳 특유의 양식이 맘에 들었고, 무엇보다 아침부터 계속 날씨가 너무 좋은 것도 기쁜 요소였다.


트빌리시의 삼위일체 대성당


그 후엔 천천히 골목 구석구석을 돌아다니며 다른 관광지중 하나인 평화의 다리 쪽을 향했다. 우리의 트빌리시 여행 콘셉트는 '느긋함'이었던 만큼 오후 2시에 첫 일정을 시작하긴 했지만, 애초에 빡빡하게 계획을 잡지 않은 터라 시간이 많이 뜨기도 했고, 그만큼 더 한적하게 거리 이곳저곳을 계획 없이 목적 없이 걸어 다니며 일정을 소화했다. 그리고 이런 여행이 어땠냐 물어본다면, 그저 너무 좋고 행복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비록 모든 관광지를 다 챙겨보진 못할지라도, 시간에 쫓겨 이리저리 돌아다닐 필요 없는 여유로움이 내겐 필요했던 것 같다. 이미 여러 곳의 여행지를 다녀온 A 역시 "조지아가 너무 좋은데 어떡하지?"라는 말을 하루 내내 끊임없이 하고 다닐 만큼 매력 있는 곳이었고, 물론 나도 이 말에 엄청난 동의.


걷고 걷다 도착한 구시가지에서는 기념품샵을 구경하거나 이런저런 군것질도 하며 재밌게 놀고, 그 후엔 일몰을 보면서 먹을 간단한 스낵과 맥주를 구매한 뒤 케이블카를 타고 전망대에 올라가 우리가 원하던 풍경을 바라보았다. 비록 해가 지는 방향이 전망대가 바라보는 쪽이 아니라 노을 지는 풍경은 내가 생각하던 것만큼 아름답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탁 트인 전망대에서 트빌리시의 전경을 한 번에 볼 수 있는 건 대단히 좋은 경험이었다. 다만 그곳에서, 내 여행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을 다시 갖게 되는 일이 생겼다.




사실 이곳에 도착하고 난 뒤, 즐거운 감정과는 별개로 과연 이렇게 A 계속 같이 다니는 게 맞을까?라는 생각이 조금씩 들기 시작했다. 계획대로라면 우리는 거의 한 달 정도를 같이 다니게 될 텐데, 여행을 시작할 당시만 해도 지친 일상과 인간관계를 떠나 스스로를 위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목표였던 만큼 대부분의 시간을 홀로 다니며 나를 더 탐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비단 이번 연애의 끝에서 온 감정의 파도뿐만 아니라 타지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할 당시에도 나는 혼자서 늘 외로워하는 사람이었고, 혼자 있는 걸 정말 못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나의 모습도 바꾸고 싶은 부분 중 하나였던 만큼, 홀로 여행을 하면서 비록 외롭고 슬픈 날 있을지라도 더 나에게 집중하며, 혼자일 때도 누릴 수 있는 기쁨을 새롭게 배워가고 알아가는 것. 그 가치를 찾고자 한 것도 내 여행의 목표 중 하나였다.


A는 성격도 모나지 않고 밝은 편이라 같이 대화하고 여행 다니는 것만으로 긍정적인 기운이 많이 따라다니는 친구다. 다만 반대로 생각하면, 나는 처음의 목표를 잊어버린 채 이 외로운 여행길에 기댈 수 있는 새로운 사람을 찾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저 현재의 즐거움에 집중하기로 하고 단순하게 넘겨버릴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기에는 이 여행에서의 그 목표가 너무 강렬했다.




이런 고민을 하는 나와 다르게, A는 이미 혼자 있음에도 행복해할 줄 아는 사람인 것 같다는 걸 느끼게 된 순간이 있었다. 트빌리시의 전망대에서 일몰부터 시작해 어둠이 내리고 난 후 도시의 야경을 감상하다 잠시 얘기가 끊기게 된 순간이 있었는데, 예쁜 순간이었던 만큼 난 A와 이 순간의 감상을 공유하기 위해 짧은 대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 아이는 내 얘기에 대한 대답보다는 예상치 못했던 말을 꺼내더라.


"담아, 지금 이 순간이 너무 좋아서 잠시 아무 말 없이 혼자 집중하고 싶은데, 그래도 괜찮을까요?"


저 얘기를 듣고 어떤 생각을 했냐면, 사실은 좀 놀랐다. 나와 A는 동행으로서 즐거운 여행을 경험하고 있고, 곤란한 상황이 생기면 서로 도와가기도 하며 매일을 같이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바꿔 말하면 우리는 함께하는 여행이 시작된 이후 개인의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가 한 번도 없었다는 것이다. 당연한 얘기지만, 그에게 있어서도 나와의 동행이 평범한 것은 아니었다. 막 여행을 시작한 나와는 달리 이미 2개월 동안 다른 나라들을 여행하고 온 A는 딱히 동행 없이도 혼자 즐겁게 다닌 곳이 많았고, 본인의 6개월 세계여행 중 한 사람과 한 달을 계속 다니게 된다는 것 역시 나름의 각오가 필요했을 것이다.


각자의 여행길에서 마침 상황과 시기가 맞아 우연히 만난 인연인 만큼, 우리는 이 여행을 통해 원하는 경험과 목표가 다른 개개인일 뿐이므로 모든 순간을 다 공유할 필요는 없는 게 사실이다. 그는 이미 그걸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지금 이 순간 A가 나와의 대화보다는 오로지 본인만을 위해 스스로에게 더 집중하는 시간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걸 알게 됐다.


전망대에서 바라본 풍경, 어둠이 완전히 깔릴 때까지 이곳에 있었다.


아마 내게 이런 상황이 있었다면, 혼자 있고 싶은 마음이 들었음에도 내 성격상 상대방이 건넨 대화를 차마 거절하지 못하고 적당한 대답을 하며 결국 나 스스로의 시간에 집중하지 못했을 것을 안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달리 A는 본인에게 더 집중하고 만족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걸 남한테 뚜렷하게 전할 수 있다니! 언뜻 보면 선을 긋는다고 느껴질 수 있는 A의 말이었지만, 여행자로서 본인이 영감을 받게 된 장소에 더 집중하고 싶은 마음을 정말 알기에 전혀 기분 나쁘게 다가오지도, 서운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좋은 마음만 가득 담아서, A는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란 것 같다는 느낌이 확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이 표현이 욕으로도 쓰이는 요즘이지만 적어도 내가 적은 말에는 그 말 그대로의 의미를 담고 있었다.




사실 그런 부분 때문에, 전망대를 내려오고 난 뒤엔 나의 부족함을 마주하게 된 듯하여 조금은 우울해졌다. A라는 좋은 사람을 만났기는 하나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더 갖기 위해서 계속 같이 다녀도 될까 싶기도 하고, 심지어 내가 이번 여행에서 목표했던 마음가짐을 A는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게 부럽기도 하더라. 비록 아직 결정을 내리진 못하겠지만, 상황이 허락되는 만큼은 계획한 만큼 함께 다니면서 혼자일 땐 혼자인대로 즐거워할 수 있는 A의 여행 방식, 더 나아가서 삶의 방식을 배울 수 있으면 싶기도 했다.


트빌리시에서 순식간에 지나간 이틀간의 여행. 지금의 이 고민들과 여행의 순간들은 이 모든 것이 끝나고 시간이 흐른 후엔 어떻게 남아있을까? 나는 A와 동행을 계속할 수 있을까? 내 여행에서, 나는 정말로 내가 바라던 것들을 모두 얻어갈 수 있을까? 아직은 아무것도 확신할 수 없는 채로, 약간의 흐려져 불투명해진 마음으로 내 여행은 계속 흘러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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