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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노을을 바라보며

참르자 언덕을 사랑해

by 담아

역시나 쩌렁쩌렁한 기도 소리로 하루를 시작한 이스탄불에서의 두 번째 아침. A는 늦은 오전까지 여유를 부리다 외출할 계획이라고 미리 알려줬기에, 마침 가고 싶었던 이스탄불 현대 미술관에 혼자 다녀오기로 했다.


그저께 A와 처음 만났던 장소인만큼 마찬가지로 걸어서 30분 정도를 가야 했는데, 저녁이었던 그때와 달리 아침의 풍경은 한층 더 여유롭고 따듯했다.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길거리를 느긋하게 돌아다니는 고양이들, 여행을 시작하는 설렘에 빠른 걸음을 옮기던 그날과는 다르게 천천히 그 모습들을 감상하며 나도 함께 그 속에 녹아들었다.




비록 지금은 다른 일을 하지만 꽤나 오랫동안 미술을 전공한 만큼 큰 미술관은 늘 가보는 편인데, 미술관의 좋은 점이라 하면 혼자 가면 혼자 가는 대로, 둘이서 가면 둘이 가는 대로 정 반대의 매력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혼자일 땐 작품을 한층 더 깊게 이해하기 위해 나의 모습을 대입해보기도 하며 차분하게 그 장소를 둘러보고, 둘이서 가면 작품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때론 이해되지 않는 부분들에 실없는 농담으로 즐거움을 공유하는, 이것이 미술관이라는 공간과 그곳에 걸린 작품들을 대하는 나의 태도다.


이스탄불 현대 미술관에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작품


그렇게 도착한 이스탄불 현대 미술관, 개인적인 감상으론 대단히 특색 있는 장소라고 생각되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꽤나 괜찮은 공간이라 느꼈다. 사람이 몰리기 전인 오전 시간대라 넓으면서도 조용한 이곳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에 충분했고, 마음에 드는 작품도 몇 개 있던 데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빛과 바다 풍경도 이곳의 편안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에 한몫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작품이 걸려있는 내부뿐 만 아니라 그 주위 모두가 내게 있어서 하나의 영감을 주는 장소였다. 감상을 마치고 나온 뒤 윤슬이 반짝이는 바다를 옆에 두고 거닐었던 산책로, 무작정 디저트 가게로 들어가 잘 통하지도 않는 서로의 영어로 어렵사리 구매한 전통과자인 터키쉬 딜라이트, 한적한 쇼핑센터와 브런치를 즐기는 사람들 등 익숙하지 않으면서도 설렘을 주는 이 도시의 모든 풍경들이 내게는 작품이자 미술관이었다.




이스탄불은 해협을 중심으로 서쪽의 유럽 사이드와 동쪽의 아시아 사이드로 나뉜다. 어제 본 대부분의 관광지는 우리 숙소가 위치한 유럽 사이드 중심의 관광지였고, 오늘은 페리를 타고 아시아 사이드로 이동하는 날.


준비를 마치고 온 A와 합류해 이동하기 전에 해협 근처의 명물인 고등어 케밥을 먹고, 어제부터 노래를 불렀던 터키 아이스크림을 드디어 먹어보기로 했는데, 안타깝게도 둘 다 썩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고등어 케밥의 경우엔 나쁘진 않았으나 또 먹어볼 음식은 아니라는 게 우리의 감상평이었고, 터키 아이스크림은 나의 환율계산 실수로 무려 15000원을 지불해야 했으며 별로 맛있지도 않았다. 그렇지만 어쩌겠어? 이런 것도 여행인거지.


그래도 우리는 즐거웠고, 식사를 마친 후 페리를 타고 이동하는 건 매우 좋은 경험이었다. 10분 정도면 도착하는 짧은 거리지만 배 안에서 예쁜 사진도 많이 찍고, 바깥으로 나가 바닷바람과 함께 여행지로서의 매력을 한가득 마주하며 이스탄불을 제대로 느끼고 있었다. 특히 배는 뭔가 사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는 느낌이 있다. 그냥 가만히 밖에만 바라봐도 좋은 느낌? 얼마나 평온한 시간이던지.




그리고 대망의 아시아 사이드. '대망의'라는 표현을 붙인 이유는, 기대한 것 보다도 너무 좋은 인상을 받고 온 지역이기 때문이다. 이스탄불에 도착 전 두 지역을 간단히 비교해 봤을 땐 유럽 사이드 쪽이 대표적인 관광지가 많은 편이었고, 아시아 사이드는 굳이 비교하자면 연남동 카페거리, 혹은 명동 같은 느낌? 하여튼 이곳만의 특색이 있는 지역이라고 느껴지지 않았기에 큰 기대 없이 방문했는데, 골목길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매장들과 각종 다양한 디저트가 있는 카페, 처음 보거나 혹은 익숙한 길거리 음식들까지, 생각보다 볼거리가 너무 많아 눈이 즐거운 여행을 이어나갔다.


홍합 밥, 단조로운 비주얼과는 달리 정말 맛있었다


그중 아시아 사이드에서만 판매하는 길거리 음식인 홍합 밥. 홍합 껍데기 안에 양념이 된 밥과 살을 버무린 단순한 음식인데 평소 해산물을 그렇게 좋아하지 않는 나 역시도 매력을 느낄 만큼 너무 맛있었다. A와 나는 이곳까지 오며 여러 군것질을 한 데다 식사시간도 얼마 지나지 않았던 만큼 간단히 맛만 보고 가자는 식이었는데, 먹다 보니 그 자리에서 결국 한 그릇을 다 비울정도였으면 말 다했지 뭐.


어느샌가 간식에서 한 끼의 식사가 되어버린 홍합 밥을 먹으며 우리의 여행에 대한 얘기를 A와 나누었는데, 원래대로라면 동행은 오늘까지가 마지막이었겠지만 이미 그 사실은 잊었다는 듯 아주 자연스럽게 이후의 일정까지 같이 논하고 있었다. 이스탄불 외에 튀르키예의 다른 도시들인 카파도키아와 페티예, 파묵칼레는 물론 조지아 역시 어느샌가 같이 가기로 되어 있었고, 심지어 그 이후 A의 일정인 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집트까지 마침 관심이 있었기에 그곳까지 함께 가는 것이 확정되었다. 그 후 그리스를 들어가는 일정까지 겹치긴 하지만 A는 이집트에서 한 달 이상을 있고 싶어 했고, 아무래도 난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 아마 그쯤에서 동행을 마무리할 듯싶었다.


물론 나와 A는 각자만의 여행을 떠나 온 사람인만큼 중간에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 헤어질 수도 있고, 계획이 워낙 유동적인 둘이라 우리의 여행이 어떻게 흘러갈지 당장은 아무것도 확신할 순 없었지만, 일단 현재가 너무 즐거웠기에 그것만을 집중하고 바라보았을 뿐이다.




그렇게 한 달 정도의 동행계획을 확정 한 이후,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러 서둘러 움직이기로 했다. 우리의 여행 중 대부분의 계획을 짠 건 A 지만 이곳은 우리의 이스탄불 동행에 있어 내가 유일하게 계획을 세운곳인데, 유럽 사이드와 아시아 사이드의 풍경을 전부 바라볼 수 있는 참르자 언덕이었다. 이곳에서 해가 지는 풍경을 보고 싶었고, 그 장면을 내 첫 여행지의 마지막 모습으로 담고 싶었다.


시간이 약간 아슬아슬했던 터라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20분 정도를 타고 언덕을 올라간 뒤, 또 열심히 10분 정도 오르막길 걸어 올라갔다. 사실 버스에서 내렸을 때부터 이미 해는 지고 있었기에 걸어 올라가는 와중에도 오늘 일몰은 보지 못하겠다 생각했는데, 그래도 서둘렀던 보람이 있는지 해의 끝자락을 겨우 볼 수 있었다. 비록 바라본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 결국 해는 완전히 그 모습을 감추었지만, 그 끝자락을 볼 수 있던 것조차 너무 감사할 정도로 아름다운 하늘이었어.


비록 이미 해는 졌지만, 너무 아름다웠던 참르자 언덕의 일몰


앞으로의 내 이어질 여행에서, 다른 건 몰라도 일출과 일몰은 자주 접하고 싶은 것이 나의 계획이라면 계획이었다. 일몰이 내게 갖는 의미는 꽤나 컸다. 프랑스 파리에서 오랜 유학생활을 할 당시 나의 거주지 근처였던 몽마르트르 언덕을 시도 때도 없이 오르며 정말 수없이 노을 지는 그곳의 풍경을 바라보았고, 늘 지친 나를 달래주던 장소였기에 너무나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만큼 어디서든 일몰을 바라보면 그때의 장소와 좋았던 추억들이 생각나기 때문이다.


일출의 의미는... 나중에 풀어보도록 하겠다.




날씨도 적당히 시원했고, 하늘빛도 너무나 예뻤고, 모든 것이 완벽하다고 느꼈다. 여행을 떠나기 전 많이 힘들었던 터라 당장의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와 많이 멀어져 있었다고 생각한 데다가, 아직까진 마음 한편이 늘 아려와 현재의 행복을 있는 그대로 느낄 수 없는 게 스스로도 안타까울 때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이 순간만큼은 꽤나 행복한 기억으로 남을 것 같았다.


이후엔 A와 벤치에 앉아 준비해 온 간식 먹으며 수다 좀 떨며 어둠이 깔리는 풍경을 바라보다가, 옆자리에 앉아 야금야금 우리의 공간을 뺏어버린 현지 사람들에게 결국 자리를 내어주기로 하고 슬슬 숙소에 돌아가기로 했다. 밤이 되자 꽤나 바람이 많이 불어 쌀쌀해졌지만 시답잖은 농담을 나누며 길을 찾던 순간들과, 그 와중 만난 작고 귀여운 아기 고양이 한 마리를 너무 귀엽다고 A가 냅다 안아서 데려가는 것까지 재밌는 추억으로만 남은 참르자 언덕이었다.


복귀할 때는 상황이 마땅치 않아서 페리를 타는 대신 버스로 이동하기로 했다. 숙소 바로 근처에 내릴 수 있어서 그 편이 훨씬 수월하기도 했고 말이야. 이대로 들어가기엔 아쉬운 데다 약간 배도 고파 근처에 있는 케밥을 먹으러 갔는데, 완벽했던 이스탄불 여행에서 내가 유일하게 안타까움을 느끼는 것이라면 케밥이랑 맥주 좀 같이 먹고 싶은데 이슬람 국가는 참 맥주 마시기가 힘들다는 것... 물론 맥주 판매하는 곳이 없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케밥집에는 없다. 이거 하나는 너무 아쉽네.




숙소로 돌아와서 잘 준비를 마친 뒤엔 이후의 계획을 세우려 A와 전화했는데, 어디가 됐던 우리는 내일 이스탄불을 벗어날 생각이었다. 튀르키예의 소도시들과 조지아를 들르고 난 뒤 이스라엘에 들어가기 위해선 결국 다시 이스탄불로 돌아와야 했던 만큼 일단 내일 조지아로 출국한 후, 육로를 통해 카파도키아와 페티예, 파묵칼레를 거쳐 이스탄불로 다시 돌아오는 루트를 채택했다. 다른 선택지들에 비해 이 루트는 버스를 통한 육로 이동이 엄청나게 많은 만큼 큰 피로감이 예상되긴 했지만, 나와 A가 여행을 하며 자주 나눈 한 문장.


'어쩌겠어, 그래도 해야지'


약간 지치고 피곤할 때 있다가도, 저 문장 내뱉고 나서 또 움직인다. 새로운 경험을 위해, 볼거리를 위해. 어차피 어딜 가도 즐거운 여행인데 안 해봐서 손해인게 어딨어?? 당장 조금 고민되더라도, 해야지 뭐.


그렇게 당장 내일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에 가기로 확정된 우리. 물론 조지아 내에서도 우리가 얼마나 있을지, 어떤 동선으로 움직여야 할지 정해진 건 하나도 없지만 '일단 가서 부딪혀보기로 하자'라는 무지성 결정으로 비행기 티켓 구매와 이틀 치 숙소 예약부터 바로 결제한 뒤, 내일의 일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늘 계획적으로 살아온 삶. 계획이 틀어지면 스트레스를 받던 나의 삶. 시간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변수가 생기는 걸 지양하지 않던 내 삶과는 정반대의 여행방식으로 다니는 나의 이번 여행. 하지만 이런 여행 전혀 나쁘지 않은데? 길 따라 마음 따라 걷다 보면 또 새로운 길이 계속 나타나겠지.


내 현실을 피해 도망 나온 첫 여행지 이스탄불. 좋은 것으로 가득 채워졌지만, 아직까진 하루하루가 마냥 즐거울 수 없는 내 마음. 이 여행의 시작은 먼 훗날 돌이켜 보았을 때 어떻게 기억될까? 이제 겨우 첫 발자국을 뗀 이 여행은 어떤 식으로 마무리가 지어질까.


이렇게 조금은 쓸데없는 생각들을 가지며, 나의 첫 여행지인 튀르키예의 이스탄불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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