춥고 흐린 날씨여도 괜찮아
새벽 5시부터 일어나, 트레킹이 유명한 카즈베기로 이동하기 위한 준비를 마쳤다.
짐정리하고, 간단하게 아침 먹은 뒤 A와 함께 택시를 타고 버스 터미널로 이동했다. 트빌리시에서 카즈베기를 가는 방법은 꽤 특이한 편인데, 말이 버스 터미널일 뿐 도착하면 마슈르카라고 불리는 약 20인승의 미니 버스들과 소형 밴, 택시들이 이리저리 시장판처럼 뒤엉켜있는 걸 볼 수 있다. 사전 예약 등은 전혀 없는 데다 당일날 직접 터미널에 방문해서 우리를 태우기 위해 과하게 흥정하는 여러 명의 기사들 중 가격대와 자동차의 퀄리티등을 고려해 우리가 하나를 골라 직접 결제해야 하는 게 이곳의 방식이었던 만큼 꽤나 정신없을 거라 각오하고 있었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 동유럽 여행 등에서 바가지를 당한 적이 꽤나 많기에 (애초에 기준치가 높은 프랑스와 비교했을 때 이 정도 물가면 적당하네,라는 생각으로 결제했다가 함께 다닌 일행들에게 혼난 적이 여러 번 있다.) 흥정은 A가 대신하여 맡기로 했는데, 막상 도착한 터미널은 우리의 생각보다 더 혼란 그 자체였다. 도착하자마자 어디를 가냐고 떼로 몰려드는 기사들에게 우리의 목적지인 카즈베기를 말하니 누구는 70라리(35000원)를 부르고, 누구는 30라리(15000원)에 가자고 하는데 다 낡아빠진 차량이고, 그래서 70라리를 부른 곳에 다시 가서 물어보니 방금 막 150라리(75000원)로 올랐다더라.
분명 알아본 바로는 평균 30라리, 잘 구하면 25라리까지 해서 갈 수 있다던데 말도 안 되는 바가지에 놀랐고, 우리가 운 좋게 타고 갈 차량을 정했다 한들 모든 좌석에 사람이 다 채워지기 전까진 출발하지 않는 방식이라 카즈베기에 도착해서 해야 할 일정이 있는 만큼 이곳에서 얼마나 시간이 지체될지 점점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부르더니 뭔가 해볼 새도 없이 말 몇 마디하고 막 출발하는 한 마슈르카를 멈춰 세우고선 우리를 그 차에 휙 태워버렸다. 거의 납치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긴 했는데 가격도 30라리에 자동차 퀄리티도 괜찮았고, 심지어 우리 말고 뒷자리는 아무도 없길래 둘 다 발 뻗고 자면서 갈 수 있을 만큼 공간도 여유로웠다. 당황스럽긴 했지만 이것도 행운이라면 행운이겠지?
트빌리시에서 마슈르카를 타고 3시간 정도를 달려서 드디어 도착한 해발 2000m에 위치한 카즈베기!.. 는 역시나 날씨가 별로였고, 오늘은 그나마 어제보다 나을 거라고 해서 계획 하루 미루면서까지 움직였던 거라 더욱 아쉬울 따름이었다. 다만 이런 걸 생각할 새도 없이, 교통비 지불해야 하는데 트빌리시에서 떠밀리듯 출발하게 되어 현금을 못 뽑아왔던 터라 동네에 딱 하나 있는 ATM을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이스탄불서 조심히 가져온 고추장은 가방 안에서 터져있고, 날씨는 이 와중에도 더 흐리고 나빠져 총체적 난국이었다.
그래도 어찌어찌 다 해결한 후에 새로운 숙소로 도착. 숙소는 약간 휑한 느낌이 없지 않은 이 도시의 분위기와는 반대로 아주 따듯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분위기였다. 크진 않지만 작지도 않은 공간이 쓰임새에 맞게 잘 분리되어 있었고, 무엇보다도 가장 마음에 드는 건 불꽃이 일렁이는 벽난로였는데, 9월 초였음에도 고산지역인 카즈베기는 이미 영하의 온도를 자랑하고 있던 만큼 단순히 감성적인 어떤 것을 떠나서 벽난로의 존재 자체가 아주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간단히 짐을 풀고, 트래블 오피스를 방문해 내일 이곳에서 있을 주타(Juta) 트레킹을 예약하러 가기로 했다. 주타는 약 7시간 정도 소요되는 이곳의 트레킹 코스로, 이 외에도 여러 곳이 있지만 우리의 체력이나 다음의 일정을 고려했을 때 가장 적합한 곳이었던 만큼 다음날 오전 11시에 출발하기로 했다. 사실 오전 9시에 출발하는 시간대가 가장 인기 있긴 한데,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어떤 한국인 분에게 전해 들은 바로는 그 시간대에는 가장 예쁜 장소에서 역광이 딱 걸쳐져 사진 찍기가 별로 예쁘지 않다고 하더라. 사진과 영상 남기기를 좋아하는 나와 A는 고민도 하지 않고 11시 출발을 택했다.
오늘의 할 일은 이게 다였다. 원래대로라면 마을 바로 앞에 있는 산 꼭대기에 위치한, 하지만 걸어가려면 최소 두세 시간은 소요해야 하는 게르게티 츠민다 사메바 교회라는 유명 스폿을 가볼까 했지만 날씨가 더욱 춥고 흐려지던 터라 포기하고 간단한 식사를 한 뒤 숙소에서 각자 쉴 예정이었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던 중 우리 앞을 막아 선 택시 아저씨. 오늘 트빌리시에서부터 그래왔듯 그저 그런 호객행위인 줄 알고 무시한 채 지나치려 했는데, 다른 내용은 다 모르겠고 그저 우리 둘의 귀에 박혔던 한 단어 "Church". 둘 다 홀린 듯이 동시에 뒤를 돌아본 것도 웃겼고, 결국 홀라당 넘어가버린 것도 여행의 재미라면 재미였다.
식당에서 느긋하게 밥 먹으려던 계획은 급하게 수정되어 근처 매점에서 케밥이랑 감자튀김 급하게 테이크아웃 해 온 뒤, 택시를 타고 15분 정도면 갈 수 있는 산의 꼭대기로 편하게 이동했다. 아무래도 관광코스인 만큼 차량으로도 접근하기 수월한 곳이었고, 앞서 적었듯 날씨가 좋았다면 걸어 올라가 보기도 했겠지만 춥기도 추운 데다 심지어 올라가는 동안 비까지 부슬부슬 내리기 시작해 굳이 위험한 선택을 하지 않은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택시 아저씨는 주차장에서 대기하고, 우리에게 주어진 4~50분 동안 구경하고 다시 마을로 돌아가기로 했는데, 관광지인만큼 예쁘긴 했지만 뭔가 크게 와닿는 건 없었다. 날씨 좋을 때 스스로 노력해서 올라왔으면 확실히 감동이 있었을 것 같긴 한데, 아무래도 쉬운 길을 통해 올라왔다 보니 그저 자연스럽게 지나는 관광지중 하나로 느껴진..? 그 부분이 조금 아쉽긴 했지만, 그렇기에 내일 있을 트레킹을 더 기대하며 적당히 사진 찍고 구경 좀 하다가 하산했다.
오늘은 숙소에서 A와 같이 저녁 요리 해 먹기로 결정하고 이스탄불에서부터 열심히 들고 다닌 고추장으로 찌개를 하기 위해 마트에 다녀왔다. 근데 이 동네는 어떻게 된 게 고기를 안 팔아? 1차로 함께 들른 마트 같이 다녀왔을 때도 정육점 및 육류 코너는 아예 없길래, 저녁식사까지 시간이 조금 떠서 A와 각자 시간 가지는 동안 혼자서 이 도시의 큰 마트 네 곳 전부 돌았는데도 고기 파는 곳이 전혀 없었다... 별 수 있나? 그냥 소시지 넣어서 해 먹기로 했다.
이후에는 A와 다시 숙소에서 만나 같이 식사 준비도 하고, 맥주 한 잔 하면서 다양한 얘기 나누고, 숙소 밖 마당에 있던 고양이가 추운지 집 문 앞을 왔다 갔다 하길래 들여와서 놀아주며 평화롭게 휴식을 보냈다. 아무래도 여행 도중에는 여행에 집중하는 만큼 함께 다녀도 대화할 시간은 많지 않은 편인데, 이때 A와 가진 시간에서 또 한 번 마음에 와닿는 얘기를 나누었다.
A는 원래도 여행을 좋아하는 아이였고, 세계여행을 떠나기 전 주위 친구들을 통해 이번 여행 이후 A의 모습이 어떻게 바뀌어있을지 매우 궁금하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다만 A는 그런 말들을 너무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는데, 그들이 어떤 의도로 그런 말을 건넸는지를 모르는 건 아니지만 현재 A의 여행은 오로지 A의 것인 만큼 이 여행을 통해 무언가 바뀔지라도, 혹은 그대로일지라도, 그것은 단지 스스로를 위한 '변화 혹은 유지'였을 뿐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들이 아닐 것이란 것이다. 그는 이 여행을 통해 자신이 갖고 있는 무언가가 더 좋게 바뀌기 위해 의식적으로 행동하고 강박을 가지려 하기보다, 흘러가는 여행에서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싶다고 했다. 비록 그것들이 남들한테는 아무 티 안나는 변화일 수 있어도, 적어도 A 그 자신만큼은 스스로의 변화를 알 테니깐.
A는 참 멋진 아이다. 농담 삼아서, 나보다 나이도 훨씬 어리면서 어쩜 그리 스스로를 위한 것들을 잘 아냐는 말과 함께 우리의 소소한 대화들을 이어나갔다. 대부분의 얘기들은 이미 휘발되어 기억에서 사라졌지만, 저 대화만큼은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생각해 보면 나 역시 처음 이 여행을 계획할 때만 해도 '포기하고 흘러가보자, 나를 돌아보자.'라는 생각만이 있었는데, 어느샌가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되자.'라는 목표가 생겨버렸고, 그 생각이 트빌리시에서의 내게 더욱 많은 고민을 하게 했었다.
A 덕분에, 우리가 조지아에서 가진 모든 얘기들 덕분에, 난 여행을 더욱 가볍게 생각하기로 했다. 애초부터 '혼자서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여행을 온 전제 자체가 틀렸다. 혼자 있어야 함을 강박적으로 고집할 필요 없이 이 여행을 진정으로 재밌게 즐기고 행복을 느낀다면, 그때 나는 굳이 내가 노력하지 않더라도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이미 되어 있을 것이다.
사실은, 이미 이별한 전 연인이 싫어했던 행동들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달라져야지라고 생각하는 것들도 있었었지만, 그것들 조차 모두 내려놓기로 했다. 그 아이가 좋고 싫어했던 나의 모습 역시 결국은 그녀의 주관적인 판단이었을 뿐이다. 그 관계에 있어서 내가 실수하고 잘못했던 것들은 물론 고쳐가야겠지만, 나는 나의 장점이라 생각했음에도 그녀는 싫어하던 나의 모습들도 분명 있었던 만큼 이젠 끝난 관계인 그녀를 떠올리며 더 이상 좋아지려 할 필요도, 달라지려 할 필요도 없었다.
너무 좋아했기에 아직까지도 그녀와의 관계 개선을 위해 노력하고 싶던 나의 강박과 고집은, 슬프지만 후련하게 이곳에서 한 결 덜어냈다. 아직도 스스로가 느끼는 완전한 이별을 위해선 가야 할 길이 멀지만, 괜찮다. 몇 번이나 적었지만 그게 여행이니까. 당장 내일의 내가 어떤 새로운 풍경을 마주할지, 어떤 새로운 경험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근심 걱정부터 가질 필요는 없다. 다만 내가 이런 새로운 것들을 마주하며 점점 더 나은 내가 되어가고 있는 만큼, 날 너무 좋아해 줬던 그녀 역시 나와의 이별을 통해 더 나은 사람이 되어 가고 있기를 조금은 바랬다. 분명 아픈 건 나뿐만이 아니었을 테고, 모든 감정의 파도가 잔잔해졌을 때 서로가 한때를 예쁘게 지켜줬던 고마운 사람으로 남을 수 있는 것도 좋은 마무리일 테니까.
내일의 트레킹을 위해 조금은 이르게 자리를 마무리 한 뒤, 숙소에서 적당히 정리 마치고 샤워하는데 뜨거운 물이 안 나오더라... 찬물샤워 자주 하는 편이니까 후딱 해버리지 뭐 하고 호기롭게 도전했다가 살갗 찢어질뻔했다. 해발 2000m의 냉수는 다르구나 싶었다. 그저 여행의 추억으로 생각하기엔 너무나 가혹했던 추억... 바로 주인아주머니 불러서 고쳤다.
사실 내일의 트레킹을 위해 아직 트빌리시에서 머물 당시 쇼핑 좀 할까 싶다가 귀찮았던 나머지 카즈베기에도 어느 정도 인프라가 있겠지 싶어서 아무 생각 없이 왔는데 따듯한 옷 살만한 매장이 단 하나도 없었다. 고기도 안 파는 도시가 어련하겠어? 내일도 추우면 죽었다고 생각해야지 뭐. 이번 여행에서 처음으로 느껴진 무계획의 단점...
날씨도 안 좋은 데다 어둑어둑하고 싸늘한 공기가 감싸고도는 도시 카즈베기. 하지만 숙소의 따듯함과 이곳에서 느껴지는 즐거움은 마치 몇 년 전 방문했던 아이슬란드의 레이캬비크가 잠깐 생각나기도 했다. 그곳도 내게 좋은 추억이 남아있는 곳이라, 그때와 겹쳐지는 오늘이 괜스레 더 기분 좋게 다가오기도 했다. 다만 내일 있을 주타트레킹은 기대하는 만큼 하늘도 맑고 날씨도 별로 춥지 않았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