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마주한 이별 앞에서
카즈베기에서 수도인 트빌리시를 거쳐 해안도시인 바투미로 이동하는 날. 유명한 관광지는 아니지만 조지아에서 튀르키예로 육로 입국을 하기 위해선 꼭 들러야 하는 도시인만큼 오늘의 이동이 중요했다.
다만 카즈베기에서 트빌리시 버스 터미널로 돌아가는 시간만 해도 약 3시간이 소요되고, 그 후 중앙역으로 이동해 바투미행 기차를 타기까지 환승 가능한 시간은 약 25분 정도. 바투미 이동 편은 하루에 딱 한 번만 있는 만큼 정말로 빠듯한 일정인만큼, 오늘의 이동이 문제없이 이뤄지려면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모든 교통편이 상황에 맞게 잘 움직여주길 기도하는 수밖에 없었다.
물론 결과는 역시나 실패! 일단 트빌리시로 돌아가는 마슈르카부터 예정한 시간보다 20분 정도 늦었던 만큼 이미 초장부터 글렀을뿐더러, 트빌리시 근처에 들어왔을 땐 시내에서 차가 너무 막혀 이미 일말의 기대조차 갖지 않았다. 물론 우리가 기차를 탈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건 카즈베기에서 출발과 동시에 이미 파악했고, 문제는 이 방법을 어떻게 해결하느냐였다.
트빌리시에서 하루 더 머물까 생각하기도 했지만, 결국 돈 좀 더 써서 개인 드라이버를 예약해 가기로 했다. 사실 조금 쓰는 수준이 아니라 기차의 열 배가 넘는 가격이긴 했지만... 이렇게라도 안 하면 오늘은 도저히 갈 수 있는 방법이 없기도 했고, 기회비용 대비 이쪽이 이득일 것 같기에 큰맘 먹고 쓰기로 했다. 원래 여행에선 돈생각하면서 다니는 거 아니니까, 돈은 다시 현실로 돌아갔을 때 열심히 벌면 되지 뭐.
트빌리시에 하차한 뒤 리버티 스퀘어로 가서 간단히 차에서 먹을 음식을 구매한 후, 이미 예약해 둔 개인 드라이버를 만나 차량에 탑승했다. 뜻밖의 여정이기도 한 데다 이렇게 자가용으로 이동할 줄은 몰랐지만 (+이런 비용이 나갈 줄은 더더욱 몰랐지만) 더욱 편하고 재밌게 여행할 수 있을 것 같아서, 게다가 나중에 생각하면 또 재밌는 추억으로 남을 것 같아서 꽤 기대됐다.
괜히 들뜨더라! 어쨌든 해외여행에서 자가용을 타고 이동하는 경우는 흔한 경험이 아닐뿐더러, 6시간이라는 짧지 않은 여정이라 최근 바쁘게 움직였던 우리가 푹 쉬며 이동할 수 있을 만큼 바투미로 가는 길은 한적했고 또 편안했다. A와 차 안에서 간단히 군것질도 하고 소소한 대화도 하면서 느긋하게 여행을 즐겼다.
다만 조그만 의문이라면, 절반정도 갔을 때쯤 드라이버 아저씨가 식사를 하자고 하시던데 그걸 내가 사야 하는 건가 싶기는 했다. 일단은 내가 사긴 했는데, 사준게 아까워서가 내가 선금으로 지불한 운전비용에 드라이버의 식사값이 포함되어 있었을지, 아니면 그것과는 별개로 내가 사주었어야 하는 게 당연한 건지 순수하게 궁금함을 남겼다. 나의 이 소소하면서도 쓸데없는 의문은 영영 이번 여행의 미스테리로 남겠지..?
식사도 나름 괜찮게 마친 후, 계속해서 고요한 이동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간의 여정에 피로가 꽤 많이 쌓였는지 A는 옆에서 잠들어있었으며, 나는 혼자서 이런저런 생각을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미 흘러간 나의 여행을 곱씹고, 앞으로 겪게 될 새로운 모습들을 상상하며.
여기서 잠깐 과거의 내 모습을 떠올려 봤다. 이번 여행은 그저 정처 없이 떠돌고 있지만, 본래 나는 계획 세우는 걸 좋아하는 데다 그것이 틀어지면 스트레스를 느끼는 사람이다. 아마 이전의 나였다면 오늘 오전에 있던 일처럼 계획한 교통편이 틀어지고, 더 큰돈이 소비되는 것에 대단한 짜증과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냥 이것도 여행이니까 즐겨보자.'라고 마음가짐 하나 바꿔보았을 뿐인데 스트레스는커녕 하루하루가 새롭고 기대되는 여행이 되었다.
동시에, 나와 전 연인이 유럽에서 만나 연애를 막 시작하던 시기가 살짝 스쳐갔다. 그녀는 나와 정말 다른 사람이었던 만큼 내 기준에 있어 계획성이 옅거나, 혹은 계획을 세우더라도 실수가 잦은 아이였다. 유럽에 있는 동안 자주 만나려 노력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각각 프랑스와 스페인에 있어 늘 함께할 순 없었던 만큼 그녀는 나 없이 혼자 여행을 소화할 때도 있었는데, 그때마다 꼭 소소한 사고가 생기곤 했다. 버스를 놓친다거나, 혹은 기차를 놓친다거나, 아니면 비행기를 탈 때 문제가 생겨 요금을 더 내는 그런 상황들.
오랫동안 이곳에서 산 나와는 달리 그녀는 6개월간의 단기 연수를 온만큼 유럽의 삶이 익숙하지 않고 아직 언어도 서툴러 실수가 일어날 수 있음을 이해는 하지만, 그러면 본인이 더 신경을 써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있었다. 당시 나는 그녀의 이런 실수가 이해되지 않았고, 때로는 걱정을 담아 혼을 낸 적도 있다. 어찌 됐건 그 상황을 장거리에서 모두 수습해 주며 건네는 나의 잔소리를 그녀는 풀이 죽은 채 묵묵히 들을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내가 아는 그녀는 분명 그런 사고가 있었더라도 이내 잊어버리고 즐겁게 여행을 즐겼을 텐데, 오히려 이후에 이어진 나의 타박이 그녀의 여행을 더 눈치 보게 만든 점도 있었을 것이다. 왜 나는 그걸 더욱 일찍 깨닫지 못했을까. 그녀가 버스좀 놓쳤고, 기차좀 놓쳤으면 어때. 예상치 못한 상황으로 요금을 더 냈으면 좀 어때. 당장은 막막하고 기분 나쁠 수 있어도, 어차피 즐거운 여행길인 만큼 얼른 털어버리고 즐거운 것에만 집중하도록 기분을 풀어주고 도와줬으면 됐을 텐데. 마치 지금의 내가 이 여행길에서 그러고 있는 것처럼 말이야..
이제라도 깨달았으면 된 걸까. 뭐가 됐던, 이제와선 전할 수조차 없는 미안함과 약간의 씁쓸함이 나를 맴돌았다.
그렇게 먼 길을 달리고 달려 겨우 도착한 바투미. 조금은 구름이 껴있었지만 맑고 느긋한 느낌이 가득 도는, 서유럽 특유의 남부도시들과 결이 비슷한 곳이었다. 약간 노란빛의 느껴지는 도시의 분위기에, 조금은 습하지만 적당히 살랑이는 기분 좋은 바람이 부는? 어찌 됐건 영하의 날씨인 카즈베기에 있다가 도착한 이곳은 따듯함 그 자체였다
도착이 늦었기도 하고, 오늘은 처리할 일이 좀 많아서 안 나가고 숙소에 있으려 했는데 A가 해안가로 일몰 보러 가자길래 냉큼 따라갔다. 일이야 뭐 다음날에 하면 되지. 못하면 다다음날에 하면 되지. 이러고 미루다 보면 언젠가 시간이 나는 미래의 내가 하겠지!라는 책임감 없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그 어떤 것도 바닷가에서 바라보는 노을보다 중요하진 않았다.
A와 함께 일몰을 보러 간 건 실수였다.
바다는 나에게 많은 의미를 담고 있다. 나와 전 연인은 스페인의 해안도시에서 만났고, 아직 서로를 잘 몰랐음에도 불구하고 대화가 잘 맞고 재밌어 바닷가에 앉아 처음 만난 그날 새벽 3시까지 대화를 이어가며 나의 마음이 시작됐다. 비록 지금은 그곳이 아니지만 나한테는 아직 그때의 해변이 생생한데, 현재 바투미의 해변에 앉아 그때처럼 바다를 보고 있는 이 상황은 잊어야 하는 그 추억들을 끄집어내기에 충분했다. 사실 해안가에 도착하며 어느 정도 그녀의 생각이 들것이란 예상은 하고 있었고, 그럴 거면 차라리 이 기분을 조금 더 솔직하게 받아들이고 털어내고자 일부러 좋아하는 잔잔한 노래를 켜두긴 했는데, 변수가 생겼다. 그 노래를 처음 틀자마자 눈물이 펑펑 쏟아질 줄은 나조차도 정말 몰랐던 것이다. 이영훈의 '돌아가자'라는 곡이었다.
옆에 A가 있는데 눈물이 갑작스레 펑펑 흘러 나 역시 당황했다. 마침 우리는 노을 지는 바닷가를 바라보며 잠시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로 하여 각자 이어폰을 끼고 풍경을 바라보고 있던 터라 그는 내 상황을 눈치채지 못했었고, 난처한 상황이 오기 전에 얼른 그 자리를 도망치듯 피했다. 갑작스레 터진 감정과 눈물은 나를 얼마나 복합적이고 아프게 만들었는지.
스페인 작은 도시의 처음 보는 바닷가에서 관계는 시작되었고, 현재는 조지아 작은 도시의 처음 보는 바닷가에서 내 관계의 끝을 바라보고 있었다. 비록 즐거운 여행이 이어지고 있는 건 맞지만, 나는 아직 이별에 있어서 절대로 괜찮아지지 못했다는 걸 다시금 마주하게 되었고, 그 아이를 잊으려면 아직 한참 멀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언제쯤 이별을 이별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현재 느껴지는 슬픔에 몸을 맡긴 채 나란 존재를 한없이 조그맣게 만드는 바다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이 시간이 후회되진 않았다. 박혀있는 슬픈 감정을 하나씩 다 꺼내두다 보니 어느샌가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눈물은 멎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감정은 나도 모르는 새에 또 쌓이게 되어 오늘처럼 해소해야 하는 날이 오긴 하겠지만.
한참 동안 혼자 마음을 추스르고 난 뒤, A의 옆에 돌아와 이미 해가 다 지고 어둠이 깔리고 있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다행히 그는 눈치채지 못한 채 어디 다녀왔냐고 묻길래, 잠시 전화를 받고 왔다고 어물쩍 둘러대며 아무렇지 않게 이 해프닝을 넘길 수 있었다.
슬프던 기분을 어느 정도 털어내고 난 뒤, 이미 완전히 밤이 되었기도 하고 날씨도 조금 쌀쌀해져 저녁 식사를 하러 갔다. 어디 갈까 고민하다가 찾아낸 식당이었는데 가격, 양, 비주얼등 뭐 하나 흠잡을 곳 없이 너무 맛있는 식사를 했다!
좋아하는 바다도 다녀왔고, 식사도 맛있었으며, 내게 무슨 일이 있었든 간에 도시의 분위기 자체도 아주 마음에 드는 곳이었다. 만약 오늘 조금 무리해서라도 오지 않았으면 즐기지 못했을 것들이라 생각하니, 또 이렇게 기회가 되어 결국 올 수 있게 된 것에 감사했다.
내일은 조지아에서 약 1주일간의 여정을 마치고 다시 튀르키예로 돌아가는 날이다. 트빌리시에서의 사흘, 카즈베기에서의 이틀, 그리고 바투미에서의 하루. 한 나라 안에 있는 다른 매력을 보유한 세 도시를 여행하며 각자 새로운 경험과 마음가짐을 가졌으며, 나의 감정과 마음을 돌아보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나의 여행은 무기한인만큼, 아직까진 언제 한국으로 돌아갈지 확신할 수가 없다. 이 여행은 3개월이 될 수도, 6개월이 될 수도, 혹은 다음 주에 끝날 수도 있다. 나도 아직 이 여행이 어떻게 흘러갈진 모르겠지만, 나 스스로가 정말 괜찮아졌다고 생각하는 때에, 나는 돌아갈 것이다. 그때가 언제일까, 또 그때까지 나는 얼마나 새로운 경험을 쌓고 다양한 곳을 방문하게 될까.
무엇이 됐던 조지아라는 나라를 절대 잊지 못할 것이다. 고요함과 평화로움으로 뒤덮여 정감 가고 너무나 마음에 들었던 곳. 나중에 꼭 다시 올 것임을 가슴에 새기며, 조지아에서의 여행도 이로써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