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과 좋아하는 것이 섞여
주타(Juta) 트레킹 당일날! 근데 사실 난 어제까지만 해도 두타 트레킹인 줄 알고 있었다. 해당 지역 이름조차 제대로 모른 채 별 생각도, 계획도 없이 A가 정한 대로 물 흐르듯 여행하고 있지만 오히려 나쁘지 않은 매일을 보내고 있는 요즘..!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간단히 준비한 뒤, 어제 교회 올라갔을 때 무진장 추웠던 경험을 반면교사 삼아 오늘은 단단히 준비를 마치고 시간에 맞춰 트래블 오피스로 향했다. 사실 이번 나의 여행에 조지아라는 나라를 상상조차 못 했던 만큼 트레킹이란 콘텐츠는 더더욱 상상을 못 한 데다, 한국에서부터 짐을 아주 간소하게 가져온 터라 전혀 알맞은 산행 복장을 갖추진 못했지만 최대한 입을 수 있는 모든 걸 껴입었다. 오를 때는 조금 덥고 땀나더라도 차라리 산 길은 그게 낫다. 추운 건 정말 답도 없으니까...
다행히 오늘의 날씨는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정말 좋았다. 아무래도 산간지역인 만큼 하루하루 예측할 수 없는 데다 어젯밤 날씨를 체크할 때만 해도 오늘이 매우 흐릴 예정이라고 적혀있길래 큰 기대하지 않았었는데, 걱정과 달리 맑고 푸른 하늘에 구름도 적당히 예쁘게 있었어서 매우 만족스러웠다.
트레킹 시작길에 도착하니 대략 오전 11시 30분.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7시간 정도로 중간중간 여러 스팟을 거쳐 약 4시간 정도를 올라가면 도착할 수 있는 목표 지점인 차우키 호수에 도착한 뒤, 나머지 3시간 정도를 이용해 오후 6시 반까지 내려오면 되는 코스였다.
코스 자체가 별로 어렵지 않았던 만큼 처음 1~2시간은 느긋하게 사진도 찍고 풍경에 감탄하며 천천히 걸어 올라갔다. 운동과는 그리 가깝게 지내는 편은 아닌 데다 트레킹은 인생에서 처음 해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레킹의 매력을 잔뜩 느낄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흔히 카즈베기는 "가성비 스위스"라고 불리는데, 가성비라는 단어가 왠지 스위스의 하위호환이라는 듯한 표현인 것 같아 괜스레 그 단어가 마음에 들지 않을 정도로 이곳은 그저 "가성비"로만 판단하기엔 너무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가 점점 숨이 차오르기 시작할 때쯤, 피프스 시즌이라는 중간 지점에 도착. 이곳은 만년설이 쌓인 뒷산과 강줄기가 흐르는 예쁜 풍경을 두고 해먹을 비치해 두어 그곳에 앉아 사진 찍을 수 있는 장소였다. 나와 A가 이 스팟을 참을 수 있을 리 만무했고, 이곳이 우리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로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다. 피프스 시즌은 끝이 아닌 중간지점인 만큼 보통의 다른 여행객들은 잠시 쉬었다 가는 공간이지만, 우리는 사진 찍느라 거진 1시간 정도를 이곳에 머물렀던 것 같다.
한참을 피프스 시즌에서 보낸 뒤, 느지막이 최종 목표인 차우키 호수로 향했다. A는 사진 찍히는 걸 좋아하지만 나는 아무래도 찍는걸 더 좋아하는 편이었는데, 아무래도 여행에 있어 내가 찍어주는 만큼 A도 날 찍어주려 하다 보니 카메라 앞에 서는 게 조금 덜 어색해지기 시작했다. 이제는 꽤나 뻔뻔하게 사진도 남기면서 즐거운 트레킹을 이어나갔다.
그래도 어느 정도 올라왔으니 조금 평지가 지속되나 했는데 웬걸? 올라가면 갈수록 경사가 점점 가파르게 변하는 데다 점점 들고 있던 가방의 존재감이 확실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계속 늑장 부리며 천천히 올라가느라 남들 대부분 하산하고 있을 때 우리는 겨우 호수에 도착했고, 결국 도착한 후에도 생각보다 시간이 부족해 15분도 채 머물지 못했다. 심지어 이때를 기점으로 해가 점점 기울기 시작해서 추워지더라. 비록 시간 조절을 잘못해서 호수에는 잠시만 머물다 왔지만 눈에 담기는 풍경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웠다. 아직 여행의 초반이나 다름없는 만큼 앞으로도 많은 여행과 새로운 경험들을 갖겠지만, 어찌 보면 지금의 이 순간이 내 여행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벌써부터 들었다.
그 후, 조금은 급하게 하산을 시작한 우리. 점점 추워지고 바람이 세져서 눈도 시린 데다 피로감이 더욱 커져 점점 말이 없어진 채로 올라온 만큼 한참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비록 내려오면서는 지금처럼 풍경을 감상하거나 즐길 시간이 없긴 했지만, 그래도 서둘러서 그런지 우리의 걱정보단 하산이 빨리 이뤄진 편이라 오히려 시간이 조금은 남을 듯하여 허기 달랠 겸 산 중턱에 있는 유일한 카페에서 소시지에 샌드위치, 맥주 한잔을 마시며 30분 정도를 휴식을 가졌다. 물론 아직도 1시간 정도를 더 내려가야 하긴 했지만 이후부터는 꽤나 쉬운 코스였고, 힘들게 트레킹 하고 난 뒤 그 풍경 바라보며 먹고 마시는 안주와 맥주는 극락 그 자체... 진짜 행복도 이런 행복이 없었다.
간단히 요깃거리를 하고 체력이 채워져서인지, 바람도 약간 잔잔해지고 하산이 더욱 쉬워졌기 때문인지 남은 한 시간 정도의 길은 마침 내가 좋아하는 일 얘기가 나와서 A와 함께 즐겁게 얘기를 나누며 이동했다.
앞서 언급했듯 나는 온라인 사업체를 하나 가지고 있고, 새롭게 시작한 지 아직 반년도 채 되지 않아 큰 기대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대보다도 훨씬 성장하여 이렇게 여행을 다니며 일을 지속하기에도 지장이 없을 정도로 수익이 나름 괜찮게 벌리고 있다. 물론 이렇게 성장할 수 있는 배경은 운이 크긴 했지만, 일단 나는 프랑스에 거주하며 이 일에 대한 경험을 쌓기도 한 데다 짧은 기간이지만 꽤나 많은 노력과 시간을 쏟아부었기에 그런 운을 잡을 수 있었다고도 확신한다.
아무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고 수익이 들어오는 나의 방식이, 여행을 너무나 좋아하는 A는 꽤 부러운 요소라고 느꼈나 보다. 그는 이번 여행을 시작해 앞으로도 기회가 되면 또 수많은 곳을 여행 다니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만큼 이러한 일에 큰 관심을 느꼈고, 나 역시 이런 미래지향적이고 건설적인 대화를 하는 걸 아주 좋아하기에 내가 어떤 식으로 수익을 연결하고 일을 하는지에 대해 조금은 설명해 주었다.
나와 A의 나이 차이가 어마어마하게 크다고 볼 순 없지만, 그렇다고 또 차이가 안나는 것도 아닌 만큼 그가 현재 그 나이로써 갖고 있는 고민과 관심사가 흥미롭게 느껴졌다. 내가 A와 같은 나이일 때만 해도 미술 대학을 재학하며 내 작품을 어떻게 하면 더욱 세련되게, 매력 있게 만들지 고민하며 시간을 보내곤 했다. 하지만 그 후 현대미술에서 디자인으로 한 번의 전과가 있었고, 심지어 현재의 일은 이전의 예체능 쪽 전공과는 아무런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다. 그게 아쉽냐 물어보면 또 그렇지만도 않은 게, 전공을 살리고 그렇지 못했고를 떠나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될 수 있던 배경 역시 내가 프랑스에 살면서 가질 수 있던 메리트니까.
무슨 말이 하고 싶던 거냐면, 삶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적어도 나는 내 친구들이 한국에 있을 때 프랑스라는 곳에 있으면서 남들과는 다른 기회를 잡아 나만의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정말 크고 좋은 경험이자 감사할 부분이라고 느끼는 만큼, 그렇기 때문에 벌써부터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많은 걸 보고 듣는 A가 분명 나보다 더 멋진 미래를 만들어 갈 것이라고 확신했다.
대화하다 보니 마지막 한 시간은 정말 쏜살같이 지나가 금방 시작지점에 도착했고, 다시 카즈베기로 무사히 돌아왔다. 이후에는 좀 더 얘기를 나누려 했으나 오늘 여정이 너무 피곤했기도 하고, 내일은 아침 일찍 움직이는 데다 새로운 도시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간단히 라면이랑 즉석식품등을 요리해 먹은 뒤, 짐정리하고 각자 일찍 쉬기로 했다.
다시없을 하루라고 생각될 만큼 너무 좋은 날이었어. 이제 여행이 일주일정도 지났지만, 지금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꽤 즐겁다고 생각한다. 몸을 움직이며 나를 누르고 있던 안 좋은 감정을 털어내고, 새로운 것들을 보고 배우며 이전의 것들에 얽매이려 하지 않고 있다. 물론 아직도 갈 길이 멀다는 건 스스로도 느끼고 있지만, 내 여행이 좋은 것들로만 채워지고 있는 게 참 기쁘다.
이제 조지아에서의 일정도 점점 마무리가 되어간다. 내일은 일찍 움직여 트빌리시로 돌아간 뒤, 바투미라는 해안 도시로 이동할 예정. 수도인 트빌리시에서는 여러 가지 고민과 생각을 거쳐 여행에 대한 의미를 가볍게 가지기로 마음먹었고, 카즈베기에서는 여행으로서의 여행을 마음껏 즐기며 큰 생각을 갖지 않고 지금 주어진 기회들을 마음껏 즐겼다. 나의 조지아는 좋은 것으로만 채워지고 있는 지금, 마지막 도시인 바투미라는 곳은 내게 어떤 경험을 가져다주며, 어떤 곳으로 남게 될까?
다음 날 그곳에서 갖게 될 큰 감정변화를 아직 전혀 모른 채, 기분 좋은 피곤함과 함께 카즈베기에서의 마지막 날이 저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