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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라브존, 카파도키아를 향해서

또 새로운 추억을 새기러 가자

by 담아

조지아의 바투미에서 튀르키예의 트라브존을 지나 카파도키아로 이동하는 날.


혼자서 일출을 보러 가기 위해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났다. 알람소리가 울렸을 땐 너무 귀찮고 피곤해 가지 말까 싶기도 했지만, 그러기엔 또 날씨도 너무 맑고 스페인에 머물던 그날 이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바닷가에서의 일출을 다시 경험하러 가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싶어서 꾸역꾸역 준비하고 길을 나섰다. 근데 이른 시간인건 맞지만 해변으로 가는 길에 정말 단 한 사람도 안보이던데 이전에도 일출을 보러 다닐 때 그랬었나 잠시 생각해 봤지만 기억이 잘 나진 않더라. 사랑했던 시간들이라 해도 모든 장면이 다 기억에 남는 건 아니니깐.


역시나 아무도 없는 해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스페인의 그 도시는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서쪽에서 해가 떴는데, 바투미는 동남쪽에서 해가 떠오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혼자 의미부여를 한들, 이곳은 그때의 그곳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 굳이 해의 방향을 바라보며 혼자 이런 심술궂은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해변에 만들어둔 하트. 귀여운 생각을 다 했네


잔잔한 바닷가에서 틀어둔 노래는 소히의 '산책'. 헤어지던 날 스피커에서 이 노래가 나왔을 때, 그녀는 이 노래 들으면 눈물 난다고 한결같이 귀엽지만 결국 내게는 멀어진 투정을 부렸던 것이 스쳤다. 사실 나 역시도 오늘 일출을 보며 또 한 번 눈물이 나지 않을까 싶었는데, 어제 노을을 보며 흘린 눈물로 감정이 많이 풀어졌는지 생각보단 담담한 기분이었다.




이스탄불 여행기 중 참르자 언덕을 바라보며 일몰에 대한 나의 의미를 적었는데, 일출의 의미는 많이 다르다. 내게 있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다기 보단, 어떻게든 의미를 갖기 위해 만들어낸 시간이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그녀와 처음 만났던 날, 우리가 밤늦게까지 즐거운 대화를 이어가며 시간을 보낸 바닷가는 관광지로서 유명하진 않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곳을 개인적으로 아주 좋아했던 만큼 내게도 그 장소를 소개해주었고, 나 역시 너무 마음에 들어 했다.


다만 그 도시에서 우연히 만났던 우리는 그날 하루의 약속이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그 도시에서 단기 어학연수하며 거주하고 있었지만 별개로 그녀만의 스케줄이 있었고, 나는 다음날 오후 다른 도시를 방문할 예정이라 이대로 끝나면 더 이상 만날 수도, 연락할 명분도 없었기에.


어떻게든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고 싶었던 내가 생각해 낸 명분은, 그녀가 좋아하던 해안에 일출을 보러 가는 것이었다. 사실 그전까지 일출이란 것에 관심도 없고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지만 피곤한 몸을 아침 일찍 일으켜 그 도시에서 일출을 보러 가 예쁜 사진을 남긴 뒤 그녀에게 그 장면을 전송함과 동시에 새로운 대화를 이어가는 것에 성공했던 나. 내가 그 일출을 보러 갔던 건, 네게 연락할 구실을 하나라도 더 만들어보고 싶기 때문이었어. 오늘도 그 구실을 한번 만들어보고 싶었어서 이렇게 와봤네.




물수제비나 몇 번 하고 돌아갈까 하던 중 딱 알맞은 돌멩이 하나를 발견했다. 정말 동그랗고 예쁜 모양이었다. 이렇게 동그래지기까지 얼마나 많이 깎이며 긴 시간이 흘렀을까.


하지만 그 돌멩이는 완벽하진 않았다. 분명 오랫동안 이 해변을 돌아다니다 보면 너보다 더욱 동그랗고 예쁜 돌멩이가 분명 있을 거야. 미안하지만 넌 내 마음에 완벽히 드는 둥근 돌멩이가 아니거든. 다만 너를 보며 내가 가졌던 이 찰나의 생각들로, 내게 있어서 바투미의 가장 특별한 돌멩이가 되어버렸어. 결국 그 돌은 던지지 못했다. 내가 그렇다. 이렇게 작은 돌멩이 하나에도 정을 줘버리면 버리지 못하는데 다른 더 소중한 것들은 어땠겠어.


이렇게 조그마한 것 하나도 놓기가 힘든데.


그렇게 나의 아침 산책을 마쳤다. 이곳에선 유독 전 연인의 생각이 많이 났네. 어떤 곳에서보다 그녀의 존재감이 크게 느껴졌던 여행지지만 확실한 건 한국에 있을 때보다 훨씬 담담해진 느낌이었고, 그래도 이 정처 없는 길이 내게 좋은 작용을 하고 있구나 싶었다. 아직 멀다고 느끼긴 해도 알게 모르게 조금씩은 괜찮아지는구나.


숙소로 돌아가며 문득 A의 존재가 생각이 났다. 그가 현재 나와 함께 동행해주고 있어서 정말 다행이란 생각을 했다. 굳이 별 말을 하지 않더라도 어떤 관계이냐를 떠나서 지금 내가 같이 보낼 수 있다는 사람이 있다는 건 큰 행운이니까. 내가 만약 지금 A와 동행하고 있지 않았다면 오늘의 기분으로는 분명 아무한테나 전화를 걸어 내 슬픈 푸념을 늘어놓았을 것 같기 때문이다. 참 이상하면서도 소중한 인연이야.




조지아에서 튀르키예로 넘어가기 위해선 국경검문소가 있는 사피라는 곳에 들러 육로를 통해 출, 입국 심사를 받아야만 했다. 바투미에서 대중교통으로 15분 정도 걸리는 곳인 만큼 원래는 버스 타고 이동하려고 했지만 아무래도 시간이 애매해진 데다 몇 번이나 말했듯 조지아는 택시비가 정말 싸기에 마지막까지 택시를 이용했다. 정말 얼마나 큰 메리트인지!


유럽에 거주하며 EU 국가 간 대중교통을 통해 국경 이동을 몇 번 거쳐보긴 했는데 아무래도 이곳은 EU에 속해있지 않다 보니 공항과 비슷한 방식으로 입국심사대를 통해 직접 걸어서 심사를 거쳤다. 미리 후기를 찾아보고 가니 꽤나 사람이 붐비는 편이라 최소 1시간은 걸릴 것이라기에 나름 시간 분배를 잘해서 일찍 갔는데 생각보다 처리가 빨리빨리 되어 조금은 여유롭게 튀르키예로 다시 입국할 수 있었다.


내게 너무 좋은 일주일을 만들어줘서 고마웠고 언젠가 또 보자. 잘 있어 조지아!




튀르키예로 입국함과 동시에 또다시 넘어야 할 산, 카파도키아를 가기 위해선 일단 트라브존이라는 지역으로 가는 마슈르카(튀르키예에선 돌무쉬라는 명칭을 쓴다)를 이용해야 했는데 아무래도 트빌리시에서 카즈베기를 갈 때도 정신없이 차량을 찾아 헤매던 기억이 있다 보니 이번에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발품 팔아야 하나 싶었다.


그런데 이때, 웬 외국인 한 명이 다짜고짜 우리한테 오더니 트라브존으로 가냐고 묻더라. 단순히 호객하는 돌무쉬 드라이버인인가 싶었지만 일단은 정보가 필요했기에 그렇다고 대답했더니 갑자기 알 수 없는 언어로 번역기를 돌려 우리한테 이 내용을 보여주었다.


- 내 개인 차로 트라브존에 가는데 자리가 남으니까 함께 가지 않을래? 가격은 돌무쉬보다 훨씬 싸게 줘도 돼.


원래대로라면 나와 A 두 명이 돌무쉬를 타려면 약 400리라(약 2만 원. 사실 그다지 비싸진 않다) 정도를 지불했어야 할 텐데, 여기에 50리라를 더 깎아서 350리라로 합의를 본 데다 아무래도 약 20명은 탑승하는 돌무쉬에 불편하게 끼어가는 것보다 편하게 자가용을 타는 것이 손해 볼 건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여 그 친구의 제안을 수락했다.


물론 외국에선 스스로가 더욱 조심해야 하기도 하고, 사기꾼도 즐비하기 때문에 차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기 전까지만 해도 의심을 완전히 거둔 건 아니었지만 막상 탑승해 출발하니 생각보다 좋은 기회를 잡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번역기를 통해 조금씩 대화를 해보니 드라이버 친구는 이란출신으로 한국 노래도 같이 들어보고 싶다며 차량에 블루투스 연결도 해주었고, 친절한 데다 운전도 안전하고 빠르게 해 줘서 예상했던 시간보다도 훨씬 일찍 도착할 수 있었다.


편하고 빠르게 데려다줬어서 고마웠어!


우리 여행은 계속 어찌 될지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변수들이 난무한 채 얼렁뚱땅 지나가고 있는데 오히려 그래서 너무 재밌다고 A와 함께 즐거워했다. 이런 경험들이 나중에 진짜 좋은 추억들로 남을 것 같기에 단순히 편히 온 것에 행운을 느끼는 것 보다도 이 순간 자체에 감사했다.




트라브존에 무사히 도착해 이른 저녁 식사를 간단히 하고 버스에서 먹을 간식거리를 구매 한 뒤 해가 저물어 갈 때쯤 버스에 탑승했다.


이스탄불을 떠나 조지아를 가기로 결정했을 때 유일한 걱정거리가 하나 있었는데, 바로 트라브존-카파도키아 동선 문제였다. 이 전에도 조지아에서 마슈르카등을 통해 3~4시간의 이동을 경험해봤기도 하고, 나는 이전 유럽 여행에서 최대 9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이동해 본 경험도 있지만 트라브존에서 카파도키아를 가는 건 그 정도는 비교도 되지 않는, 무려 16시간을 버스로 이동해야 하는 루트였다. 자가용을 타고 돌무쉬를 타고 온 것보다 편하게 온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이곳을 오기 위해 이동했던 약 3시간 정도를 합하면 오늘 하루에만 19시간의 이동을 거치는, 듣기만 해도 진 빠지는 대장정.


19시간의 이동.. 쉽진 않지만 어쩌겠어. 그래도 해야지..


코로나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전쟁으로 인해 14시간의 비행이 경험해 본 최장 이동시간이지만, 그보다 더 긴 이동시간에다 개인적으로 대단히 예민한 편이라 대중교통 내부에선 잠도 잘 못 자는 나. 그나마 다행이라면 버스 내부 좌석이 하나하나 넓기도 하고 2시간 정도마다 꼭 휴게소에 들러 스트레칭할 수 있는 시간을 갖는다고는 했지만 근본적인 피곤함이 사라지진 않을 터였다.


카파도키아.. 무사히 도착할 수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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