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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 꿈같은 곳이지만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

by 담아

장장 16시간의 버스이동을 이겨내고 도착한 카파도키아.


물론 쉽지 않았지만 생각보단 무난하게 흘러간 것 같다. 자다 깨다를 반복하며 새벽 6시쯤 눈이 떠졌을 때 일출이 다가오는 것을 보았고, 그 유명한 열기구들이 하나둘씩 떠 다니는 걸 보면서 슬슬 카파도키아에 도착했다는 게 실감 났다.


마을에 도착하자마자 가장 처음 마주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한식당과 중식당이었다. 원체 유명한 관광지인 데다 특히 동양인들이 많이 찾는 만큼 아시아 식당이 많은 편이고, A의 말로는 탕수육 유명한 집이 있다고 머무는 동안 꼭 한번 가보자고 하더라.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숙소로 먼저 갔는데 당장은 체크인 준비가 되지 않았고, 결국 오늘은 아무리 빨라도 오후 2시에 첫 일정을 시작해야 할 듯해서 저녁에 할 만한 간단한 콘텐츠가 있는지 A와 계획을 세울 겸 숙소의 직원에게 투어 정보를 얻어보기로 했다. 이때 약간 재밌는 해프닝이 생겼는데, 직원친구가 나보고 뜬금없이 프랑스어 쓸 줄 아냐고 물길래 어떻게 알았지 싶었는데 내가 D'abord(우선 - 보통 말을 시작할 때 많이 쓴다.)이라고 했던걸 들었다고 했다.


A의 도움과 정말 짧은 생존영어로 어찌어찌 여행을 이어가고 있긴 하지만, 나의 영어 실력은 그다지 좋진 않다. 그래도 외국에서 오래 산 경험을 기반해 외국인과의 대화를 무서워하는 편은 아니라 짧은 영어와 손짓 발짓, 내 멋대로 프랑스어를 가끔 섞어가며 대화를 이어나가고 있지만, 보통 대화를 시작하는데 자주 쓰는 말버릇인 D’abord(우선)와 En fait(사실)을 대체할 영어를 몰라서 그냥 저 표현은 곧이곧대로 프랑스어로 쓴 걸 들었나 보다.


어쨌든 그 직원도 프랑스어를 쓸 줄 알았고, 내 비루한 영어 실력과 달리 프랑스어는 일상생활 하는데 전혀 지장 없는 편인만큼 오랜만에 말이 통하는 외국인을 만난 것에 신나서 이런저런 대화와 함께 투어에 관한 꽤 많은 정보를 얻어낼 수 있었다. 뭐가 됐던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건 삶에 있어 종종 재밌는 이벤트를 만들어주긴 하지만, 여행을 좋아하는 나는 한국 가서 영어를 꼭 배워야겠다고 다짐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여행을 더욱 기쁘게 만드는 소소한 추억들


그렇게 기다리다가 늦은 한시쯤 겨우 체크인 한 뒤 짐정리 마치고 바로 씻었다. 장장 20시간 정도의 대 장정이 쉽진 않았어...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친 후엔 마침내 방에 발코니가 있길래 컵라면 두 개 물 올려서 그곳 벤치에 앉아 A와 노래 키고 먹었다. 피곤도 어느 정도 해소되고, 개운하게 몸도 씻고, 날씨 적당히 따듯하고 바람 솔솔 부는 발코니에 앉아 이국적인 풍경 보면서 먹는 컵라면.. 이게 행복 아니면 뭐겠어?




적당히 쉬다가, 오늘 우리의 유일한 계획인 ATV 투어를 하기 위해 픽업 차량을 타고 움직였다. 결론부터 말하면 이 투어는 완전 내 취향 그 자체였다. 직접 사륜구동 ATV를 직접 운전하면서 유명 스팟인 로즈밸리의 일몰을 구경하는 루트였는데, 비록 내가 면허딴지는 얼마 안 되나 속도감은 즐기는 사람이기에 처음 익숙해지는 시간 좀 갖고 난 뒤엔 질주하며 스트레스를 풀었다.


심지어 운전과 동시에 함께 투어 온 인원들 사진과 영상도 각각 찍어주고 에어드랍으로도 보내줬는데 A가 무슨 사진사로 따라왔냐고 어이없어하면서 웃더라. 현지 가이드 친구도 나보고 여기 취직할 생각 없냐고 웃으면서 농담을 건넸다. 나도 즐겁고 남들도 내 덕에 잘 나온 사진 건졌으면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뭐가 됐든 내가 생각했던 풍경은 아니다.


개인적으론 ATV자체로서의 재미가 강했던 터라 로즈밸리에서 보는 노을이 엄청 와닿진 않았다. 게다가 ATV 투어를 하는 팀이 우리뿐만이 아니라서, 솔직히 말하면 예쁘다는 느낌보다는 흙먼지 날려가며 이동하는 수백 대의 사륜구동이 진짜 세기말 감성을 연출하고 있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어쨌든 간에 사진도 많이 남기고 재밌는 경험과 함께 너무나 만족스러웠던 투어였다.




투어를 마치고 난 뒤엔 잔뜩 뒤집어쓴 흙먼지를 가볍게 씻고, A가 너무 가고 싶어 했던 중식당으로 저녁을 먹으러 가 마라샹궈와 꿔바로우, 볶음밥을 주문했다. 그는 이미 두 달 넘게 세계 여행을 하며 아시아 음식을 너무 먹고 싶어 했고, 나는 어떤 음식이 있어도 웬만큼 다 잘 먹는 편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동양인인 만큼 입맛에 잘 맞는 음식이 있으니 즐겁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음식과 함께 술을 곁들인 김에 오래간만에 A와 많은 얘기도 나눴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우리가 함께 다닐 수 있는 건, 동행의 이유 자체가 ‘같이 있으면 즐겁기 때문’이다. 이게 깨지면 그때부터는 동행을 이어나가기 힘들 수도 있겠지만, 일단 그런 걸 생각하기보단 지금까지 겪었던 약 2주간의 시간들이 너무 즐거웠던 것처럼 현재를 더 소중히 하며 여행을 이어나가고 싶었다.


약간 비싸긴 했지만 음식도 괜찮았고 맥주도 맛있던 데다, 디저트로 터키아이스크림도 먹었는데 술을 좀 많이 먹어서 그런 건지 체감상으론 이스탄불에서 먹었을 때보다 훨씬 맛있더라. 뭘 해도 펼쳐지는 예쁜 풍경이 마음에 드는 곳인 만큼 내일도 또 즐거운 날이 펼쳐질 것을 한껏 기대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A는 나중에 한국에서 보면 내게 밥을 한번 사고 싶다는 얘기를 건넸다. 나는 여행 도중에도 늘 고정 수입이 있기도 하고, A보다 나이가 있던 만큼 모아둔 돈이 훨씬 많은 터라 금전적인 부분에서 내가 더 지불하는 상황이 종종 있던 게 고마웠던 모양이다. 물론 우리의 여행에서 내가 돈을 더 내는 게 불만은 전혀 없었는데, 우리가 함께인 이 상황이 즐겁기도 했을뿐더러 여행 계획도 하나부터 열까지 A가 짜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의 호의가 고마웠고 나도 한국에서 만나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다만 지금까지 크고 작은 인간관계를 숱하게 거치며, 당장은 우리가 늘 함께 있기에 이렇게 잘 지낼 수 있지만 여행이 끝나고 나면 A와는 연락이 힘들 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뭔가 잘못했다기 보단 함께 다녀보니 관계를 유지함에 있어 그는 나와 다른 유형의 사람이란 걸 파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생각이 나의 못난 방어기제와 섞여 마음에도 없는 말이 나와버렸다.


"이 여행이 끝나면 우리 관계도 끝이지 뭐.. 굳이 뭐 하러 연락을 해?"


말하고 난 뒤 아차 싶었다. 아무리 장난식으로 얘기했다곤 하나 이와 비슷한 실수를 이전에도 한 적이 있는데, 내가 상처받기 싫어서 남을 상처 주는 방식을 택했던 과거의 나는 결국 그 관계를 잃은 적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성장하지 못한 채로 또 같은 실수를 반복한 것이다.


난 어느샌가 A가 많이 소중해졌나 보다. 그렇기 때문에 너무 마음을 열면 또 아플 것 같아서 조금 밀어내버렸다. 그와 한국에서도 만날 수 있길 나도 희망하지만, 그를 너무 가깝게 생각했다가 결국 한국에서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 오면 스스로가 상처받을 것을 알만큼 관계에 약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다만 실수했다는 것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나의 말은 엎질러진 상태였다.


생각보다 솔직하게 A는 나의 발언이 속상하다고 했다. 하지만 무슨 생각이었는지, 혹은 술이 들어가서 그랬는지 나는 별 다른 언급 없이 다른 주제로 얘기를 돌렸다. 어찌 보면 연인과의 이별이라는 큰 관계의 상실을 겪고 온 지금, 새롭게 쌓이는 어떠한 관계에 오해가 생기고 해명하는 행위가 아직은 피곤하게 느껴졌던 것 같다.


다만 이 말이 화근이 되어, A와의 동행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어리석게도 이때는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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