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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파도키아, 아름다운 곳이지만

나와 A는 다른 사람이니까

by 담아

A와 함께 아침 일찍 일어나서 일출을 보며 하루를 시작하기로 한 날.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는 실수를 했다. 분명 잘 자고 있는데 체감상 새벽 4~5시 정도에 갑자기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길래 비몽사몽 한 상태로 문을 열었는데 A가 앞에 서있더라. 잠시 상황 파악을 해보니 알람을 오전 5시가 아니라 오후 5시에 맞춰놔서 그가 깨우러 온 것이었다. 평소 시간 약속을 중시하는 만큼 내 인생에 있어 거의 하지 않는 실수인데 그게 바로 오늘이었다!


부랴부랴 준비 한 뒤, 걸어서 20분 정도 걸리는 일출 스팟으로 A와 소소한 대화를 하며 걸어갔다. 쌀쌀한 새벽 공기를 맞으며 어느 정도 가다 보니 어둠 사이로 준비하고 있는 열기구들을 마주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점점 떠오르는 해와 함께 비행을 시작했다. 사실 마주한 첫인상은 '엄청 호들갑 떨 정도로 예쁘진 않은 것 같던데?' 싶다가도 막상 날아오르는 열기구가 수십 개 이상 되니까 확실히 감상이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왜 사람들이 이걸 보러 오는지 알겠더라. 카파도키아에 올 때까지만 해도 열기구를 탈까 말까 고민했지만 결국 이렇게 멀리서 보는 것으로만 만족하기로 했는데, 그 풍경을 마주하니 인생에서 한 번쯤은 타도 괜찮겠다는 생각이었다.


일출과 동시에 하나 둘 떠오르던 열기구


다만 나중에 알았는데, 내가 찾은 이 일출포인트가 알고 보니 제일 유명한 스팟이 아니었다고 한다. 그냥 구글에 일출 포인트라고 적혀있는 곳으로 아무 생각 없이 온 건데 정작 알아보니 사람들이 풍경을 보러 가는 곳은 따로 있다고 하네... A가 크게 뭐라고 하진 않았지만 약간 따가운 눈총을 받긴 했는데, 어쩌겠어! 내일 그리로 가면 되는 거지 뭐.




오늘은 딱히 정해진 일정이 있는 날이 아니었기에 나는 도시 이곳저곳을 구경하고, A는 근처 카페 가서 한적하게 각자 시간 보내볼까 하는 얘기를 나누었다. 그러다 우연히 튀르키예는 국내 영문 면허증으로도 운전이 가능하다는 것을 발견하여 A에게 이 얘길 전했고, 그 역시 크게 관심을 보이길래 차량을 빌려 함께 카파도키아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는 게 어떻냐는 나의 제안을 바로 수락했다.


갑작스럽게 당일치기 렌트여행이 계획된 만큼 바쁘게 움직이기로 했다. 숙소도 변경해야 해서 급하게 체크아웃하고, 새 숙소에 간단히 짐 푼 뒤 빨래방도 다녀오고, 차에서 먹을 군것질거리도 구매한 뒤 한국인들한테 유명하다는 업체로 가서 바로 렌트까지 일사천리로 진행했다. 비용은 보험을 포함해 하루 대여 약 10만 원 정도였지만 이미 가격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기대감이 커져있었기에 고민하지 않은 채 바로 결제하였다.


우치히사르 성


아무 계획도 없이 일단 차량 먼저 빌린 터라 목적지 없이 돌아다니다 우연히 도착한 요정의 굴뚝이라는 관광지에서 사진을 잔뜩 남기고, 아바노스라는 바로 옆 소도시에서 드라이브를 하며 근처에 있는 우치히사르 성이란 곳으로 향했다. A가 찾은 이곳은 카파도키아의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이었고, 올라가는 길이 약간 가파른 데다 벌레도 많긴 했지만 정상에서 마주한 모습은 정말 장관이었다. 늘 그랬듯 무계획에 생각 없이 온 것치곤 또다시 너무나 좋은 경험을 마주 한 곳이다.


그 후엔 장소를 딱 정해두고 돌아다니기보단 눈대중으로 지도를 쓱 훑으며 도시를 넓게 쭉 돌아다녔다. 시간 맞춰서 선셋 포인트에 일몰 보러 가기로 한 것을 제외하면 크게 일정이 없기에 드라이브하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냈는데, A는 장기 여행이 처음인터라 해외에서 렌트하여 운전하고 다니는 게 버킷리스트 중 하나라고 했던 만큼 더욱 기분이 좋아 보였다.


이런 장소를 운전하며 다닐 수 있었다니!


급하게 빌린 것치곤 차의 디자인도 만족스러운 데다 이 지역은 자연경관이 대단히 이색적이고 아름다운 만큼 그 구석구석을 우리가 가고 싶은 대로 자유롭게 다닐 수 있다는 것에 들뜨기도 했고, 심지어 날씨까지 좋아 창문을 활짝 열어두고 신나는 노래도 크게 켜둔 채 카파도키아의 한적한 도로를 달리는 건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만큼 좋았다는 말밖에 할 말이 남지 않았다. 정말 여러 가지 좋은 순간들이 있었지만 여행 시작한 이후로 오늘이 가장 여유로우면서도 즐거운 날이었다. 조지아가 제일 기억에 남을 줄 알았는데 금방 갱신됐네!




오늘의 마지막 일정은 유명한 노을 스팟에 방문하는 것. 다만 여기서 나와 A에게 약간의 트러블이 생겼는데, 무계획으로 다닐 땐 오히려 가벼운 마음으로 다니는 나지만 일단 계획이 잡히고 나면 그것을 완수하고 싶은 내 성향으로 인해 생긴 마찰이었다. 이미 해는 조금씩 지고 있기에 일정에 맞게 도착하려면 서둘러 가야 하는데, 내 기준에 약간 늦장을 부리는 A의 모습을 보고 계획에 지장이 생길 수 있다고 걱정한 나머지 표정이 조금 굳었었나 보다. 그는 달라진 분위기에 무슨 일 있냐고 묻길래 어차피 계속 여행 다닐 것을 감안하며 솔직하게 말했다.


"무계획은 무계획대로 매력 있는 여행이지만, 어떤 일정이 정해지면 그것에 약간 몰두했으면 좋겠어요. 일몰은 둘 다 보고 싶은 일정인데 조금씩 늦장을 부려서 계획이 조금씩 밀리게 되잖아요."


다행히 이 부분은 여행 내내 A 스스로도 인지하고 미안해하고 있던 부분이라고 받아들이고 사과하길래, 사과보다는 재밌게 여행 같이 다니자고 했다.


결국 아슬아슬하게 도착한 일몰 포인트. 예쁜 풍경 위로 펼쳐지는 일몰을 바라보며 열심히 사진 찍고 놀다가, 마지막에는 해가 다 진 도시를 보면서 가만히 앉아 노래 들었다. A는 A만의 시간을 가지고, 나는 나만의 시간을 가지면서.


저 멀리 우치히사르가 보이는 일몰 스팟


이때 또 눈물이 조금 나오더라. 지금 나는 나름 행복했고, A가 옆에 있다는 게 참 고마웠다. 다만 이렇게 우연히 만나 함께 다니게 된 동행이랑도 이 순간들이 이렇게 즐겁고 기쁜데, 내 소중한 인연이랑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마음이 나를 눈물짓게 만들었다. 과거의 일은 다시 돌이킬 수는 없는 일일 테지만, 미래에 또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나는 꼭 이곳에 다시 방문할 것이다. 그만큼 이곳은 매력 있는 장소니까.




간단한 식사를 마치고 난 뒤 숙소에 복귀한 후, 앞으로도 2주 넘게 동행이 잡혀있는 만큼 차후 일정에 대해 논의해 보기로 했다. 사실 A가 우리의 동행에 대해 할 말이 있다고 했고, 마침 나도 어제 내가 A한테 건넸던 말과 오늘 있던 사소한 마찰을 포함해 대화할 시간이 필요하다고 느끼던 차였다.


어느샌가부터 우리는 조금씩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함께하는 이 순간들을 좋게 보내고 싶다는 생각은 일치했기에, 그래서 더욱 서로의 여행을 망치고 싶지 않아 자연스레 조심하게 되고 필요 이상으로 눈치를 보는 부분들이 생긴 것이다. 일례로 나는 점점 A가 편해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조금씩 친한 친구처럼 대하던 행동에 그는 내 감정변화를 아예 다른 방향으로 받아들인 적도 있었고, 나 역시 조지아에서부터 그러지 말아야겠다고 다짐은 했음에도 이 여행이 더 좋아지면서 혹시나 그가 나와의 여행에 불편한 건 없을까 하는 생각을 한두 번 한 게 아니었다.


우리는 지난 2주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같이 여행하며 좋은 추억도 많이 쌓았고 서로에 대해 더욱 잘 알게 되기도 했다. 다만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즐겁던 처음과 달리 서로의 성향이나 성격이 확실히 다른 점도 있다는 것도 알았고, 그로 인해 알게 모르게 오해가 많이 쌓인 것이었다. 그도 그럴게 2주란 기간은 서로가 아무 마찰 없이 여행할 수 있는 신뢰나 이해를 쌓기에 긴 기간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당장 오늘 오후에 있던 일도 그렇고, 몇 년간 함께 한 친구와 한 여행이라면 서로의 성향을 잘 알았을 것이기에 생기지 않았을 오해지만 우리한텐 아직 그만한 시간이 쌓이지 않았으니까.




결국 난 차라리 여기서 동행을 그만두는 게 어떻냐는 말을 어렵게 꺼냈다. 물론 나 역시 A와 여행을 계속 이어나가고 싶었다. 그와 함께 다니며 심적으로 정말 많은 의지가 되었기도 하고, 좋은 추억도 많이 쌓을 수 있었으니깐. 다만 그렇기 때문에, 서로가 쌓이는 오해로 더 이상 각자의 여행이 무너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고맙게도 A는 단순히 나와의 여행을 포기하기보단 시간을 가지며 갖고 있던 오해를 풀기 원했고, 우리는 오랜 대화를 거쳐 각자가 여행 다니며 가졌던 서로에 대한 걱정이나 몰랐던 부분들을 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 역시 어제의 일을 사과했다. 한국에서도 보자고 제안해 줬던 A의 제안에 내가 그렇게 말했던 건 진심이 아니었다고, 부끄럽지만 A가 내겐 너무 좋은 사람이라 어긋난 방어기제와 심술이 섞인 실언이었다고, 그렇게 말해줘서 너무 고마웠다고 솔직히 전했다. 어떻게 될지 모르지만, 일단 남아있는 튀르키예의 소도시 여행을 마치고 난 뒤 이동하게 될 이스라엘과 요르단, 이집트의 일정도 같이 즐겁게 보내보기로 했다.


결국 늦은 새벽에야 우리의 대화를 마치고 난 뒤 잠에 들 수 있었다. 알게 모르게 쌓인 오해와 감정을 풀고 내일부터 다시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지만, 점점 관계가 쌓일수록 그것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는 조그만 불안감을 지울 수는 없었다. 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던 여행이 즐겁게 느껴진 것과는 다르게 오늘만큼은 걱정이 조금 더 앞서는 마무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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